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범한 밥상 - 박완서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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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26쪽, 부처님 근처)

지금까지 한두 사람의 노파 이야기는 어느 친구한테 들은 실제로 있었던 노파들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노파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그런데도 굳이 이 두 노파를 한자리에 모시고 싶었음은 내가 발견한 노파들의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욕되도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파라든가 할머니라든가 하는 중성적인 호칭이 안 어울리는 강렬한 여자다움을 못 버렸었다. 여자라는 것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나는 차마 그들을 노파라고는, 할머니라고는 못 하겠다. 여자라고밖에는. (92쪽,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나는 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게 된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당면한 엄청난 고통 중 털끝만한 부피도 덜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부당해서 곧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남남끼리요. 사람도 결국은 외톨이라는 걸 받아들이기엔 그 아이는 너무 작고 어렸다. (167쪽, 엄마의 말뚝2)

내 모가지에 마늘 열 접이면 고작인 것을 감히 아파트 한 채를 이고 가려 했으니,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죄를 받는다니까. 그렇지만 아파트 한 채는 지 알고, 내 알고, 하늘까지 아는 일이건만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여넘길 수가 있담. 천벌을 받을 년. (290쪽,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하다 못해 스킨십조차 없는 완전히 남남이었다. 스킨십이라도 있었다면 남편의 정장이가 그렇게 꼴 보기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을 비비는 행동이 끊긴 것과 그의 몸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던 것이 무관하지 않다면 몸을 비비는 행동이란 그닥 얕볼 일도 아니다 싶었다. 그녀가 오늘 느낀 것은 결코 구체적 욕망이 아니었다. 흔히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거대한 허전함을 메우고 싶어했다면 그건 욕망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가망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완전히 단절됐던 몸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렇게도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359쪽, 너무도 쓸쓸한 당신)

"(중략) 누군가가 세금을 내니까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애걔걔, 그까짓 쥐꼬리만한 혜택.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들이 털도 안 뜯고 삼켜버리거나 즈이들끼리 왕창 인심쓰는 데 유용하는 액수에대 대면 그까짓 거 조금도 고마워할 거 없다, 너." "쥐락펴락이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한던 인간도 죽으면 이 세상의 있는 것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잖아. 그거 하나라도 확실하면 됐지 뭘 더 바라." (394쪽, 대범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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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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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물었다. "하지 않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모습은 어떻게 다릅니까?" (맹자께서)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으면서 남에게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것을 남에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하지 않은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며 임금께서 왕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은 나무가지를 꺾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43쪽)

(공손추가 물었다)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편벽된 언사에서 그 가려짐을 알고, 과장된 언사에서 그 빠져 버림을 알며, 사특한 언사에서 그 벗어남을 알고, 회피하는 언사에서 그 궁색함을 안다. (이런 언사들이) 그 마음에 생기면 그 정치를 해칠 것이고, 그 정치에 드러나면 국가의 사업들을 해칠 것이다. 성인이 다시 일어나도 반드시 나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105쪽)

백성들이 살아가는 도리는 일정한 생업이 있으면 사람은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일정한 생업이 없는 사람은 변함없는 마음이 없게 됩니다. 만약 변함없는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간사하고 사치한 행동을 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른 후에 (그 죄에) 따라서 처벌한다면, 그것은 백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군주의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 잡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공손하고 검소(검약)하며 신하들을 예로써 대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데에는 일정한 법제가 있습니다. (169쪽)

군주가 되고자 한다면 군주의 도리를 다해야 하고, 신하가 되고자 한다면 신하의 도리를 다해야 하니, 이 두 가지는 모두 요임금과 순임금을 본받을 뿐이다. 순이 요임금을 섬기던 방법으로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주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고,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던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성ㅇ르 해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어진 정치를 하느냐 어진 정치를 하지 않느냐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239쪽)

맹자께서 제 선왕에게 말씀하셨다. "군주가 신하 보기를 자기의 손발과 같이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자기의 심장이나 배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군주가 신하 보기를 개와 말처럼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길 가는 사람들과 같이 여기며, 군주가 신하 보기를 흙이나 지푸라기와 같이 하면 신하가 군주 보기를 원수와 같이 될 것입니다." (275쪽)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이 불인을 이기는 것은 물이 불을 이기는 것과 같다. 오늘날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마치 물 한 잔으로 마차 가득한 나무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아서, 불이 꺼지지 않자 물이 불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또한 심하게 불인을 조장하는 것이어서, 마침내는 반드시 인을 없애 버릴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오곡은 종자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여물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 인 역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무르익게 해야 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399쪽)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사의 이치는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서 진실하다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힘껏 서를 실천하면 인을 추구함에 이보다 더 가까운 길은 없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고, 숙달되어 있으면서도 그 까닮을 깊이 알지 못하며, 일생동안 그것을 따르면서도 그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 보통 사람들이다." (435쪽)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음을 확충하여 차마 할 수 있는 바에까지 도달하면 그것이 바로 인이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지 않는 일은) 기꺼이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확충하여 기꺼이 하고자 하는 바에까지 도달하면 의이다. 사람이 남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을 확충해 나간다면 인은 이루 다 사용할 수 없고, 사람이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확충해 나간다면 의는 다 사용할 수 없다. 사람이 남으로부터 ‘너, 너.‘ 하고 업신여기는 호칭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확충해 나간다면 어디를 가든 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 (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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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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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몸과 마음은 터무니없이 격렬해서, 마치 과속하는 자동차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도 치명적인 접촉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그런 접촉 사고들로 그녀의 마음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더 다칠 자리가 없을 정도로 상처 입었었다. 삶이 자신을 시멘트 바닥에 대고 철썩철썩 패대기치는 것 같았다. 아픈 촉각보다 힘겨웠던 것은 제 귀로 들어야 했던 그 명백한 고통의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25쪽)

40년이라는 것, 1억 5,600만 년에 비하면 먼지 같은 세월이야, 하는 말을 그는 하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이곳은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들을 만나기에 정말 좋은 장소이기는 할 것 같았다. 또 그녀는 생각했다. 왜 그를 만나야 하는 걸까, 이 만남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걸 묻고 그가 대답할까? 그렇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61쪽)

가난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다. 선택이던 것이 필수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품질이 많이 좋고 가격이 약간 비싼 것보다 품질이 많이 떨어져도 값이 약간 싼 물건들을 고르는 것, 돈이 생기는 일이면 그게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116쪽)

돌아보면 시간은 언제나 두껍게 얼어버린 빙하 같았다. 좀처럼 쪼개지지 않아 틈을 낼 수 없었으나 돌아보면 한 세기처럼 거대한 단위로 훌쩍 흘러갔다. 어린 그녀들은 이제 중년을 훌쩍 넘었고 그 시간의 긴 바다를 건너 맨해튼 한복판에서 만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198-199쪽)

그런데 안개를 뚫고 떠오르는 것은 그때 썼던 편지의 구절이 아니라 편지를 쓰던 자신이었다. 배가 고팠던 밤. 바람이 거셌던 길고 긴 서베를린의 밤들. 결국 추억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를 대했던 자기 자신의 옛 자세를 반추하는 것일까. (208쪽)

육체는 40년이 지나도 그 기억을 지우지 않았고 마치 모든 것이 폐허로 돌아간 듯한 이 지하의 공간에서 그 기억을 그녀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229쪽)

"많이도 미워하고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만큼 살고 죽음이 더는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날씨가 춥죠? 하고 인사하고...... 살아보니 이 두마디 외에 뭐가 더 필요할까 싶다. 살아보니 이게 다인 것 같아, 미호야." (251쪽)

작년에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 갔을 때 버질의 시를 봤지요.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노데이, 쉘, 이라고 그가 영어 구절을 외울 때, shall, 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어린 시절 영어시간에 배웠던 단어, 그건 운명 혹은 숙명 저 미래를 내포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256-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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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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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한세진과 대화하면 자주 이렇게 되었다. 언짢고 불편해졌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말들 때문에. (62쪽)

한영진이 한세진의 운동화를 종종 신고 나갔다. 한세진은 언니가 그렇게 해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남은 걸 신었고, 자기걸 건드리지 말라고 나중에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언가를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어떤 감정을. 한영진은 최근에 그걸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어린 동생에게 잘못을 했다고 느꼈다. 손써볼 수 없는 먼 과거에 그 동생을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된 한세진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아이에겐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63쪽)

그런데 엄마, 한민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한영진은 오래 전에 그 말을 들었고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그 말을 지침으로 여겼다. 이순일도 그랬을 거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살아보니 정말이지 그게 진리였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81-82쪽)

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다투거나 하면 즉시 개입할 수 있었는데, 한쪽을 혼내거나 둘 다 혼내거나 달래거나 중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릴 때만큼 자주 다투지는 않았지만 훨씬 신랄하고 내밀한 것을 두고 다투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순일은 가책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109쪽)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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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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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 책이란 그러한 상대성을 뛰어넘는 무엇이다. 방대하고, 깊고, 풍요로우며, 지저분하고, 거추장스럽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곤란한 무엇이다. 우리에게는-부르크하르트 슈피넨에 따르면-새 책, 헌책, 큰 책과 작은 책, 빌린 책, 두고 간 책, 사인 받은 책, 버린 책, 심지어 불에 타버린 책이 있다. 책을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한 권의 책을 필요로한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애서가들은 책의 근사함을 보여주겠다는 소박한 열망으로 출발해 기어코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쓴다. 책의 속성은 그 자신이 책이 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애서가들의 귀에 속삭인다. 나를 써보지 않겠어? (김겨울 추천사 중)

초창기의 책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크고 무거웠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책의 내용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지닌 소수의 전유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37쪽)

우리는 일상에서 텍스트와 책을 동일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탓에 책이라는 낱말을 텍스트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책‘을 쓰는 사람은 없다. 책이 아니라 나중에 인쇄되어 책으로 출판되길 바라는 ‘텍스트‘를 쓴다. (중략)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책‘은 그야말로 ‘오롯한 책‘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택스트와 그것을 담은 물질적 형식이 자명하게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즉 정신과 물질이 일치한다. (58쪽)

우리가 평생 읽는 책의 분량과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보관할 수 있는 책의 분량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우리가 소장하는 책의 분량만큼, 딱 그만큼의 텍스트가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마련하는 모든 새 책은 그 책들이 우리의 책장을 차지하는 공간만큼 우리의 독서 생활을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맞은‘ 책을 고르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60-61쪽)

물에 젖어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책일지라도 버리는 건 고통스러웠다. 나는 책들이 그런 상태에서 솔직히 고마웠다. 그런 상태는 내 행위를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반면에 훼손되지 않은 책을 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신성 모독처럼 느껴졌다. (104-105쪽)

책은 과정이 아니다. 책은 다차원적인 것, 임의로 계속될 수 있는 것,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이다. 책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저술된 것,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물체다. (120-121쪽)

이토록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있고 싶은 욕망의 배후에는 실제로 무엇이 존재할까? 이 모든 사색과 반성의 결과가 무엇이었을까? (149-150쪽)

아무리 디지털 시대일지라도 책으로 가득 찬 서가는 인기 있고 사랑받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수천 명의 과학자, 성직자, 예술가, 정치인들이 책으로 가득 찬 서가들 배경으로 사진가와 카메라맨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10초 남짓한 자신들의 진술 또는 성명이 더욱 진지하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은 그런 분명한 신호를 요구한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책으로 가득 찬 서가가 그 특정한 목적과 요구에 기여하는 듯 보이는 까닭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그 서가의 주인을 위해서 말이다. (157쪽)

나는 보다 단단한 무언가에 얽매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책에 담긴 텍스트가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 즉 책을 읽는 행위였다. (161쪽)

읽힌 책은 그것을 읽은 독자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독자가 가장 머물러 있고 싶어 했던 부분, 가장 편안함을 느낀 부분이었다면 언제나 그렇다.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와 동시에 독자에게는 그 세계를 여행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따금씩 그 여행을 회상하기 위해서라도 읽힌 책은 여행 기록처럼 보관될 필요가 있다. 여행 기록들이 다 그렇듯이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개인 도서관은 자신만의 독서 생활을 위한 기록 보관소이다. (163쪽)

진정한, 정말로 진정한 장서광은 결국에는 자신의 책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개의치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장서를 돌볼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장서광은 중독된 자들이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이, 책 중독도 끊임없이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174쪽)

책의 물질적인 가치는 출판사나 경매소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가치는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획득된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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