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만질 수 있다면, 적어도 쓸데없는 감정 소모와 서로에게 상처 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저자가 또한 언급한 '가지 않는 길'이며, 'trade off' 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만질 수 있는 생각으로 형태와 물질을 만들어 낸 그 과정의 지난하고 힘들었던 시간과 상황, 노력보다는 성과나 결과에 초점이 가 있으니, 마냥 부러웠다.
자식에 대한 생각도 이러한 거 같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포기와 선택이 있고, 어려움과 노력이 전제 되어야 번듯한 결과가 나올까 말까 하는데, 아들의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함에도 그 결과를 미리 그려주려고 했던 거 같다.
이렇게 좋은 날이 흘러가고, 이렇게 살아가면 되겠다, 구체적이고 확정된 부분은 없었지만, 대체로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상황에서,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로 여행을 떠났다.
다음은 어디로 여행 가자 하면서, 떠나기까지 다녀 온 여행의 감흥을 몇 번이나 곱씹기를 바랬다.
오자마자, 폭탄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폭탄이었다, 그 때만 해도 그랬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아들이 일련의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적은 A4용지를 내밀었다. 일방적이었다.
며느리 될 아이를 만나고, 이 불편한 감정을 추스리면서 시간이 흘러 다음 주말에 결혼식이다.
몇 권의 책들은 건성으로 넘어가고, 남편과 나의 목소리는 엇갈리고, 방법과 내용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방식대로 밀고 나갔다. 아들 편을 온전히 들어주었다.
이 때 생각을 만질 수 있다면, 아니 보이기라도 한다면, 서로의 갈등은 무해하고 이해를 넓힐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각자 백지 위에 인생을 그리고 있고, 그 인생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아들의 결혼은 우리의 결혼이 투영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이 개입되면서, 아들을 위한다는 명목이 우리의 결핍을 메우려는, 그래서 미리 살아 온 우리의 아쉬움이나 실패를 최소화 시켜주고 싶었다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남편은 가네 마네로 온갖 싫은 소리를 마구마구 쏟아내더니, 그래도 아들과의 절연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오늘에야 양복을 샀다. 드디어 참석한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리라. 며느리 얼굴은 기억날까, 양장을 입고, 폐백은 하지 않지만, 다음 주가 되면 아주 우아하게 품위 있는 결혼식을 준비한, 부모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마련한 혼주석에 앉아 있을 것이다.
아들을 많이 사랑하는 남편과의 갈등이 힘들었다. 분리 과정으로 충분했다. 정말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고, 지방에 가서 살자고 하더니, 그래도 자식 근처에 살아야 한다나...
물건이든, 시간이든 함께 머리 맞대어 풀어나가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생각을 만질 수는 없었어도 고개를 돌려 가만히 보면 눈 빛, 몸 등이 말하는 틈새에서 긍정의 기미를 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급히 서둘러, 애써 규정하고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드러내지 않는 한 그 누구의 생각은 만질 수는 없다. 다만 볼 수는 있을 뿐이다. 만지고 볼 수 있는 사이의 간극은 크다. 하지만, 저자는 넓고 깊고 커다란 틈을 우리가 만질 수 있도록 제본하여 제공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어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