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 하다 앤솔러지 5
김경욱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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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미래의 감옥.
오래동안 충분한 고통을 겪은 자만이 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 마주하기 두려운 무언가를 용기 내어 끌어안을 때 시간의 문은 열리나니. 남겨진 자들이 두려움을 놓아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순간 비로소 그는 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 (40쪽,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는 똑똑하든 멍청하든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괴롭게 만들었다. 일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신정윤이 보기에는 이 회사의 모든 것이 어이없고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결국 돈도 일도 모두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었다. (57쪽, 가짜 생일 파티)

위엄을 잃지 않은 뒷모습.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이 그뿐이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이날까지 나를 살아남게 한 중요한 직관이다. 나는 그것에 한없이 집중하여 사무실의 문을 닫은 뒤에도 꼿꼿한 뒷모습의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왕처럼 당당하게 그 의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은 무너지지 않은 뒷모습, 그것만이 중요했다. (77쪽, 가짜 생일 파티)

우리 목사님이 그러더군. 그 말 하나는 참 맘에 드는데 좀 어려운 말이지만 마음을 재지 말래. 발이 먼저 나서면 마음이 따라온다는 거야. 그걸 유식하게 삶의 형식이라고 하더구먼. 지나가야 할 자리는 그냥 지나가는 거야. (110쪽, 히치하이킹)

그들이 어떻게 재회할지 궁금했다. 허방 같은 긴 시간을 두고 헤어진 연인들이 이제 어떻게 만나는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실망했다. 지영은 영호를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자신이 영호에게 애틋한 추억으로 남을 수 없다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내가 지나치게 큰 욕심을 가졌던 걸까. 그녀는 자책했다. 어쩌면 나를 용서하고 잊어 달라는 말은 실상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오래 기억해 달라는 말이 아닐까. (116쪽, 히치하이킹)

우리는 자리에 선 채로 노을을 바라보다가, 이내 왔던 길을 되짚어 묵묵히 걸었다. 저물어 가는 빛 속에서 우연히 평점 4.9의 식당을 발견하게 되면 좋을 것이다. 인생에는 드물게 그런 행운이 있으니까. 발견하지 못해도 또 다른 곳이 있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148쪽, 다시 한번)

엄마들은 자신이 노인이라는 걸 언제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글쎄. 난 이제 물어볼 수도 없고. 아마도 그냥 우리처럼 잘 몰라서 혼란스러워하지들 않으셨을까. 우리는 우리가 중년이 됐다고 인정하지만 그게 실은 어떤 건지, 거기에 뭐가 필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186-187쪽, 그녀들)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야기들은. 언젠가는 말할 수 었는 이야기도 있다. 서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고 어쩌면 앞으로 더 생길지 몰랐다. (중략) 어쩌면, 서로를 이해해서 멀어질 때도 있을 거야.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선배는 여기 온 것 같았다. (190쪽,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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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62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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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결국 우물에 포섭되고 만다네. (12쪽, 폴짝인입니까?)

법의 언어가 아니라
경전의 언어가 아니라
숫자의 언어가 아니라
신화의 언어가 아니라
고유명사를 찬미하는 송가가 아니라
보통명사 하나하나를 고유한 세계로 맞이하려는 태도,
그 따스한 흔들림으로부터

이곳의 정의는 (평평으로)

(중략)

이곳의 민주주의는 (평평으로) (39족, 한 마을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

발 딛고 선 이곳이 운명이라는 건
어디서든 의지로 나를 지킨다는 건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건
내 의지로 당신을 지킨다는 것

그러므로 운명은 없다는 것 (73쪽, 벼랑 끝 나무로부터 배운 운명은)

꽃을 먹으면서
내가 먹는 것이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말과
돌과
금과
총알과
포탄이
뒤섞인 하늘 아래에서
너무나도 똑똑해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꽃을 들고서
꽃이 없다고

꽃을 먹으면서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96-97쪽, 무화과)

배꼽에서 탯줄이 자라
엄마에게 닿을 때까지 (104쪽, 축 생일)

궁리 끝에 도달한 결론은 시시했다
떠났다 혹은 흩어졌다, 이 정도로구나
세상의 이쪽에서 어딘가 다른 쪽으로 떠나는 것
유목민이 천막을 걷어 살 곳을 옮겨 가듯이

여기에 사람으로 잠시 머물다 흩어져
저기의 무엇, 무엇, 무엇인가로 가는 것
그리하여 어느 날 어느 때에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 (121쪽, 여명)

지금껏 살던 대로 살아간다 해도
봄은 올 것입니다

인간 없는 봄이

그때
우리의 부재를 슬퍼할 누군가 있을까요? (140쪽, 거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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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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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중략) 우리는 시인에 대한 여하한 신비주의도 품고 있지 않다. 아니, 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시인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면 시인도 함께 소멸된다. (4쪽, 신형철 ‘펴내며‘)

올여름은 생각 속에 내내 잠겨 있었다. 그동안 쓴 시들을 꺼내 읽어보려 했는데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34쪽, 김경인 ‘심심(心心), 심심(深深)‘)

어떤 감정이나 습관은 상황에 관계없이 주기를 갖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 같다. 이러한 감정의 주기성은 단순히 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존재한다. (중략) 그것은 우리가 가진 생의 리토르넬로다. 어떤 선생은 그 음악을 예민하게 들어야 한다고 했고 어떤 선생은 리토르넬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생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했다. (60쪽, 김정진 ‘우리가 사는 음악 속에는‘)

흘러간 시간의 냄새가 났다. 바스러지는 낙엽들. 그리고 가을이다. (중락)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겪는 건 좀 다르다. 그리고 그리다보면 그림이 형성된다. 가을이다. 갈색으로 물든 잔디밭에서 떨어진다. 누군가의 무릎에서 떨어진다. 찬바람이 뺨을 때린다. 해는 저물고 그리고 눈송이가 떨어진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잠깐 춥다. 그리고 떨어진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보면 가을이 간다. 잠깐 왔다가 눈이 온다.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찌는다. 날 선 가을이 찢는다. (98쪽, 서정학 ‘가을‘)

슬픔이 낭떠러지에 선 인간의 등을 떠밀어버리려는 것을 보게 된다면, 쓰고 싶은 시가 좀 달라질 것 같다. (중략) 남의 불행에 대하여 눈부셔하거나 황홀해하다가 눈꺼풀을 닫아버리는 일과, 나의 젊음이 뜨겁거나 아까워서 죽으므이 관념을 가지고 놀아보는 일. 다 지어치울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긋지긋해하지 않고 잘 살 것이다. 얼음을 입에 물고 착실히 굳어가는 겨울의 허벅지처럼. 죽을 만큼 밉다는 말보다 죽을 만큼 슬프다는 말을 진실로 믿으며. 나는 아직 그런 슬픔을 위로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138쪽, 유계영 ‘바라볼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죽고 싶은 것과 사록 싶지 않은 것은 달라요
둘 사이의 공백을 견디는 게 삶이죠
약을 먹으면 인생은 다시 좋아질 케지만
가능성이란
불가능한 광년 너머에나 있는 것
(163쪽, 이용한 ‘불안들‘)

눈꺼풀로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간혹 눈을 감고 본다. 눈꺼풀로 본 것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중략) 내가 눈꺼풀로 본 것은 달무리처럼 모호하고 어렴풋하다. 그것은 분명 과거의 퇴적물이지만 죽은 기억은 아니다. 내 글쓰기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미 오래전 망각되고, 피와 살과 뼈를 이룬 기억이다. (176쪽, 장석주 ‘눈꺼풀로 본 것들‘)

딸 많은 우리 어머니
이 딸에겐 저 딸 얘기
저 딸에겐 이 딸 얘기
점잖으신 우리 어머니도 그러시던걸
이 사람에게 저 사람 흘리고
저 사람에게 이 사람 흘리고
사람이 모지라서 그런 것 아니라네
말이라는 게 원래 정처가 없다네
(중략)
괜찮네 본심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네
우리의 말, 늦가을에 다시 피어나는
봄꽃처럼 얇아서 늘 조마조마하던걸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는 안타까운 주름
그걸로 충분하네 이해가 오고 있네
측은하고 반갑고 또 많이 고맙네
(220쪽, 한영옥 ‘측은하고, 반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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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5 소설 보다
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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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랑 일본 사이엔 과거가 있잖아." 히데오의 이야기는 늘 그렇게 끝났고, 그러면 우리는 연극이나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가 있고 그것은 전혀 청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죄를 히데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30쪽, 히데오)

이제 히데오는 그를 찾는 인터뷰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심각한 이지메를 당했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보낸 학창 시절이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제 더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르곤 한다. (38쪽, 히데오)

나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며 나무며 모든 것이 엄청나게 작게 보였다. 까마득히 높구나. 여기서 떨어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멈출 수 있다면, 당장 지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안 죽어. 안전 바가 있잖아. 안 죽을 거 알면 그냥 재밌는 거지. 몇 번이고 떨어져도 안 죽는다고. (88-89쪽, 두정랜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승주는 늘 결백했다. 무엇에서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속이지 않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요행은 금물. 바라지도 않는 편이 좋다. 오직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승주가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승주는 나를 속이는 길과 속이지 않는 길, 그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명제를 되새겼다. (122-123쪽,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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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 문학동네시인선 2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200
강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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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시는 시의 선택이다. (25쪽, 고영민)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건
무슨뿐일걸요 무슨과 무슨 사이에서 당신은
이제 막 깨어난 거죠 (34쪽, 김근, ‘혼자 있는 사람은‘ 중에서)

사랑의 세계에서는 꼭 무너짐이 무너짐을 뜻하지는 않았다 (48쪽, 김연덕, ‘사랑을 초청하고 밤낮으로 살펴‘ 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68쪽,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서)

시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번역하고 있다는 뜻이자,
그것이 결국 오역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럴듯한 말로 써내려가는 일이다. (121쪽, 이선욱)

시란 무엇인가

버틸 힘을 주고, 버틸 힘을 <버릴> 힘을 주는 것, 살아 있으라고 속삭이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속삭이고, 절망과 슬픔을 정직하게 통과하라고 말해주는 것. (129쪽, 이승희)

시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지만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인 것 같아요. (149쪽, 이은규)

우리는 아주 멀리까지 걸어서 왔는데
달라지지 않는다. 지키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
먼 곳에서도 멀리 있지 못한다. (168쪽, 임솔아, ‘파쇄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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