심산의 마운틴 오딧세이 - 산이 만든 책, 책 속에 펼쳐진 산
심산 지음 / 풀빛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산을 좋아하던 시인 고정희는 지리산에서 그만 실족사하였다. 오래 전에 읽은 성석제의 어떤 칼럼에서 지리산을 등반하던 중 추락하여 죽음의 코앞에 다가가는 아찔한 경험에 대한 술회를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고 했던 것도 위에서 말한 인상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살까말까 망설이며 뒤적이다 발견했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더더욱 나를 부추겼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이제 죽는구나 하는 순간 불안이 가시고 지난날의 일들이 눈앞을 스치며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그리고 갑자기 가족과 친구가 생각나며 자기가 자기의 몸에서 빠져 나와 밖에서 자기를 쳐다본다.”


“그것은 유니크하고도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7~8미터를 추락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기껏해야 몇 초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추락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고, 회한과 그리움이 담긴 짧은 인사말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결국에는 죽음까지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을 긍정하게 되는 지극히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오이겐 라인홀트 메스너의 산에서 극한 체험에 대해 쓴 <죽음의 지대>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죽음 직전까지 다가간 자의 기록도 있고, 산에 미친 사람의 유쾌한 청춘 고백도 있고, 등반을 비즈니스처럼 여기며 철저한 프로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오르고 또 오르려 하는 자의 기록 또한 있다.


이들은 왜 산을 오를까. 라인홀트(최강의 클라이머이자, 최강의 산악 문학 작가)는 말한다. ‘정복을 위한 등반’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등반’이라고.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징하게 깨어 있는 상태로 삶을 지속시키고 싶어서 산을 찾는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지대인 악산에서 삶의 한계에 부딪쳐 본 자만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깨달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무’ 즉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깨달음이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는 말한다.


“자기 인생이 ‘무’라는 것을 안 자만이 자기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다. 일단 죽음의 지대에 들어서면 의미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사람은 불안에서 해방되고 시간적 공간적 무한 속에서 자기를 해소시키게 된다. 이러한 체험을 겪고 나면 사람은 자기가 새로 태어난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상태는 -다시 산기슭에 내려오게 되므로-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산을 내려오면 그 깨달음의 지속이 끊긴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 도달의 지속을 위해 이들은 오르고 또 오르고 ‘죽음과 대면하는 극한의 체험’에 다가가는 것 같다. 솔직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으로선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다가갈 경지일 것이다. 


산(뒷산을 등산하는 형태이든, 악산을 등반하든 형태이든)을 좋아하는 필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산서(山書:산에 대한 책들)에 대해 기록해 놓은 책이 이 것이다. 산에만 오르고 산서를 읽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산행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산서에만 매달릴 뿐 산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다면 그것 역시 어설픈 남독이라고 필자 심산은 말하고 있다.


산서에 빠진 필자가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는 산서(산에 대한 책)들은 시보다 시적이고,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며, 영화보다 드라마틱하고, 철학책보다 심오해 보인다. 그리고 주로 블루톤의 산을 담은 사진과 깔끔한 편집도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삶이 너무 지지부진하다고 느끼는 나는, 심산이 소개한 산서 중에서 아무래도 라이홀트의 <죽음의 지대>를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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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실족사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라이홀트의 <죽음의 지대>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베르나르의 <타나토노트>의 영혼 여행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죠.
혼이 육과 분리되고 정신을 차릴때 다시 육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생생히 느낀 경험이 있답니다.

icaru 2004-05-15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어떤 산에 오르다가...떨어질 뻔한 경험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전...산에 많이 오르지도 않으면서...이런 책을 좋아하는 노릇이라니...이것도 남독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비로그인 2004-05-15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주 인상깊게 읽었어요. 전 사실 히말라야처럼 고산지대를 등반하려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적 공간적 무에서 자기를 해소시킨다니. 일종의 물아지경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걸까요. 그리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현상.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신기하네요. 일단 보관함에 담습니다.

soul kitchen 2004-05-1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GEO에서 탈레이사가르를 등반하던 우리나라 젊은이들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그 대원들 중 몇 명이 실족사했어요. 기자가 동반해서 취재한 기사여서 그들의 살아있을 때의 모습과 그들이 죽어가는 상황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볼 수 있었는데, 그 전까진 저도 복돌성님처럼 목숨을 걸고 산을 타는 사람을 이해하질 못하겠더니,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는, 슬프고 안타까운 중에도..이들이 왜 이렇게 산에 미치는지 알 것도 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책은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하겠구만요. 추천합니다.

stella.K 2004-05-1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저자한테서 창작 수업을 들어었더랬습니다. 아, 그 선생님이 이런 책도 쓰셨네요. 하하하! 넘 반가운 거 있죠. 그 선생님 그때도 산을 너무 좋아하셔서 뻑하면 당신이 산 탄거 얘기해 주시곤 했는데, 결국 일을 내셨군요. 입담은 얼마나 좋았다구요. 술고래에...
보구싶어지네요. 꼭 오빠 같다는 느낌이에요. 얼굴은 좀 커서, 큰바위 얼굴이라고 안 듣는데서 수근거리곤 했는데. 하, 이거 옛 선생님을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난 솔직히 산 보단 들이나 바다가 좋습디다. 산들을 왜 타는지...? 그래도 "산서에 빠진 필자가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는 산서(산에 대한 책)들은 시보다 시적이고, 소설보다 흥미진진하며, 영화보다 드라마틱하고, 철학책보다 심오해 보인다."란 언니 말씀 새겨 볼랍니다.^^

icaru 2004-05-1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언니..전 이 책을 읽으면서...내가 아무리 산을 좋아해도...저 경지엔 죽을 때가지...이를수 없을기야 하구 생각했죵...

솔키 님 ....아...제가...아는 언니의 남편도...k2 등반대를 따라 취재 갔다가...운명을 하셨죠... 5년 전이네요....아...

스텔라 님...그러게요...심산이...시나리오 작가람서요...태양은 없다와 비트의 시나리오를 쓴....전...책날개에 작가 사진 보고...이렇게 동그라니...곱상한 외모의 소유자가...그 거친 산을 탄다구..에이...모야,,,,했답니다...입담도 좋고...술도 잘하는 위인이셨군요...그 작가가...ㅋㅋㅋ

설박사 2004-05-1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서라.. 재미있네요. 그런 종류의 책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

stella.K 2004-05-1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곱상하다굽쇼?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고도의 포토샵'(냉열사님 표현에 의하면)에 의한 것일 겁니다. 그 선생님 나쁘게 표현하면 자유분방하고, 좋게 말하면 남자답게 생기셨죠. 어떻게 폼 잡고 찍었을지 알 것도 같습니다. 흐흐.

비로그인 2004-05-16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러네요. 惺惺寂寂이라고...
산에 올랐다고, 그리하여 다시 태어난 나를 발견했다고, 그것에서 끝을 보았다고 산에서 내처 살 순 없는 일....
그러기에 산을 오르고 내리는 고행을, 자신을 찾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어쩐답니까..산에 오르지조차 못 해 본 이 몸은....
많은 걸 생각해 볼 수 시간을 선사할 것 같습니다...이 책.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님~ ^^

호밀밭 2004-05-16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은 저에게는 참 먼 곳이네요. 걷기는 좋아하지만 오르기를 좋아하지 않아 산에 안 간지 오래 되었어요. 작년부터인가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그냥 생각만 할 뿐 실천에 옮기지 못하겠더라고요.
이 책 저에게는 처음 접하는 책이네요. 뭔가 오래 두고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icaru 2004-05-1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박사 님 오랜만여요...^^

냉열사 님~! 아...정신의 최적인 상태가...계속 유지되는 그런 삶은 과연 인간의 삶이 아닌 모양이요....희노애락이 순서를 바꿔가며 도는군요^^

호밀밭 님...마자유...단번에 읽는 책이 아닙데다...그래서 사실...저도 뜨엄뜨엄 읽었슈..
생각해 보니...저두 산에 안 가본지...참 오래네요...^<^;;

내가없는 이 안 2004-08-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정말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하시는군요. 산서라는 것도 낯선데 산서에 대한 에세이라니!
이 리뷰는 고정희 시인 이야기가 나와서 반갑게 읽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라인홀트의 죽음의 지대를 보관함에 넣었어요. 예전에 성석제의 단편 중에 떨어지는 그 순간을 소설의 처음과 끝으로 잡은 걸 읽은 적이 있거든요. 아마 성석제는 자기 경험에서 그 단편을 쓴 모양이네요...

icaru 2004-08-06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성석제의 작품 중에 그런 단편이 있군요.!! 역시 성석제를 자기 경험을 써먹을 줄 아는(?) 사람인듯해요...
그 사람의 단편들을 읽다보면...얼마 정도가 경험에서 나온 것이며 얼마 정도가 주어들은 것일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흐흐...
올초에 황만근 씨가 이렇게 말했다...맞나요? 그걸...샀는데...역시나 다른 책들에 밀려..못 읽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