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평론은 소설이 포착한 삶의 구체적인 지침을 확대하고, 각자가 매몰되어 있던 삶을 상대화하여, 삶의 모순을 반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8쪽)
시간의 영역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지켜야 할 무엇이 있다면, 반복하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공공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공론 영역의 행위는 말을 통해 실행되며 나아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명한 지옥을 멈추기 위해서는 공적 삶의 영역에서 사태에 적절한 말하기, 적절한 말을 발견하기가 요구된다. 그 말의 힘이 정치다. (48-49쪽)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일 수 없으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음모론을 제기할밖에. 이처럼 품격 있는 음모론에서 진실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진실에 합당한가이다. (59쪽)
왜 집회는 이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집회는 누구의 문제인가. 사회 분배 시스템의 바닥에 있을수록 정치에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사회구조적으로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든 개인이 그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는 점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어느새 시민권과 이동권, 그외 무수한 권력 장치에 의해 걸러지고 걸러진 경계 내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리고, ‘직접‘까지 닿는 길은 개인 각자의 몫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광장의 구호는 ‘직접‘ 닿지 못한 이들에까지 분배되지 않는다. 무수한 집회에도 불구하고 알바생의 목숨값이 여전히 삼십만원인 것처럼 말이다. (109쪽)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일을 사건event이라고 한다. 사건은 시스템을 새로 구축한다. 다만 사건은 우리 눈을 가리는 것들을 걷어내고 시스템을 직시하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다. (127쪽)
펜데믹, 기후 위기 등 압도적인 규모의 재앙을 직면했을 때, 작가가 눈을 돌린 곳은 늘 있어왔던 것‘, 그러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162쪽)
실천이 결여된 읽고 쓰기, 부채감 해소를 위한 읽고 쓰기는 비판해야 마땅하나 당사자가 아님을 문제삼아 글쓰기의 자격을 묻는 것은 윤리를 가장한 입막음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글쓰기의 자격을 심문하거나 그 실효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면 각기 다른 조건 속에서 공통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고 만다.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4-205쪽)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하나의 답안으로 막음될 수 없고, 글을 쓰는 내내 안고 가야 할 물음일 것이다. (중략) 우리의 읽고 쓰는 과정 중에서 이 질문은 반복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질문과 답을 반복하는 한에서 글쓰기는 실천적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또 읽고 쓰는 공동체로서 함께 상상할 수 있고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다. (206쪽)
우리의 ‘공정론‘은 노동계급의 지구적 이동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각자의 삶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 비국민이 처한 취약한 조건이 왜 발생했으며, 그것이 어떠한 행위를 유발하는지 묻지 않는다. (중략) 본질적인 질문이 소거되고, 역사적 이해가 결여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정론‘은 초라하고 누추하다. 그 누더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응분의 보상/처벌‘이 곧바로 공정이나 평등으로 이해되는 것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야기할 뿐 아니라, 차별의 구조를 은폐하고 개인의 공동체의식과 정의 감각을 훼손한다. 이러한 공정 감각은 약자. 소수자가 처한 역사적.구조적 취약성을 되외시한 채 능력과 성취를 잣대로 집단을 차별하면서 그것을 ‘정당한‘대우라 여기고, 구적적 불합리함을 교정하려는 조치들을 ‘역차별‘이나 ‘불공정‘으로, 혹은 ‘정체성 팔이‘로 매도한다. (228-229쪽)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임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 반대편, 그러니까 자유가 없고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혹은 자유가 없고 존중은 자격을 갖춘 일부 인간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중략) 이처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에 양면이 있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느 쪽일까? 지구인을 ‘자유가 없고 존중받지 못하는 비-인간‘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분할하고 있지는 않을까? (중략) 우리의 세계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모두가 자유롭고 존중받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타자를 배제한 대가로 자유와 존중을 특권처럼 향유하고 있는 곳일까?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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