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 템페스트는 래퍼, 작사가, 시인으로서 [연결된] 산문을 공연에 빗대어  '셋업'에서 시작하여, '사운드체크', '문', '찬조공연', '준비', '무대로', '연결의 순간'으로 공연 과정과 접목하여 독자와 연결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의 인정과 수용에 갇혀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이러한 어긋남에 균열을 내어 온전히 나 자신에게로, 나의 삶으로, 더 나아가 세계와 타인을 공감할 수 있는 연결에 대하여, 연결은 저절로 그저 되는 게 아니라 부단한 애씀이 필요하고, 이러한 애씀은 말이나 관념이 아닌 창착이라는 행위로 가능하다고, 창작은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선을 옮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창작이라는 것. 자신과 잘 연결되면 타인과도 연결된다고 말한다.


창작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자기인식에 다가서는 순간이다. 창작에 머무름은 연결의 지향을 품는 것이다. 예로 옷을 입고 창틀에 색을 입히고 아이를 키우고 연인에게 마음을 다하는 일, 이러한 일에 창작이 소환된다. 


행위의 인식은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에 근거할 때 진실이 된다. 예로 지금 어떤 집단의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 연기한다면, 그래서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기보다는 설령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이 들려온다 하더라도 그냥 흘러넘기는 편이 개인적인 사회생활의 기준에 부합한다 여겨 그렇게 행동한다면, 자기동일성의 어떤 삐걱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그러한 사회적 순응은 타인에게 동조하려는 욕구, 타인과의 갈등을 회피하려는 욕구에 나의 신념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제정신으로 버티려면, 기능을 수행하려면, 성공하려면 나/타인/세계로부터 멀어짐 또는 무감함이 필요하다. 이는 진실된 감정의 결여이다. 생각하지 않기로 선택하면서 익숙함에 갇히게 된다. 


8쪽 우리는 모두 시대가 만든 세계의 체계 속에서 스스로의 드라마투르그이자 배우로 살아가며 사회적 기호들을 연기한다. 이는 불가피하고 또한 의미 있는 삶의 일부다. 다만 그 기호의 사회에 붙들려 '전적으로 시대의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얕아지거나 아예 벗어나는 일, 그리하여 '연기하기를 멈추었을 때 누가 남게 되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는 일은 피하고자 말한다.


137쪽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든, 그들이 진짜 관심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자기가 한 말로 괴로워하기에도 바쁘다. 온라인에서 내 말을 두고 시비를 건 이가 지금 화를 내고 있는 상대는 그 자신이다. 더욱이 나는 누군가의 평가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이곳 지금이다. 소리 높여 나누는 인사, 멈춰서는 차 소리, 경적, 아이와 여우와 라디오와 강아지의 외침, 세상의 모든 소리는 살아감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배경음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다가선다. 앞으로 가운데로. 수많은 건물의 수많은 창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살아감이 있다. 나는 미루어둔다. 내려놓는다. 타인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갑자기 찾아 든 비에, 물결의 무늬에 시선을 둔다.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 잔디밭에 몸을 누인 두 사람, 건널목에서 머리칼을 당기며 노는 셋, 손에 든 짐의 무게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엄마의 굳센 두 다리를 쫓아가는 아이. 그들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그곳에 중요한 것이 있다.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번역을 참 잘하셨다. 


올해도 잘 살았다! 

새해는 독서에 집중하자!

[리스본행 야간열차], [당신의 포르투갈은 어떤가요] 챙겨 떠난다.


Merry Christmas n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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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된,
케이 템페스트 지음, 연진 옮김 / 교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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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성에 머무룸은 연결의 지향을 품는 것이다. 부대끼더라도 자기인식에 닿아있는 이는, ‘나의 살아남기와 내 아이의 살아남기‘에 갇혀 모든 관계를 대상화하고 소외된 채로의 부산함 속에서 다만 또 하루를 살아내기보가는, 나의 행위가 세계에 미칠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껴안는다. (22-23쪽)

무감함은 시대의 공격성에 상응하는 논리적인 반응이다. 제정신으로 버티려면, 기능을 수행하려면, 성공하려면 무감함이 필요하다. (중략) 존재를 버티어내며 보낸 무감한 하루의 끝에서 다시 무감하게 일상을 살아낼 때, 멀어져 있음의 무감함은 확연하다. (34-35쭉)

모든 사람은 살아감에서 겪는 폭력으로부터 저마다의 방식으로 흔들리고, 감당이 되든 안 되든, 저마다이 방식으로 그 짐을 진다. 고통에는 트라우마를 겪어낼 시간과 그리하여 평온에 이를 시간이 응당 뒤따르는 것이라면 참으로 이상적이겠지만, 한 순간도 가벼워질 수 없는 버거움이라는 것도 있지 않던가. 감당함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을 감당하는지도 다르다. 그러니 네가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이러했어야 한다고, 네가 이르러 마땅한 결론은 이것이었다고, 내가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이제 나는 정신머리를 바꿔놓고 싶지 않으며, 다만 연결되기를 바란다. (53쪽)

이미 세상에 있으므로, 다음 번에 또,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를 비방하였을 때, 그 사람의 인간됨을 거칠게 단정짓기보다는 그를 다만 불환전하고 다면적인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슬픔과 상실과 바람과 낙담이 교차하는, 그 모든 어긋나버린 순간들을 휘청이며 걸어온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리고 또 다음번에, 나에게 이런저런 상처를 주었다는 이유로 내게 있어 그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거칠게 평가내리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에는 어떨까. 그때도 모르는 사람에게처럼 할 수 있을까. 그를 나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79쪽)

자기인식에는 어떻게 이를까. 타인이 보는 나라는 불편한 층위, 혹은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기 때문에 나도 내가 그렇다고 여기는 선, 그 아래를 어떻게 찾아 들어갈까. 나는 무엇을 보여주려 하고 또 무엇을 감추려 하는가. 가기지식과 자기강박은 어떻게 다른가. 자아는 극복해야 하나 북돋워야 하나. 한편으로, 나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음은 타인과의 함양적인 연결을 가능케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의 마음의 욕구를 소홀히 대함은 타인의 욕구에 대해서도 소홀함을 낳는다. 나로부터의 욕구를 알고 스스로 경계를 정해 그 선을 넘지 않는 것. 그로써 나를 지켜내기가 쉽지는 않다. (88쪽)

타인에게 수용되는지로 내가 규정된다면 나는 타인의 배제에도 내맡겨진다. 그들의 생각에 흔들리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더 굳건히 그들 사이에 자리매김하려 애를 태운다. 이러할 때, 닿아 있음의 감각은, 타인의 생각이나 수용이나 자리매김으로는 내가 규정될 수 없음을, 사실 그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님을 환기한다. 타인에게 수용되어야 굳세어지는 확신이라면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허위이다. (92쪽)

나는 누군가의 평가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이곳 지금이다. 연연해하지 않는다.
소리 높여 나누는 인사, 멈춰서는 차 소리, 경적, 아이와 여우와 라디오와 강아지의 외침. 세상의 모든 소리는 살아감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배경음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다가선다. 앞으로 가운데로, 수많은 건물의 수많은 창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살아감이 있다. 나는 미루어둔다. 내려놓는다. 타인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갑자기 차장든 비에, 물결의 무늬에 시선을 둔다.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사람, 잔디밭에 몸을 누인 두 사람, 건널목에서 머리칼을 당기며 노는 셋, 손에 든 짐의 무게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엄마의 굳센 두 다리를 쫓아가는 아이. 그들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그곳에 중요한 것이 있다.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다. (137-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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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로 여행하면서 챙긴 책, 300여 년 전에 여성이 여성에 대하여 쓴 글을 읽었다. 

가브리엘 쉬숑은 여성을 '나약함, 가벼움, 변덕스러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전가하는 부당함에 대하여 반론한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에 독자는 남성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여성의 위치를 생각하면, 시대를 엄청 앞서간 분이다.

여성은 이러 이러하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규정된 남성 중심의 시대에서, '탄탄한 논리와 신빙성 있는 인용에 근거한 나의 논지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6쪽).'로 당당히 맞서고 있다.

지금 읽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맞물려 있다.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특성이고,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러움은 개인의 타고난 성질과 환경, 상황에 따라 드러나고 감추어진다. 

소위 상황과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나약함, 가벼움, 변덕스러움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를 여성의 특성이라 단정짓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약함, 강함, 가벼움, 무거움, 변덕스러움, 진중함까지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들이 내포하고 켜켜이 쌓인 여러 의미까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남녀로 구분하면서 사는 삶이 아닌, 한켠으로 치우치는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약함과 강함, 무거움과 가벼움, 진중함과 변덕스러움의 사이에서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특성을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적재적소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난 남녀 차이보다는 사람이라는 틀에서 자랐고(친구왈, 부모님의 양육 태도로 세상과 사람을 보는 관점이 자기들과는 차이가 난다고..), 결혼 생활도 동등하게 살고 있다. (아들왈, 아빠는 엄청 가부장적인데, 엄마만 모르고, 엄마의 바른 주장이 강해서..)  

그런데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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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 아를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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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문제는 두 가지 관점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인데,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 기질로 보는 관점이고, 둘째는 그 기질을 다루고 조작하는 차원에서 보는 관점이다. (48쪽)

두려움이 고난을 예상하는 태도라면, 강함은 고난을 제어하고 정복하는 자세다. 따라서 진정한 강함은 눈앞의 고통은 물론 향후 있을 고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힘에서 온다. 강한 사람의 힘은 나약함을 떨쳐낼뿐더러 무모함을 경계하는 미덕이기도 하여, 위험을 미리 인지하고 그것을 피해가는 지혜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69-70쪽)

블레즈 파스칼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동감하며 말하기를, 인간은 참으로 안쓰러운 존재라고 했다. 불안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이는 그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 자체가 괴로움을 부른다 해도 유독 여성에게 그것이 특히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이 자연에 반하는 삶의 태도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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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을 때마다 심사 위원이 되어 본다. 역시나 대상은 '김춘영'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를 설명해야 되지만 어휘도 딸리고 생각도 모자라서 적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서 피아식별이 안되는 자가 그 사건을 제대로 말해 줄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구술자 김춘영이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져 '문제없는 하루'는 못 읽었다, 그래도 문제가 없으니까... 작가의 노트와 리뷰에서 소설 쓰기와 소설 읽기의 정의라고 할까,를 발견했고, 그들이 쓴 글에서 음, 이렇구나,로 나는 다음과 같다.  


피.아.식.별과 벗은 몸(김춘영) → 각자의 거푸집(거푸집의 형태)  관계에서의 공간, 헤아릴 수 없는 무서움과 부끄러움(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친절과 선의는 별일 아닌 것에서, 생활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용기, 이상과 일상 사이(빈티지 엽서) → 침묵과 의미의 공백에 들어 있는 욕망(눈먼 탐정)  삶과 죽음의 지점이 아니라 낯선 타국의 환승 정거장에 있다면, 그래서 모르는 밖의 세계를 계속 사용하고 접속해야 하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식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돌아오는 밤).  


181쪽 김혜진 노트에서는 '소설 쓰는 일은 내 삶과 타인의 삶 사이에 반투명한 종이를 겹쳐 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타인의 삶은 내가 모르는 것이어서 힘껏 상상해야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삶과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 한때 갈망했던 삶과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던 삶이 모두 있다.'


227쪽 김미정 리뷰에서는 '소설 속 세계가 그러하듯 스스로가 완강하게 고집하는 것들을 내어놓지 않고는 이 세계를 여행할 수 없다. 거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한 이방인 혹은 타인으로 경험한다. 익숙한 인식이나 감정의 회로를 이탈하며 헤매는 일은 미지에의 모험에 근사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손에 넣는 일(소유)이라기보다,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을 내어 놓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하며 낯선 세계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사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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