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는 시인과 독자 모두를 스스로 당당해지게 만들고 시인과 독자 모두를 편드는 '시인선'이다.

199명의 시인들이 말하고 있는 '시란 무엇인가'와 그들의 시가 들어있다. 

신형철이 펴내는 글에 언급한 시인과 독자 각자의 고충에 동감한다. 

*누구나 한 때, 나 또한, 시를 썼고, 시인이 되고 싶었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남은 지금의 시인을 볼 때, 선망과 질투 어린 시선을 주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이미 시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매번 시인이 되기 위해서다.

*시는 이해하기 어렵다기에 시인들은 느껴보라 말하지만, 시를 읽는 우리는 유난스러워 보일 뿐이다. 주변의 불만 가득한 시선을 업고 시를 읽는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시를 위해 세상과 대결하고 있는 듯한 억울함이 있다. 

*시인선은 시인과 독자의 고충을 동시에 해결해 준다.

'시가 진실한 것을 위한 하나의 장소'라는 매리언 무어의 말처럼, 

슈타이거가 말한,  '회감, 즉 시를 읽을 때 과거의 감정이 잠깐 돌아오고 다시 체감되는 경험'처럼, 

시인선을 통해 시인과 독자 모두는 삶의 깊이를 얻는 것이다. 

예로, 청소년기를 떠오르면 장정일의 '삼중당문고', 첫사랑을 생각하면 김이듬 '겨울휴관', 지금 몰입해야 할 때는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과 김용택 '섬진강'이 딱이다.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던 시詩다.

예전 기억이 난다. 지하철타고 통근할 때 매일 처음 만나는 노숙인에게 천원씩 기부하고, 한 주에 한편씩 시詩를 외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여명 가까운 시인들이 아직도 쓰지 않은 말에 조금 기미氣味를 보았다.

시를 읽는 이유는 앞으로 오는 시간을 미리 알려고, 지나간 시간에 용서를 빌려고, 현재를 다시 보고 또 다시 보면서 살려고 읽는다. 

시인들의 고백을 듣다 보니 그들로 별반 다르지 않구나. 

그러나,

그들은 후회하는 용도로, 고백하는 용도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진실이 진짜가 아님에 위안 받으려고, 맑은 눈 하나를 더 찾기 위해, 사랑의 자취를 보내기 위해, 말에 베인 상처를 핥아주기 위해,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 삶의 오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이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만들기 위해, 불량 시로 폄하하면서 까지 투명과 불투명의 사이에서도, 자신들을 한번 더 동요하는 마음을 세상으로 내 보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지만, 우리가 환하게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시라 여겨진다. 

문학동네에게 고맙다.

최근 '더블 빌[Bliss & Jakie)' 현대 발레를 보았다. 숨죽여 보았다. 아주 간단한 무대와 선율, 절제되고 정제된 몸, 따로 또 같지만 다른 춤, 블리스에서는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면, 재키에서는 춤에서 뿜어 나오는 수 많은 아픈 감정이 서로 교차되면서 그냥 빨려 들어갔다. 특히 입은 의상은 무용수들의 춤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 줘 실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관통 당하는 느낌이었다. 

시인들이 마지막에 쓴 말과 무용수들의 춤은 그 분야에서 최고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온전히 드러낸 최고의 정과 동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돌아보니 굳게 믿었던, 확실히 알았던 나의 세계가 전복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 온전히 내 것으로 체화하고 나의 시간으로 만들어가는 데는 순간 순간의 확신으로 다져왔다. 타인에게 틈을 주지 않게 위해, 나의 빈틈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고 본다.   

[2025 소설보다 여름]에서 관통하는 글은 이 때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합리화하고 지금의 모습까지 된 이유를 읽을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든 의도하든, '느리고, 꾸준하게, 표정 없는 얼굴로 시간을 흘러 보내는 일(124쪽)' 쪽으로 다가가는 노인과 닮아가고 있다. 

'사랑했고 사랑 받았던 과거(54쪽)'에서 자유로워지고, 나아가 미워하고 후회하고 아픈 과거도 털어버리고, 현재의 시간에 밑줄 그으며 곱씹으며 매만지는 힘을 만들며 살고 싶다. 


육십 몇 번의 봄을 맞고 있다. 새롭다.

남편의 첫째 매형이 돌아가셨다. 자신과 타인 모두를 사랑하지 않은 분이셨다. 어떻게 살았든 자신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결혼 기념일 근처에 오면 마음이 불편하다. 수 없이 많은 '만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제목 때문에 골라 든 책이다.

눈에 띄지도 않는 곳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니, 예전 카페 했던 기억이 난다.

절대 우아하지도 멋이 있지도 않는, 상상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딱 호수 위의 백조 같았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면 발 닿는 서점으로, 커피를 좋아하면 근처 카페에 가서 괜찮은 책을 골라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게 제일 좋다.

책을 고르다 보면 마음은 저절로 골라지지 않을까, 싶다.

결혼 생활도 그런 것 같다. 상상과 꿈이 아닌 치열한 '현실'뿐이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부부에서 부모가 되기까지 그리고 지금 노 부부(?)로 나아가는 시간 앞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을 돌아 본다.

우리의 시간에는 대로도 있었지만, 길이 없어 만들기도 하고, 장애물도 치우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래도 함께 지나왔다.

하지만 그 길을 같이 온 사람과는 아직도 삐걱댄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정도면 행복한 거야, 그러기에 한 몸같이 여기저기 다니고 있다. 

책을 한 권 골라 카페 순례를 갈 예정이다.  

돌아보니 순간마다 책은 늘 곁에 있어 수 많은 '만약' 을 응원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더불어 저자와 저자의 책방을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작가는 독자가 사진을 보면서 '말'을 들여다 보길 원하고 있다. 사진은 순간을 붙잡지만 시는 시간을 관통하므로, 그래서 [시인의 사진]이다.  

사진은 각자의 기억과 기록의 다른 방향에서 그나마 가장 실제를 포착한다고 볼 수 있다. 삶을 사진으로 말한다면 수없이 많은 조각난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끔 펼쳐보는 사진들, 아니 오늘의 사진으로 떠오르는 사진을 보면 온전한 기억보다는 파편적이다. 사진이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나아가는 순간과 행위의 모습들, 덧붙여 기억에 남은 것은 이전과는 같은 적이 없는 실제와 감정이 들어 있다.

남기고 싶은 순간을 찍지만, 남겨진 그 모습을 다시 수정하면서 기억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감춰지고 왜곡된다. 또 동일한 사진을 보고서도 서로가 다른 공감을 나누고, 같은 지점에 있지만 우리의 눈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거나 다르게 투영한다.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기억하려면 기록보다는 사진이 더 실제에 가까울 거 같다. 

하지만, 난무하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멋있다.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실제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보는 것도 다른 것이 많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그래서 말을 할 때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말 해 보라고 권한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보여지는 그대로 말하면서 아니면 다시 확인하면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루빈스 컵' 처럼 눈의 착각과 다름을 인식하기(대화할 때, 어떤 이는 컵에 대해, 누구는 얼굴에 대하여 말한다면 결과는 상이하다.)

-평가보다는 사진 찍은 것처럼 관찰로 말하기(약속 시간 늦은 친구에 대하여: 늦잠 잤구나, 게으르다, 얘는 항상 늦어가 아니라 10분 늦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