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말들 -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공감하기 위하여 문장 시리즈
김겨울 지음 / 유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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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는 느린 행위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멈춰 서도록 요구한다.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대신 천천히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중략) 그러므로 책 읽기는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중략)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28-29쪽)

책에서 책으로, 또 책에서 책으로 통과하는 날에는 내가 책이 되어 사는 것만 같다. (31쪽)

마음에 와닿는 책을 읽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가 된다. 그게 슬픈 책이든 웃긴 책이든 담담한 책이든 신나는 책이든, 나와 주파수가 맞기만 하면 그리고 작가가 충분히 고민했다면 어떤 책이든 위로가 된다. (중략) 그렇게 한 사람에게 위로가 된 책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83쪽)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에 소비되고 있을 커피나 휴지나 비닐의 양을 상상해 본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온당한 일인지 의심한다. 내가 살아 있는 것, 살아서 뭘 자꾸 쓰고 버리는 것 자체가 해악인 건 아닐까. (131쪽)

사실 모든 책은 다 ‘서바이벌 가이드‘ 내지는 ‘서바이벌 매뉴얼‘인 게 아닐까?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관심을 두어야 할 사회문제,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 같은 것들을 알려 주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생존 가이드 말이다. (135쪽)

책 읽는 일을 경청이라고 설명한다. 그건 우리가 평소에 하기가 정말 힘든 일이다. (중략) 반대로 글을 쓰는 일 역시 나에게 집중하고, 질문하고, 답하고, 다시 질문하는 일이다. 책은 저자의 경청과 독자의 경청으로 완성된다. (178-179쪽)

끔찍하지, 삶이란 게. 삶은 너무 끔찍하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해야만 하는 일을 말할 수 없게 만들고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만 말할 수 있게 허락한다. 말해야만 하는 일을 말하고 나서 제 삶을 침범당하는 기막힌 사태에 슬퍼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세상과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 에세이가 투쟁이 되는 사람들. 자서전이 비명이 되는 사람들. (185쪽)

소설은 결론이 아닌 과정이며 보상이 아닌 성찰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몸 밖으로 나아감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색칠하며 경험하는 인간이 된다. (중략) 삶이 인간을 받쳐 주기를 멈추어 그가 바닥없는 심연으로 떨어져 갈 때 문학은 그가 아예 지구 속을 통과해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냉소가 아닌 간절한 제의에 가깝다. (중략) 상상력은 지금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선택지를 그려 보기 위한 조건이다. 허구가 또 하나의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능력은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선택지를 내 삶 안에서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다. 무수한 개인의 진실은 문학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은 사실도 허구도 아닌 진실의 영역이다. 소설의 결말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후에 그래서 이게 나에게 무슨 이득을 주느냐고 묻는 것은 죽음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 뒤 그래서 삶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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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클럽 - 이지은 평론집 문학동네 평론선
이지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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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평론은 소설이 포착한 삶의 구체적인 지침을 확대하고, 각자가 매몰되어 있던 삶을 상대화하여, 삶의 모순을 반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8쪽)

시간의 영역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지켜야 할 무엇이 있다면, 반복하지 말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공공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공론 영역의 행위는 말을 통해 실행되며 나아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명한 지옥을 멈추기 위해서는 공적 삶의 영역에서 사태에 적절한 말하기, 적절한 말을 발견하기가 요구된다. 그 말의 힘이 정치다. (48-49쪽)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므로,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실일 수 없으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음모론을 제기할밖에. 이처럼 품격 있는 음모론에서 진실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진실에 합당한가이다. (59쪽)

왜 집회는 이들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집회는 누구의 문제인가. 사회 분배 시스템의 바닥에 있을수록 정치에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사회구조적으로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든 개인이 그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는 점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어느새 시민권과 이동권, 그외 무수한 권력 장치에 의해 걸러지고 걸러진 경계 내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리고, ‘직접‘까지 닿는 길은 개인 각자의 몫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광장의 구호는 ‘직접‘ 닿지 못한 이들에까지 분배되지 않는다. 무수한 집회에도 불구하고 알바생의 목숨값이 여전히 삼십만원인 것처럼 말이다. (109쪽)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기존 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일을 사건event이라고 한다. 사건은 시스템을 새로 구축한다. 다만 사건은 우리 눈을 가리는 것들을 걷어내고 시스템을 직시하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다. (127쪽)

펜데믹, 기후 위기 등 압도적인 규모의 재앙을 직면했을 때, 작가가 눈을 돌린 곳은 늘 있어왔던 것‘, 그러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162쪽)

실천이 결여된 읽고 쓰기, 부채감 해소를 위한 읽고 쓰기는 비판해야 마땅하나 당사자가 아님을 문제삼아 글쓰기의 자격을 묻는 것은 윤리를 가장한 입막음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글쓰기의 자격을 심문하거나 그 실효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면 각기 다른 조건 속에서 공통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고 만다.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응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4-205쪽)

‘글쓰기의 몫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하나의 답안으로 막음될 수 없고, 글을 쓰는 내내 안고 가야 할 물음일 것이다. (중략) 우리의 읽고 쓰는 과정 중에서 이 질문은 반복적으로 돌아올 것이다. 질문과 답을 반복하는 한에서 글쓰기는 실천적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또 읽고 쓰는 공동체로서 함께 상상할 수 있고 더 오래 이야기할 수 있다. (206쪽)

우리의 ‘공정론‘은 노동계급의 지구적 이동이 발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각자의 삶과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 비국민이 처한 취약한 조건이 왜 발생했으며, 그것이 어떠한 행위를 유발하는지 묻지 않는다. (중략) 본질적인 질문이 소거되고, 역사적 이해가 결여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공정론‘은 초라하고 누추하다. 그 누더기는 우리의 눈을 가려 불평등한 권력구조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응분의 보상/처벌‘이 곧바로 공정이나 평등으로 이해되는 것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야기할 뿐 아니라, 차별의 구조를 은폐하고 개인의 공동체의식과 정의 감각을 훼손한다. 이러한 공정 감각은 약자. 소수자가 처한 역사적.구조적 취약성을 되외시한 채 능력과 성취를 잣대로 집단을 차별하면서 그것을 ‘정당한‘대우라 여기고, 구적적 불합리함을 교정하려는 조치들을 ‘역차별‘이나 ‘불공정‘으로, 혹은 ‘정체성 팔이‘로 매도한다. (228-229쪽)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임을 일깨우는 동시에, 그 반대편, 그러니까 자유가 없고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혹은 자유가 없고 존중은 자격을 갖춘 일부 인간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중략) 이처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말에 양면이 있다면, 우리의 세계는 어느 쪽일까? 지구인을 ‘자유가 없고 존중받지 못하는 비-인간‘과 ‘자유롭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으로 분할하고 있지는 않을까? (중략) 우리의 세계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모두가 자유롭고 존중받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타자를 배제한 대가로 자유와 존중을 특권처럼 향유하고 있는 곳일까?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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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만나다 -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 교수 존 폴킹혼의 성서 읽기 비아 만나다 시리즈
존 폴킹혼 지음, 손승우 옮김 / 비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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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 오늘날 독자들이 성서와 진지하게, 그리고 지적 책임감을 지니고 만날 수 있게끔 돕는 것입니다. (12쪽)

성서는 단지 남겨진 골동품에 불과하며 오늘날 이를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큰 실수입니다.성서는 교회가 예배를 통해 경험한 것과 그 속에서 형성되고 축적된 통찰들로 이루어진 전통과 더불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의 힘과 함께 그리스도교 사상과 그리스도교적 삶을 위한 배경을 형성합니다. (28쪽)

성서 안에서도 사상적인 발전이 나타난다고 보게 되면 성서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명백한 모순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성서 안에 있는 구절들은 하나의 통일된 글로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출처를 갖고 있으며 각기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자료들이 취합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각 구절은 각기 다른 발전의 단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37-38쪽)

성서는 시대의 흐름에도 변치 않는 의미만을 모아 놓은, 쓸 수 없는 돈이 쌓인 계좌가 아니며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않고 액면 그대로 그 답을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들의 모음집 또한 아닙니다. 성서는 새로운 진리와 통찰이 끊임없이 흐르는 살아있는 샘입니다. (64-65쪽)

히브리 성서는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생각에 스며들어 있던 경전이었습니다.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에서 나왔기에 오늘날 우리게게 낯설게 다가오지만, 그 안에 가득한 풍성함은 변치 않습니다. 저는 구약성서가 그리스도교 교회의 사상과 예배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확신합니다. (100쪽)

신약성서 전체는 예수에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이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저 안 사람의 방랑하는 랍비였거나 실패한 예언자였다면 아야기는 틀림없이 그가 죽었다는 사실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임했다면 그를 다룬 이야기가 특별한 요소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부활은 타당합니다. 부활은 이 세 가지를 변호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생략) (145쪽)

앞서 예로 든 구절들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 평행본문이 있는 구절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초대교회가 히브리 성서를 존중하면서도 히브리 성서의 예언에 나타난 기대와 희망을 예수가 성취했다고 굳게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가 성서의 본래 용법과 뜻을 맹종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전의 기록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며 배운 바를 일치시키기 위하여, 이전에 기록된 내용을 기꺼이 변개하였습니다. 편협한 근본주의와 문자주의를 가지고 성서에 다가가도 좋다는 근거는 신약성서에 없습니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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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질 수 있는 생각 - 소프트커버 보급판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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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언어로 열리는 세계는 말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였다. 오로지 이미지의 논리로 진행되는 서사라니...... 그게 매혹되었다. (중략) 시각적인 언어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을 제외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다 쓰게 되고, 그러므로 책의 물성과 매체성에 탐닉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말 없는 그림책이 내게 말없이 말 걸어오는 내밀한 세계, 이것은 완전히 다른 언어이며, 이것이 바로 나의 언어구나.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할 목소리를 갖게 되던 순간, 진심으로 기뻤던 것 같다. (74쪽)

삶은 지속해서 선택에 직면하게 만든다. 단풍 물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고,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모두 가 볼 수는 없다. (118쪽)

글 없는 그림책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읽는 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혼자 눈으로 읽는 책으로, 나누는 행위가 개입되지 않고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하는 책이기도 하다. 글이 있으면 작가의 이야기가 되지만, 글이 없으면 독자의 이야기가 된다. 글이 있으면 글을 따라가게 되지만, 글이 없으면 독자가 자기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132쪽)

놓았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많고, 이기적인 나로 나아가기 어렵다. 이기적인 나에게 가랑비 젖듯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나의 무용함과 예술의 무용함을 깊숙이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게 잘 안 되면, 저겅도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자. 당신의 무용함은 당신에게 유용하며, 세상에도 유용하다. (157쪽)

불안정성, 불안정성! instability, Instability!
엄청나게 떨리지?
너의 약한 부분을 느껴 봐.
새로운 곳이라서 그래.
새로운 곳에선 언제나 불안정함을 느끼지.
불안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곳은 새로운 곳이 아니야! (248쪽)

책상 위의 푸로젝트는 일이기도, 삶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작업이기도, 구체적인 사람이기도, 그저 마음의 동력이자 꿈이기도 하다. 그림책은 핑계고, 나는 굴러간다. 모두 다 내가 올려놓은 것이지만, 내가 책상 위에 뭘 올려놓았는지 짐짓 궁금해하며 작업실에 가는 길이 즐겁다면, 뭐, 이번 생은 이런 식으로 살아 보는 것으로. (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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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오래 보기 - 진정한 관점을 찾기 위한 기나긴 응시
비비언 고닉 지음, 이주혜 옮김 / 에트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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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었든지 결국 모든 것은 관점이라는 지배적인 문제로 돌아갔다. (중략) 그저 관점을 하나 ‘가지기만‘ 해도 정말로 할 말이 있을 때와 단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종이 위에 검은 점을 옮기고 있을 때를 진지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9쪽)

이 판에서 그 남자들과 동등하게 여겨진 유일한 여성들이 메리 매카시와 한나 아렌트였고, 나머지는 사교 모임에는 받아들여졌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아내들이나 여자친구들이었다. (62쪽)

그러나 이와 같은 문장을 - 우리의 실제 삶과 너무도 동떨어진 - 표현력 있는 언어를 향한 사랑으로 반세기 전과 똑같이 찬사를 받는 예술가의 작품에서 읽는다는 것은 슬프고도 혼란스러운 일이다. (118쪽)

실천과 이론 사이 가장 중요한 차이를 만드는 정확한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 - 내면의 혼돈 - 이다. 그 차이 안에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삶이 존재하는데, 중재를 위한 이성이 영원히 감정적 갈등에 사로잡혀 있는 바람에 우리가 자신을 대하듯 진실로 타인을 대하기 위해 필요한 존중을 서로에게 허용하는 능력이 꾸준히 훼손되고 있다. (139쪽)

다시 말해 세계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결과라는 통찰이다. 자유롭게 숨 쉴 필요는 주어진 것이지만 자유롭게 숨 쉴 권리는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권력을 향한 의지는 거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의 권리에 지속적으로 도전해야 하는 체화된 힘이다. 어떤 조건에서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그 도전을 자유롭게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그 도전은 해당 조건 속에서 저항해야 한다. (179쪽)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행동력이 필요하다. 행동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정말로 행동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180쪽)

[남자로서 나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여성협오는 느리고 새까만 독처럼 페이지 곳곳으로 새어 나와 예술적 일관성을 흐리고, 도덕적 지능을 붕괴시키며, 삶을 더 사랑하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아무 소용 없을 정도로 작품의 진정한 주제를 너무도 사적이고 추악하게 만들어버린다. (282쪽)

내가 보기에 여성의 종속은 여성의 결혼이 중추적인 경험이라는 -남성과 여성 모두 공유하는- 확신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략) 결혼해 ‘보살핌을 받을‘ 것을 ‘깊이‘ 아는 여성은 -그래서 결혼이 인생의 중심 사건임을 아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경험 자아를 남편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그 경험 자아는 남편이 자신의 싸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분의 무기가 된다. (중략) 오늘날 페미니즘의 과업은 여성의 경험 자아를 다시 창조하는 일이다. 오래된 반응, 오래된 습관, 오래된 감정적 확신을 새로운 관점, 즉 새로운 의식의 관점으로 다시 검토하는 광범위한 내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290-291쪽)

궁극적으로 우리 예술은 우리의 두려움에 엮인 욕망의 진영을 반영한다. 사회운동은 두려움이 우세를 물리치려는 본능적 욕구에서 곧바로 나올 때 의미가 있다. 그 욕구가 감정적인 -그리하여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변화를 서서히 확립하고 서서히 강제하는 한 가지 생각이 된다. (중략) 이제 가장 어두운 불안보다 명백한 욕구에 따라 행동하게 될수록 여성적 감수성도 성장할 것이고, 그렇게 발달하는 감수성으로 쓰여질 소설들은 동시에 페미니스트 프로젝트, 즉 경험하는 자아의 해방을 향한 길잡이이자 반영이 될 것이다. (316-317쪽)

고닉이 존중하는 ‘증언‘ 혹은 경험의 진술은 상상력이 풍부한 언어를 동반해야 하는데, 이 언어를 음미하며 대화를 나누고(‘독서모임‘ 같은 실제 대화와 작품 속 페르소나와의 대화를 모두 말한다) 읽기 전과는 다른 지평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행위가 고닉에겐 바로 궁극의 일기다. 그러나 고닉이 생각하는 상상력이 풍부한 언어는 소위 ‘미문‘이 아니다. 온갖 수사를 동원한 언어보다 경험의 의미를 가장 명료하게 전달하는 언어다 고닉에겐 가장 아름다운 언어일 것이다. (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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