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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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9쪽)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12쪽)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38쪽)

자비로운 자연히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75쪽)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89쪽)

현장학습을 온 모양이었다. 여교사는 아이들에게 폐지의 재활용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정말 어이없게도 책 한 권을 집어들더니 학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책의 내용물을 뜯어내는 시범을 당당히 해 보였다. 그러고 나자 아이들이 순서대로 한 명씩 책을 들어 표지를 뜯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책들은 반항하며 버텨보려 했지만 작은 손가락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노동자들이 몸짓으로 아이들을 부추겼고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순진한 얼굴들이 환히 빛났다...... (95쪽)

햇빛에 눈이 부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내가 신봉했던 책들의 어느 한 구절도, 내 존재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이 폭풍우와 재난 속으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113쪽)

평생에 걸쳐 내 안으로 스며들었던 텍스트들과 내 모든 사고도 함께...... 내 삶이라고 해봐야, 저 아래 내 지하실에서 사회주의 노동당원 두 명이 짓이겨대는 작은 생쥐 한 마리만도 못한것이긴 하지만....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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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예수, 예수 - 이 시대가 잃어버린 이름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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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뭔가를 알 수 있음은 순전히 하나님 덕분이다. 그분이 당신의 뇌와 인지 능력을 지으셨다. 나아가 우리는 그분의 계시가 없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해 놓으셨다. 당신은 그분을 통해서만 사고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그분의 정체와 피조물인 당신의 정체를 바로 알 수 있다. (29쪽)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은 혈통과 돈과 인종과 계급을 중시하지만 그분은 이 모두를 뒤집어엎으신다. 예수님의 교회 밖에서 애지중지되는 그것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퍽이나 중요한 것들이 나의 집에서는 그렇게 중요해서는 안 된다." (60쪽)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자신의 영광을 비우셨다는 사실은 당신도 권력 있고 호화로운 사람들, 인맥이 넓어 앞길을 터 줄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권력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정신이다. 하나님이 우리 중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 (84쪽)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나 필요하다. 문화적 권력의 중심부도 거기에 포함된다. 즉 영향력과 재능과 재력과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그런 사람들에게 매료되거나 그들 쪽에 유리한 편견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도 섞여 살면서 그들을 이웃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하지만, 그러다 보면 유혹이 따른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섬길 뿐, 멋과 권력의 ‘중심부‘에 들려는 욕구나 갈망일랑 버려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인종과 혈통과 부와 지위가 결국 중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아니라 유복한 자들에게도 호불호의 편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지위와 재산을 숭배하는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사람을 상대로 우월의식에 빠져서도 안 된다. (122쪽)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방식은 2층 사람이 1층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분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은 세익스피어가 햄릿을 대하는 방식과 같다. 세익스피어는 햄릿 자신과 햄릿의 세계를 창조했다. 햄릿이 세익스피어를 알려면 저자가 극중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밝혀야만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그분을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의 주장은 그보다 무한히 더 경이롭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정보만 써 주신 게 아니라 역사의 극중에 자신을 써 넣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178쪽)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상한 행위와 성취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행위로 시작된다. 바로 겸손히 구하는 일이다. 그러면 시간이 가면서 우리 안에 생명과 기쁨이 자라는데, 역시 평범하다 못해 거의 따분한 실천들을 통해 자란다. 매일 순종하는 것,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것, 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섬기는 것, 환난 중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조금씩 믿음이 자라면서 우리 삶의 기초는 기쁨의 지하수 쪽으로 점점 더 다가간다.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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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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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젊은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9쪽)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지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14쪽)

장은 심사숙고했다. 신중하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습관대로 여러 가능성을 요모조모 따져 보았다. 그리고도 한번 더 망설였다. 마침내 검버섯투성이의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G2의 폰을 집어 G3에 놓았다. (31쪽)

물론 그는 다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협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35쪽)

지금까지 우리는 지구의 외형과 관련해 아주 다양한 물질들이 끊임없이 조개 성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조개화가 지구의 외형뿐 아니라 현세의 모든 삶, 지구상, 아니 전 우주의 모든 사물과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55쪽)

우주의 조개화보다 한층 더 끔찍한 사실은 바로 우리의 육신이 끊임없이 조개 성분으로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붕괴는 아주 격렬한 것이어서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56쪽)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고들 말한다. 이제 인간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63쪽)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읽으면서 자리에 앉고,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오로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새로운 귀중한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70쪽)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로 어떤 책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감히 답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책이 전혀 없었다고? 모든 책이 다 그렇다고? 어떤 한 권의 책이라고? 나는 모른다.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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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살아간다
리즈 마빈 지음, 애니 데이비드슨 그림, 김현수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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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거의 4억 년 전부터 이 땅에 존재해왔다. 깊은 지혜를 쌓아 오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다. 그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나무들은 적응과 생존과 번영의 달인이 되었다. (9쪽)

현재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은 좋은 시절이 왔을 때 기꺼이 그 시간을 즐길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매년 5월이면 밤나무는 캔들이라 알려진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밤나무의 꽃향기는 다양한 곤충을 불러 모으고, 유서깊은 이 꽃가루 파티에는 모두 차별 없이 초대된다. (34쪽)

사람들처럼 나무도 관계 속에서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과학자들은 미송 같은 나무들이 잠정적으로 서로의 햇빛을 가리게 될 상황을 감수하면서 왜 가깝게 붙어 자라는지 의아해했다. 알고 보니 토양 속 곰팡이의 도움으로 나무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영양분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76쪽)

나무도 살다 보면 혹도 생기과 멍이 들면서 골칫거리를 만나기도 한다. 나무는 비록 움직일 순 없으나 어느 정도 선에서 단념할 건 단념하고 넘어가는 지혜가 있다. 망가진 부분을 ‘고치거나‘ 감염균과 싸우기 위해 에너지를 다 쏟아붓는 대신, 나머지 건강한 조직을 지키기 위해 문제가 있는 부위만 봉인해버리는 것이다. 이 분야의 명수가 바로 유럽 호양목이다. (82쪽)

우리 앞에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이길 힘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 그것이 곧 자신감의 열쇠다. 그 방면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무가 뉴질랜드산 카우리소나무다. 이 나무는 숲의 일원으로서도, 철저히 혼자서도 1000년 이상 살아갈 수 있다. 놀라운 자급자족의 힘으로 독립적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91쪽)

설령 벌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면 진정한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 나무가 스스로 참 잘했다고 자기 등을 두드려줄 순 없으니, 참 아쉽다. 자작나무는 빙하기부터 자기 일을 정말 열심히 해왔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빈터가 생기면 가장 먼저 바람을 타고 작디작은 씨앗들을 퍼뜨려 다른 나무들을 위한 기반을 준비하는 나무가 바로 활기 넘치고 우아한 자작나무다. 수명이 8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나무는 그렇게 자기 할 일을 마친 후 생을 마감하고, 정작 본인은 사라지면서 새로운 숲이 삶을 이어나가는 데 만족한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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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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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동정과 사랑을 구분했다. 사랑이 깊어지면 연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시작은 안 보면 못 견디겠는 애틋함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33쪽)

이미지는 적나라하고 환상적이어서 강한 게 아니라 관념의 연합이 멀리 떨어져 있고 정확해서 강한 것이다. (77쪽)

하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지환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는 잘 안 늙거든. 제일 천천히 간대. 목소리가. 간다고? 슬프다. 가다니.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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