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속으로 - 더 자세한 쓰기, 사라짐의 쓰기에 대하여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에트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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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독자를 설득해 내가 믿는 무언가를 믿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비록 내가 믿는 것은 아주 아주 많지만 말이다. (23쪽)

나는 이따금씩 내가 본 것을 적었다. 3년이 지나자 그렇게 관찰해 적은 메모가 82개쯤 생겼다. 나는 그것들을 사진과 함께 작은 책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에 포함된 감정에 다양한 형태를 띤 내 즐거움, 내가 암소들과 송아지들의 자세와 행동을 지켜보며 때때로 느꼈던 재미나 공감뿐 아니라 그것들을 관찰한 바를 적고 수고스러운 즐거움, 그리고 세상의 암소 대부분이 바는 취급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도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39쪽)

내가 느낀 흥미를 유지시켜준 건 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내게 중요한 두 가지 요소였다. 그 하나는 책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개성이다. (중략) 다른 한 가지 특징은 글 자체의 문체다. (52쪽)

수레바퀴 제작에 필요한 몇몇 기술과 그 기술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 이후로, 그는 이 특정한 책을 쓰기에 적합한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 어쩌면 거의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지식을 무덤까지 가져가는 대신 알리고 싶어 했다. 누군가 흥미로워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일단 기록하면 그것은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게 될 터였다. 누군가 읽든 읽지 않든 말이다. 그러니 그가 그 책을 쓴 것은 그 지식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거의 확실하게는 쓰는 동안 그것에 감탄하고 이야기하ㅕㅁㄴ서 음미하고 기억하고 다시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61-62쪽)

우리가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짧고 긴 이야기의 흐름들을 품고 계속된다. 바로 지금도 내 삶에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내가 계속 글을 쓰는 동안 각각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점에 도달한 다음 지나갈 것이다. (중략) 대개는 그렇다. 그리고 내 기쁨의 순간들 역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내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68쪽)

나는 내가 듣게 되는 언어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언어는 한 편의 이야기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또한 나는 내가 읽는 언어에도 마음이 움직이는데 또 다른 작가가 영리하거나 미묘하게 언어를 다룰 때 그렇다. (93-94쪽)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있고, 그래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와중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글쓰기와 글쓰기의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의 더 많은 뉘앙스를 내가 읽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있을 것이다. (100쪽)

어쩌면 내가 그것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이 하루의 이 순간을 재현해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는 감각으로 인식한 그 현실을 취해 내 뇌를 통해 걸러낸 다음 종이에 옮겨놓고 그것이 거기 붙어있게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내가 이 장면을 혹은 이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내 눈앞의 현재를 나눠 갖기 위해, 눈앞의 현재 속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쓴다는 것일지 모른다. (중략) 무언가에 대해 쓰고 싶어 하는 것과 실재로 그것을 쓰는 것은 다르고 때로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또 다르며,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보여줄지 역시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119-120쪽)

글쓰기를 가르치던 시절, 나는 학생들에게 예를 들어 이야기를 훌륭하게 끝내는 법을 배우려면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의 훌륭한 결말을 많이 읽고 그 결말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스스로 파악해보라고 말하곤 했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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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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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가장 진심을 담으면 쓰는 사람은 쓰면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소중하고 중요한 어떤 것을 자유롭게 쓰고 있다면 글쓰기 작업에 반드시 수반되는 물리적 가혹함을 전혀 낼 수 없다. 간절히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가장 정직하게 써 나갈 때 나는 보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어간다. (17-18쪽)

진짜로 간절하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게 재능이 있을까?‘라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재능이 밖으로 흘러넘쳤을 테고, 대부분 고만고만한 우리에게 재능은 있고 없고의 문제라기보다, 여러 가지 행동과 실천의 ‘결과‘로서 어쩌면 중간부터 드러나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너무 쓰고 싶으니까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목표 지점의 성취나 인정을 바라기보다 글쓰기 작업 자체를 일단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60-61쪽)

수정을 좀 더 편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수정이 어려운 것은 내가 쓴 것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정은 나의 부족함을 정면으로 보는 일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과 그에 따른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138쪽)

내게도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나니 심한 편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만약 그 작품이 어떤 절대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작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176쪽)

현실에서는 책만 쓰며 먹고살수 없다. 대체 언제까지 청탁 원고나 강연, 글쓰기 수업 같은 숱한 ‘다른 일들‘을 해치우면서 동시에 시간을 쪼개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장담도 못한다. 책만 써서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쳐도 그 감사한 상황이 지속될지는 미지수이다. 전망은 대개 비관적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쳐내야 하는 현실을 겪다 보면 문학을 사랑하기엔 때로는 너무나 지쳐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4쪽)

하나의 특성을 두고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한다. 이거싱 바로 이토록 다채로운 개성의 작가들이 공존하며 저마다의 독자들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중략) 그러나 그책을 사지 않았다고 해서 독자가 그대로 바로 빠져나간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사라져 있다가 다음 책의 소재가 마음에 들면 다시 독자로 돌아온다.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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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인가요?
존 버거 지음, 마리아 나도티 엮음, 셀축 데미렐 그림,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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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책을 쓰고 싶어진다
오롯이 시간에 관한 책을
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지,
왜 과거와 미래가
끊임없는 하나의 현재인지에 관한 책을.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았던 사람은
그리고 앞으로 살 사람은, 지금을 살고 있다. (8쪽)

우리는 정치적 실행이란 것이 종종 베틀처럼 예상한 것과 예상치 못한 것 사이를 오가며 두 방향으로 베를 짠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20쪽)

자본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도록 강제되듯이, 끝없는 기대의 문화인 자본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얻을 것‘이 ‘지금의 것‘을 비운다. (38쪽)

순간의 경험이 깊을수록 더 많은 경험이 축적된다. 순간이 그처럼 오래 살아남는 이유가 그래서다. 흐르는 시간의 소멸이 저지된다. 살아낸 시간의 총량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나 밀도의 문제다. (60쪽)

기억의 수명에 비하면 어떤 생도 기이할 만큼 짧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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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한 세계 크로스 1
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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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중략) 그때 큰 집이 조금만 도와줬더라도 자신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말이었지요. (중략) 아버지는 서울에 남았다면 자신이 기자가 됐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서울 아저씨는 아버지가 가보지 못한 미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35쪽)

제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쉰 살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열네 살의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우리는 이 세계를, 시간을, 삶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시간과 공간 속에서 깨어 있는 채로 경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눈을 감고 잠든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60쪽)

나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보이지 않던 것을 보려는 건가. 이미 보이던 것에 집착하려는 건가. 하지만 기억 속 필름에 확실히 정착된 건 없었고, 필름도 없는 채 알아채지 못했던 무언가를 의식에 현상하려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110쪽)

왜 그때 그 상자를 열었을까.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온다. 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세계가 어딘가에 있다면 지금 이 세계의 나를 잃더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피해자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전시회 성공을 기뻐하는 나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나도,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미래 세대와도 공유해야 한다. (167-168쪽)

제(김연수) 소설에도 어떤 시점이 있다면 저는 ‘미래적 시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과거의 일을 서술할 때 그 뒤의 미래까지도 다 알고 있다면 이미 기록된 과거는 수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래는 끊임없이 갱신되니 과거 역시 끊임없이 수정될 것입니다. 무한한 글쓰기가 가능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략) 무한한 버전의 과거는 무한한 버전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미래만 가진 사람에게는 결단의 행위가 없을 것입니다. (중략) 무한한 버전의 미래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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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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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11쪽)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38쪽)

저녁의 소묘 2


목과 어깨 사이에
얼음이 있다.

그게 부서지는 걸 지켜보고 있다.

이제는
더 어둡다

손끝으로 더듬어 문을 찾는 사람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알지 못한다

그가
나가려는 것인지
(어디로) 들어가려는 것인지 (64쪽)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80쪽)

겨울 저편의 겨울 2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중략)

숙제를 풀지 못하기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때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중략)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97-99쪽)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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