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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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젊은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9쪽)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지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14쪽)

장은 심사숙고했다. 신중하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습관대로 여러 가능성을 요모조모 따져 보았다. 그리고도 한번 더 망설였다. 마침내 검버섯투성이의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G2의 폰을 집어 G3에 놓았다. (31쪽)

물론 그는 다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승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협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35쪽)

지금까지 우리는 지구의 외형과 관련해 아주 다양한 물질들이 끊임없이 조개 성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조개화가 지구의 외형뿐 아니라 현세의 모든 삶, 지구상, 아니 전 우주의 모든 사물과 존재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55쪽)

우주의 조개화보다 한층 더 끔찍한 사실은 바로 우리의 육신이 끊임없이 조개 성분으로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붕괴는 아주 격렬한 것이어서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56쪽)

인간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고들 말한다. 이제 인간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63쪽)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읽으면서 자리에 앉고,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도 잊어버린다. 오로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새로운 귀중한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70쪽)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로 어떤 책이 내 인생을 변화시켰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감히 답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책이 전혀 없었다고? 모든 책이 다 그렇다고? 어떤 한 권의 책이라고? 나는 모른다.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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