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열린 책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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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저수지에 던진 돌멩이처럼 그냥 사라진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매끄럽게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런가 하면 죽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위에 머무는 이들도 있다. (18쪽)

그러니까 내 말은 호프나 나나 하지라는 게 뭔지, 또는 엘패소는 여름에 늘 비가 내린다든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여름철에는 가끔 북쪽 하늘에서 유성이 비처럼 쏟아진다는 것도 우리 집 식구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85쪽)

권태는 어째서 세련된 것일까? 품위 있는 여행자 또는 공연장이나 드나드는 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권태에서 우러나오는 괴로움의 표정이 있다. (105쪽)

로라는 그런 친밀한 행위데 다른 이성을 대하듯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감싸였을 뿐이다. 다시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나이를 더 먹으면 혹여 순종적으로 반응하더라도 자신이 그 순간을 통제할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압도당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직막이 되리라고 로라는 생각했다. (108-109쪽)

로라가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 앞에 걸터앉았다. 나는 사랑에 빠진 걸까, 엄마? 그녀는 마음 속으로 물었다. 임신하게 될까? 나는 더럽혀진 걸까? 엄마, 나 좀 도와줘. 그러나 로라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134쪽)

세상에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사랑 같은 어려운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장례식도 재미있는 장례식이 있다든가, 불난 집 구경은 재미있다든가 하는 어색한 말이 그런 것이다. (141쪽)

나는 식당 문 앞으로 갔고 어머니는 나를 보고 놀란 듯하더니 마치 내가 그곳에 없는 사람인 양 다른 데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건 보지 않으면서도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147쪽)

미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꼽자면 바로 창문이다. 사람들이 창문 커튼을 열어 젖혀두기 때문이다. (149쪽)

나는 나이 든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된 느낌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데 이제는 너무 늦은 느낌. 뉴멕시코의 공기는 청량하고 차가웠다.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다. (157쪽)

‘데자뷔‘의 반대말이 있을까? 미래가 송두리째 번개처럼 눈앞에 스치는 것을 본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있을까? 내가 본 것은...... 나는 앨버커키 내셔널 은행에서 계속 일하고, 버니는 박사학위까지 받고도 계속해서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뭔지 모를 도기나 구우면서 언젠가는 종신재직권을 얻고, 딸을 둘 낳고, 그러면 하나는 치과의사가 되고 하나는 코카인 중독자가 되는 미래. 아, 물론 내가 그런 미래를 다 보았다는 건 아니다. 사실 내가 본 미래는 고된 삶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버니는 제자와 눈이 맞아 나를 버리고, 나는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다 복학해서 졸업하고, 그러다 보면 쉰이 다 되어 비로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지 모를, 하지만 그걸 즐기기에는 이미 지쳐 있을 그런 삶. (160-161쪽)

마리아를 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아내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거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렇게 말이 없는 단 하나의 이유는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165쪽)

저 사람들 좀 봐. 저렇게 걸어다니고, 차 안에 앉아 있고, 꽃을 가져오는 저 사람들. 저들도 모두 과거 언젠가 잉태되어 나왔겠지. 모두 하나하나 두 사람이 결합해서 세상에 태어난 거잖아. 태어난다는 것. 우리는 어째서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죽어가는 이야기, 태어나는 이야기 말이야. (169쪽)

놓쳐버린 기회. 한 마디 말, 몸짓 하나로 인생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걸 망칠 수도, 모든 걸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도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몸짓을 보이지 않았다. (172쪽)

그러나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인 마야는 좋은 아내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커피를 가져다줄 때는 커피잔의 뜨거운 몸통을 잡고 손잡이 쪽을 그에게 돌려서 건네주는 것 정도만 할 줄 알았다. (179쪽)

벤자민은 내게 말이 없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이 확고한 상냥한 사람이었다. 리사에게는 자애로운 태도와 강한 인내심을 보였다. 단 그녀가 무언가를 과장해서 말하면 (자주 그러지만) 그건 거짓말에 가깝다고 말할 때 외에는. 그는 절대로 과거시제나 미래시제로 말하지 않았다. (209쪽)

사람들은 이따금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때가 무엇무엇의 시작이었다,라거나 그때, 또는 그 전에, 또는 그 후에 우리는 행복했지,라고 한다. 또는 어마어마한 때가 오면, 또는 일단 나에게 무엇무엇만 있으면, 또는 우리가 어떠어떠하다면 내가 행복할 텐데,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218쪽)

찌는 듯이 더운 오후. 마야는 해먹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냐, 모든 게 잘되지 않을거야. 마야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그 두렵고 황량한 기분은 익숙한 것이었다. (259쪽)

케이시는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우리의 삶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우리 집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대개는, 나와 애인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우리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아이들과 오리 연못을 팠다. 그는 내가 서재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봤다. (269쪽)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 난 내가 인식한 것조차 오 분 이상 붙들고 있지 못하는데 무슨. 픽업트럭을 타고 달릴 때 듣는 라디오 음악처럼. 질주하며 듣는 음악. 웨일런 제닝스, 스티비 원더...... 그러다 가축 출입 방지용 도랑에 처박힌다. 쿵!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텍사스주 클린트에서 온 목사다. 당신의 웃음소리는 쓰레기요. 웃음소리만? 인생은 어떻고? (304쪽)

어렸을 때 나는 잠이 오는 순간을 알아차리려고 시도해보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 기다리다 눈을 뜨면 번번히 아침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가끔 시도해보았다. 간혹 사람들에게 그런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318쪽)

우리 아들들이 보고 싶었다. 브루노와 부모님 생각에 슬펐다. 그들이 그리워 슬프지 않고 정말 그립지 않아 슬펐다. 내가 죽어도 그러리라. 죽음은 산산히 부서지는 수은과 같다. 수은 방울처럼 낱낱이 흐르다 하나로 합쳐 다시 바르르 떠는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기운을 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오래 혼자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실로 아름다움과 사랑이 가득했던 지난날. 눈에 띄지 않는 구경꾼으로 루브르 미술관을 돌아다니듯 나는 지난날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았다. (328쪽)

여행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살아온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직선적 시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행위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건은 소설처럼 우화가 되고 불멸성을 얻는다.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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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 최영미 시집, 개정증보판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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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번만 달라고......
-돼지들에게 중(18쪽)

겸손한 문체로 익명의 다수를 향해 다정한 편지를 띄우지만
당신처람 오만한 인간을 나는 알지 못하지
당신보다 차가운 심장을 나는 보지 못했어

계산된 ‘따뜻‘에 농락당했던 바보가 탄식한다
늦었지만
순진을 벗게 해줘서 고마워
선생님
-돼지의 변신 중(22-23쪽)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37쪽)

산다는 건 내게 치욕이다. 시는 그 치욕의 강을 건너는 다리 같은 것. 내가 왜 어떤 항구에도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방랑자가 되었는지.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직히 풀어놓을 힘이 내게 남아있으면 좋겠다. (53쪽)

돈과 폭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경기장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다.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70쪽)

나 또한 그처럼 어리석었으나, 재능은 발자크에 못미치나 어리석음에서는 그에 못지않았다. 다시 살아야겠다. 써야겠다. 싸워야겠다.
-발자크의 집을 다녀와 중(83쪽)

어릴 적, 문막의 섬강에서 자연의 장엄한 교향악을 들었다. 강가의 너럭바위에 앉아 울려다본 밤하늘은 경이로웠다. 보석처럼 반짝이다 시냇물이 되어 졸졸 흐르던 은하수와 사랑에 빠졌던 밤을 언제까지나 간직한다면, 나는 늙지 않을 텐데.
-횡단보도를 건너며 중(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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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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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지 않은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35쪽)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64쪽)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중략)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81-82쪽)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117쪽)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147쪽)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155쪽)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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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대상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공지영.손홍규.편혜영 외 19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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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처를 보여주면 얼마 후 그곳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점점 더 숨고 싶어 하며 점점 더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모든 접촉에의 차단은 나에 대한 비난들을 누룩처럼 부풀렸고 내 특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헛소문들이 내 귀에까지 자주 들려온다. 좋은 학교, 좋은 집안, 그럴듯한 외모, 젊은 여성, 이혼녀, 베스트셀러 작가. 이 반짝이는 모조구슬 같은 딱지들은 무대의상처럼 화려하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썩은 내를 풍기며 곪아가고 있었다. (21쪽, 공지영)

박태기꽃을 보거나 나비와 마주치거나 갈림길을 만나거나 떡을 못 받거나 설령 받았더라도 나는 예외 없이 구시렁거리고 꿈지럭거렸다. 다시 말해 아무 때나 무슨 일에든, 꾸준히, 안 게으르게, 맹렬하게. 그러는 사이에 소설이 슬며시 끼어들었던 건 아닐까. 혼자하는 긴 원망과 반성, 하릴없는 궁금증, 고의적인 음해, 상상을 넘어선 망상, 일방적인 착각과 환멸, 이 상시적이고도 꾸준한 꾸물거림의 수풀 사이로 소설이 비단뱀처럼 흘러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꾸물거리는 것이 허비가 아닌 생산일 수도 소설의 경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35쪽, 구효서)

간발의 차이로 죽지 못한 게 억울해 가슴을 탕탕 쳤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밖에 모르는 어린애였다. 내 죄와 상처, 새 설움밖에 몰랐고, 내 죽음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의 죽음을 배우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48-49쪽, 권여선)

그렇게 나는 글을 쓴다는 건 고독을 대면하는 일이라는 걸, 평생 글을 쓰겠다는 것은 평생 고독을 대면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축구장에 들어설 때만이 축구선수라 할 수 있는 것처럼 고독할 때만이 작가의 일은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놀랍게도 나는 그 고독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렇게 15매를 쓴 어느 날 밤에 깨닫게 된 사실일 것이다. 그 고독이 너무나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바뀌게 된 것 같다. (111쪽, 김연수)

이렇게 인간에게 딱지를 붙여 분류해 감옥에다가 딱딱 집어넣는 지식이 있다면, 그 감옥에 갇힌 인간을 풀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돌이켜보면 ‘소설 나부랭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가의 길로 들어서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려고 애썼던 나의 삶. 이제는 소설만 가지고도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50쪽, 김지원)

학문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면, 소설이란 진지하게 ‘사는 것‘인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심오하게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싸안는 경험의 그물망, 그것이 소설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것‘인 동시에 ‘배우는 것‘으로서의 소설과 작가를 염두에 두고, 심화되는 가속력의 세계와 퇴행하는 인간의 조건을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다. (176-177쪽, 박상우)

내 태생지의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은 끈질기게 내게 들러 붙어 있다가 현재의 내 삶 속으로 불쑥불쑥 쳐들어와 문장을 일구어내곤 한다. 사실에 의해서보다는 결국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게 마련이라는 그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지독한 것인가,싶어 때때로 몸서리쳐질 때도 있다. (199쪽, 신경숙)

세상에는 이렇게 절박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직 나 개인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괴롭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 편이고 아직은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238쪽, 윤이형)

이 세상에 태어난 자 누군들 외로움과 그리움에 몸부림치지 않으랴만, 그것은 그것과 싸우면 싸울수록 더 커지는, 신화 속의 괴물과 같은 것임을 일찍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그것을 싸워서 이겨내는 길은 없다. 지혜롭게 비켜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 알겠다. (254쪽, 윤후명)

문학에 전혀 새로운 테마가 있을 리 없고 순수니 통속이니 하며 굳이 금기하고 배재해야 할 영역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가 삶을 다루는 새로운 층위가 있고 새로운 문학 형식의 고안이 있을 뿐이다. 나의 소설은 늘 삶 자체에서 생산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또한 많ㅇ니 다른 지점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여성적 생명과 존재라는 생의 원형질적인 관심에서 올라서서 삶의 표면과 일상을 무대로 새로운 형식의 고안을 모색할갈 것이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고통은 그 현재성 속에서 늘 충분하다. (265쪽, 전경린)

몸을 갖지 못한 언어가 지은 집은 어쩌면 가장 무력한 것이 아닌가 절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 동시대를 같이 숨 쉬는 것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할 것들은 역설적으로 오직 언어 안에서만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81쪽, 정미경)

삶의 객관적 조건을 아는 것과 삶의 내면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서류와 정보를 통해 누군가의 형편과 조건을 알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섣불리 삶을 짐작하려는 일은 각각의 삶을 단순화시킬 뿐이다. 숫자나 통계가 단순화시킨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개인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지켜봐온 부모의 이야기, 세 자매의 이야기, 오빠의 이야기 같은 것들. 통계와 수치로는 짐작되지 않는 어떤 얘기들을. (315쪽,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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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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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에 도착했다. 난 문제없이 해냈다. 지금껏 멀리서만 봤던 오두막이 몇 걸음 앞에 보인다. 저 멀리 남편과 내 아이들의 모습이 까마득하다.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호수를 건너자 내가 알던 호숫가는 건너편이 되었다. 이쪽이 저쪽이 된 것이다. (중략)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들려면 기슭을 떠나야 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13쪽)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18쪽)

많은 열정적인 관계가 그렇듯 이탈이어에 대한 내 열광은 애착,집착이 될 터였다. 이성을 잃은, 응답받지 못하는 뭔가가 늘 존재하겠지. 난 이탈리어와 사랑에 빠졌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내게 무관심하다. 이탈리어는 날 절대 갈망하지 않은 거였다. (22쪽)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추방에 익숙해져 있다. 모국어인 벵골어는 미국에서 보자면 외국어다.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로 생각되는 나라에서 살아갈 땐 계속 기묘하고도 낯선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25쪽)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외부에 언제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더는 사전이나 메모장, 펜이 필요 없는 날을 꿈꾸고 살아야 할까? 내가 영어로 책을 읽듯이 도구 없이 이탈리아어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꿈꾸어야 할까? 이런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게 옳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많아도 나는 아주 활동적이고 열심인 이탈리아어 독자면 족하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42쪽)

하지만 메모장에 단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나는 모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싶다. 필요할 때 단어를 퍼 올리고 싶다. 단어에 닿고 싶다. 단어들이 내 일부가 되게 하고 싶다. (47쪽)

자신에 대한 믿음과 권위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작가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73쪽)

나는 왜 글을 쓸까?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나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중략) 나는 글쓰기를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더 심오하고 자극적인 형식으로 언어를 익히고자 하는 내 방법일 뿐이다. (75쪽)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도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76쪽)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는 지금도 극복할 수 없다. 겨우 두 걸음 나아가는 데 내 인생 절반이 소요됐다시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건너고 싶었고 깊은 성찰의 물꼬를 튼 작은 호수의 은유는 틀렸다. 사실 언어는 작은 호수가 아니라 넓은 바다다. 두렵고 신비한 요소,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연의 힘이다. (79쪽)

그들이 왜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벽이 있다. 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날 무시할 수 있다. 날 벼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날 바라보긴 하지만 진정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 말을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는 사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노력을 귀찮아 한다. 때때로 내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말을 할 때 건드려선 안 되는 물건을 건드린 아이처럼 비난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중략) 언어는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 나라 말을 모르면 자신이 인정받는 당당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113-114쪽)

변신의 메커니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삶의 유일한 요소일지 모른다. 모든 개인, 나라, 역사의 시대, 우주만물의 과정은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격렬한 변화의 과정일 따름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린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변화하는 전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척추를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머지는 대개 망각된다. 예술은 우리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길 뜻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 걸까?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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