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김용규 지음 / IVP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보기에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scientia prima)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세속적 세상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죄와 악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요컨대 다른 어떤 학문보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어떤 학문보다 폭넓은 가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학문이 그 바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은 제일 학문입니다. (9쪽)

기독교 신학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신앙과 이성, 성서의 계시와 인문학이 빚어낸 아름답고 거대한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중략) 기독교 신학은 세상에 발 딛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나라를 향해 뻗어 있고, 인간의 학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며, 성서와 인문학을 지주(버팀태)로 하여 다분히 신성하면서도 동시에 세속적인 사역을 담당하지요. 성서를 지주로 삼음으로써 (또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지주로 삼음으로써 (또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성서와 인문학을 두 개의 지주로 삼음으로써 (또 그래야만) 기독교 신학은 성육신하신 예수님, 보다 종교적 표현을 빌린다면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0-62쪽)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무엇을 뜻할까요? 당연히 그것은 2천 년 전에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지요? (중략) 서양 문먕을 구축하고 이끌어 왔던 신본주의 가치들이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사람들은 그동안 신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해 왔던 신본주의 가치들에서 차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성, 합리성, 객관성, 과학, 계몽, 실증, 자유, 평등, 박애, 진보, 민중 해방, 혁명과 같은 인본주의 가치들을 지향하며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했지요. 바로 이것을 두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죽었다는 말은‘인간이 신이 되었다‘라는 놀라운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68-69쪽)

그런데 예전에 우리는 어떻게 했나요? 자신의 진로나 결혼 상대를 결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문제는 기도 중에 하나님에게 묻거나, 교회에 가서 목사님에게 물었지요.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랬습니다.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의 젊은이들은 이른바 기획 투사(Entwurf), 즉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여 그것에 자신을 던지기 위해-그럼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자기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하라리는 앞으로는 사람들이 아마존이나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차츰 새로운 우상으로 등극한 컴퓨터 알고리즘과 데이터의 노예로 전락할 것으로 봅니다. (83쪽)

우리는 이제 신의 은총이 사라진 하늘 아래서, 인간과의 연대와 협력이 사라진 땅 위에서 작은 이야기들이 지향하는 다양성과 상대성에 매몰되어 아무런 이정표도 없이 스스로 갈 길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맞았습니다. 시쳇말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들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들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위험과 공포가 유행처럼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양이에게 갈 길을 묻는 앨리스처럼 컴퓨터 알고리즘에게 살길을 묻게 된 것도 바로 그래서이지요. (96-97쪽)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로부터 내려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이상이 삶과 사회에 더 이상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없음이 드러날 무렵에 기독교가 등장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또한 중세 가톨릭교회가 부패해 서구 세계가 칠흙 같은 어둠으로 덮여 가던 즈음에 그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도 다시 떠올려야 합니다. (중략) 만일 우리가-고대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그랬듯이, 또한 르네상스 시기에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듯이-숭고한 이상을 가슴에 품고 담대한 지적 모험을 감행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며 충돌하는 가치들의 통합과 융합을 이루어 낸다면 인류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99-100쪽)

호모 데우스 시대의 절망을 극보하는 길은 온전한 가치의 추구와 구현에 있고, 그 첫걸음은 당연히 신본주의 가치들의 복원이 되어야 합니다. (중략) 모든 다른 가치가 신본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시작해야 비로소 제 몫을 하고 보래의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무엇보다도 먼저 신본주의 가치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이 말은 신본주의 가치를 토대로 인본주의 가치를 복원하고, 다시 그것을 토대로 탈근대적 가치를 구축하여 ‘온전한 가치‘를 정립해 나가야 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탈근대적 가치는 인본주의 가치를 벗어나서는 안 되고, 인본주의 가치는 신본주의 가치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 통합과 융합의 용광로 안에서 시대마다 새롭게 드러나기 마련인 기존 가치의 공허함과 새로운 가치의 맹목성이 상호 해소되고 보완되어 온전한 가치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107-10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약의 숲 - 하나님 나라로 읽는 느헤미야 기독교 입문 시리즈 1
김근주 지음 / 대장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리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그 들은 바에 대한 비판적 자세, 이 두 가지야말로 고귀하고 고결한 덕목이며, 성경을 공부하는 기본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쪽)

인간은 신들의 종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릴 임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대 중동 신화들에서 노동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하며, 하층에 있는 존재들이 하는 일이지만, 구약에서 노동은 그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이었다. (중략) 노동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거룩한 것이며, 사람은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참여한다. (66쪽)

아직 아브라함에게 한 뼘의 땅도 하나님이 주신 일이 없지만, 그에게 일을 결정하는 원칙은 확고하였다. 그의 삶은 일어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신 약속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에게는 아무런 땅이 없지만, 그의 삶은 주신 약속을 따르는 삶이었다. (중략)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다. 자신의 동네 사라미 아닌 사람, 낯선 사람, 연약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다. (102쪽)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자손의 약속은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땅과 자손의 약속은 그 주어진 땅에서 주어진 자손에게 명하여 이루어지는 공평과 정의의 나라로 연결되며, 하나님 나라로 연결된다. (중략) 공평과 정의의 삶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이라는 점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삶을 지시하는 것이지 않다. 공평과 정의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닮아 다른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이웃의 슬픔과 괴로움에 동참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기업과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돕는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04쪽)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 따로 구분된 삶을 가리키는 핵심적인 용어는 ‘거룩‘이다. (중략) ‘거룩은 내재적이지 않고, 관계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어떤 특정한 행동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다. (127쪽)

우리의 부족함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함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이루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다만,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멸시하지 않는 것이 요구될 뿐이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덜 생각하는 것이다. (194쪽)

지혜의 본질은 똑똑함이나 지식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듣는 마음‘이다. (중략)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 듣는 마음의 근본은 사랑이다. (220쪽)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행동의 원칙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매여 있다. (301쪽)

하나님이 우리 뜻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뜻에 맞추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만, 내 생각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신다. (302-303쪽)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아뢰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토로하고 원망도 하고 자신의 아픔을 아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편의 탄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에 기초한 것이다. (317쪽)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근본 원리는 공평과 정의의 삶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며 공평과 정의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는 백성의 삶의 내용일 것이다. (3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 너 - 개정판
마르틴 부버 지음, 김천배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가 경험하고 사용하는 물건만을 만족하는 사람은 과거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의 매 순간에는 현재가 없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대상뿐이다. 그러나 대상물은 과거가 된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중략) 대상물이란 바로 ‘관계‘와 ‘현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재적인 것은 현재를 산다. 이에 반해 대상적인 것은 과거를 산다. (31쪽)

개인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그것이 어떤 점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 갈라져야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다음의 한 가지 점에서만은 일치한다. 즉 어느 경우에나 "역사는 ‘그것‘의 세계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점이다. (74쪽)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에게서 만난다. (중략) 타고나온 ‘너‘는 낱낱의 관계에서 현실로 화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어떠한 낱낱의 관계에서도 완성되지는 않는다. 타고나온 ‘너‘는 오로지 본질상 도저히 ‘그것‘이 될 수 없는 ‘너‘와의 직접적 관계에 들어감으로써만 완전히 현실이 되는 것이다. (138쪽)

우리가 관심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상대자의 길이 아니라 우리의 길이다. 신의 은총이 아니라 자기의 의지이다. 은총은 우리가 몸소 그것을 지향하고 그 임재 안에 있으려고 하는 동안에서만 우리에게 개입한다. 그러므로 은총은 우리의 객관적 대상이 될 수가 없다. (14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의 파리행 - 조선 여자,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
나혜석 지음, 구선아 엮음 / 알비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오부터 2시까지 식탁에 모여 앉아 한담하며 마음껏 점심을 먹는다. 이 시간에는 각 상점은 철문을 꼭 닫는다. 그리하여 점심시간에는 인적이 드물다. 그리고 주부는 가사를 정돈해 놓고 낮잠을 한숨 잔다. 저녁은 점심에 남은 것으로 먹고 화장을 하고 활동사진관, 극장, 무도장으로 가서 놀다가 새벽 5시에서 6시경에 돌아온다. 부녀의 의복은 자기 손으로도 해 입기도 하지만, 상점에 해놓은 것을 많이 사서 입는다. 겨울에는 여름 의복에 외투만 있으면 그만이다. 여름이면 다림질, 겨울이면 다듬이질로 일생을 허비하는 조선부인이 불쌍하다. 오락 기관이 많이 생기는 원인은 구경꾼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구경꾼 중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것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일반이다. 서양 각국의 오락 기관이 번창하는 것은 오직 부녀생활이 그만큼 여유가 있고 시간이 있는 것이다. (21쪽)

헤이그는 네덜란드의 수도이거니와 조선 사람으로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진 만국평화회의가 있던 곳이다. 1918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하였던 이준 씨가 당회 석상에서 분사한 곳이다. 이상한 고동이 생기며 그의 의로움이 있어 우리를 만나 함루하는 것 같은 감이 생겼다. 그의 산소를 물었으마 알바 없어 찾지 못하고 다만 경성에 계신 그의 부인과 딸에게 엽서를 기념으로 보냈을 뿐이다. (64쪽0

따뜻한 봄날 아지랑이가 끼었을 때 루브르궁전 정원 주위에 화단을 돌아 여신상 분수에 발을 멈추고 역대 인물 조각을 쳐다보며 좌우에 우거진 삼림 사이로 소요하면 이것이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이다. (76쪽)

이처럼 어디로 보든지 화락한 가정이었다. 특별히 부인의 가정생활을 보면 아양보양하고 앙실방실하고 오밀조밀하고 알뜰살뜰한 프랑스 부인 중에 점잖고 수수하고 침착하고 어딘지 모르게 매력을 가진 부인이다. 강약이 겸비하여 물 샐 틈없이 규모가 꼭 째이게 살림살살이를 하고 염증이 나지 않고 신산스럽지 않은 생활이 예술이 되고 말았다. 남편에게 다정스럽게 구는 데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고, 더욱이 가품이 학자의 생활인만큼 검소하고 독립적이라...(생략) (88쪽)

처음 파리에 와서 미술관이나 화상에 가서 그림을 보고 나면 너무 엄청나고 내 것은 너무 명색이 없어서 낙망이 된다. 마치 명태 알만한 뭉탱이가 있다면 대가의 그림은 그 뭉탱이만하고 자기라는 것은 그중에 한 알만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화계의 상황과 요령을 배워 연구하려면 여간한 방황과 고심을 요한다. (100쪽)

피렌체는 예술의 도시라, 시가를 걷는 것은 마치 미술관을 걷는 것 같다. 어느 건물, 어느 성당, 어느 문, 어느 창, 어느 조각이 예술품 아닌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이 맛을 보러 왔지만 저 아르노강물로 키운 단테, 미켈란젤로, 조토, 마사치오, 보티첼리, 도나텔로 등 천재의 자취를 보러 온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밟았겠지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140쪽)

그(고야)는 죽었다. 그러나 살았다. 그는 없다. 그러나 그의 걸작은 무수히 있다. 나는 이 묘를 보고, 그 위에 그 걸작을 볼 때 이상이 커졌다. 부러웠고 나도 가능성이 있을 듯 생각났다. 처음이요, 또 최후로 보는 내 발길은 좀처럼 돌아서지를 못하였다. 내가 이같이 감흥을 느껴 보기는 전후에 없었다. (164쪽)

누구든지 파리에 와 있다가 파리가 좋은 곳인 줄 알게 되면 떠나기 싫어한다. 그리하여 먹을 돈은 없고 가기는 싫고 하면 가진 참극 비극이 다 생긴다. 그런 사람들은 무책임하고 기분적으로 살며 남을 속이고 빼앗기를 예사로이 한다. 파리 자체는 아름다운 곳이나 외국인들을 버려놓는 것이다. 과연 파리 인심은 자유, 평등, 박애가 충분하여 누구든지 유쾌히 살 수 있으며 이곳을 떠날 때는 마치 애인 앞을 떠나는 것 같다. 나는 파리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떠나기가 싫었다. (169쪽)

괴이한 경치로 유명한 그랜드캐니언에 내렸다. 스위스의 경색이 예쁘고 작다 하면 미국 자연 경색은 크고 잘 생겼다. 캐니언은 협곡의 의미요. 층암과 깊이 1마일, 폭 1마일의 암석 단층은 마치 인도에 있는 피라미드 같아서 천길 밑바닥에서 무수하게 치솟았다. 그것이 석양에 비칠 때는 자연에 영색한 것 같아 일견 매우 웅대하다. 골짜기 바닥에 광선에 반사되는 모습이며 콜로라도 강이 흘러 은유를 이루는 미관 또한 형언하기 어렵다. 암석 자신이 아름답다. 광선에 따라 그 색이 청색, 회색, 황색, 적색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태양의 위엄과 자연을 확실하게 형체 상으로 볼 수 있다. (192-193쪽)

친척 일동과 노모와 세 아이가 나왔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눈물도 아니 나오고 감정이 이상하다. 자동차로 동래로 돌아왔다. 1년 8개월 전에 보던 버섯과 같은 집, 먼지 나는 길, 원시 그대로 있다. 다만 사람이 늟고 컸을 뿐이다. 무엇보다 노모의 기운이 좋고 삼남매가 건강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 아, 동경하던 구미 만유도 과거가 되고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돌아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앞길은 어떻게 전개하려는가. (209쪽)

생활 정도를 낯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애를 느낀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쫓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이러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할 그야말로 무슨 운명에 처하였는가? 그러지 않으면 일부러 당하고 있는가? 구미 일주를 한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를 다니고 아카데미 책상에서 불어 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꿔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중략) 그 기분은 여성이오, 학생이오, 처녀로서였다. (213쪽)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아버지의 딸이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220쪽)

그러면 유럽과 미국인이 사는 것이 어떠하며 우리 사는 것이 어떠한다. 한 말씀 말하면 그들은 꼭꼭 씹어서 단맛, 신맛, 짠맛을 다 알아서 삼켜서 소화하는 것이오. 우리는 된 대로 꿀떡 삼켜서 아무 맛을 모르는 것이다. 결국 대편되기는 일반이나 대편 될 동안에 경로가 얼마나 다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의 맛을 안다. (중략) 그러면 우리 사는 것은 어떠한다. 날 가는 줄 모르게 늘 지루하다. (2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영하 여행자 도쿄 김영하 여행자 2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매커니즘을 의미한다면 도쿄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섬세하게 튜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도쿄에선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고 주의 깊게 조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모든 사물이 마치 행성들이 제 궤도를 따라 공전하듯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96쪽/219쪽)

도시에 대한 무지,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가진 특권이다. 그것을 깨달은 후로는 나는 어느 도시에 가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다 신뢰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앎에 ‘갇혀‘ 있다. 이런 깨달음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갇힌 앎을 버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154쪽/236쪽)

도쿄의 번화가들은 기묘하다. 마치 볼륨을 줄인 대형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대단히 화려하지만 조용하다. 어떤 억제된 에너지가 착 가라않아 있는 듯한 도쿄의 거리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개인의 존재이다. 도쿄는 근대 이래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문제적 개인들은 포용해온 유일한 도시였다. 무정부주의자, 동성애자, 범죄자, 펑크족,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 마약중독자들이 도쿄에서 드디어 살 곳을 찾았다. 천황 암살의 뜻을 품고 잠입한 이봉창도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임무 시작 전까지 유유히 지낼 수 있었다. (208쪽)

일본인에게는 조화와 적절한 거리, 주어진 공간 안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정신이 있다. 그 정신의 문화적 표현이 하이쿠 아닐까? 규칙을 지키면서 제한된 글자 수 안에 최대한의 감수성을 담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하이쿠 미학의 요체이다. 튜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일본이의 정신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게 하이쿠라면, 하이쿠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도쿄의 호텔이다. 도쿄의 호텔들은 대체로 좁다. 그렇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호텔이 호텔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상태를 갖도록 만드는 장인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234쪽)

도쿄에서 절과 신사, 미술관과 백화점만 보고 돌아가는 사람은 불운하다. 도쿄에서는 적어도 하루를 들여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작고 아담한 가게들을 순례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그것은 도쿄가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취향과 고집을 가진 인간들이 친절하기까지를 기대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오직 도쿄만이 그 예외이다. (28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