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 리디아 데이비스 이야기집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에트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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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설

여행길에 챙겨온 이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 어떻게든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몇 번이나 소설로 돌아갔고, 매번 진저리가 났으며, 매번 지난번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제는 오랜 친구 같은 것이 되었다. 내 오랜 친구 나쁜 소설. (38쪽)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

최근 나는 어느 문학상을 받지 못했는데,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여기서 게으르다는 것은 내가 축약형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할 수 없어 그리고 하지 않을 거야(cannot and will not)라고 온전히 쓰지 않고 못해 그리고 안 할 거야(can‘t and won‘t)로 줄여 쓴다는 것이었다. (66쪽)

여자, 서른

여자, 서른은 어린 시절 살던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
왜 집을 떠나야 하지? 이분들은 나의 부모다. 그들은 나를 사랑한다. 내가 왜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말다툼이나 벌일 어떤 남자와 결혼해야 하지?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창문 앞에서 옷 버는 걸 좋아한다. 어떤 남자가 적어도 그녀를 바라보길 소망한다. (85쪽)

이날만은 우리가 행복해야 한다는 걸 나는 안다. 이 얼마나 이상한가. 아주 어릴 때는 보통 행복하고, 적어도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이가 들어 세상을 더 명료하게 보기 시작하면 행복할 일이 별로 없다. 또 사람들을, 가족을 잃기 시작한다. (182쪽, 물개들 중)

그때 언니 목소리는 멀고도 지쳐 보였는데, 말투를 부드럽게 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 후로 우리는 다시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언니 삶에서 밀려났다고 느꼈다. 하지만 당시 언니의 냉정함은 나를 향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의 소리였다.
언니가 죽은 후 나는 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애정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확실히 알고 싶어서 그 일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언니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동생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191쪽, 물개들 중)

두 사람이 죽고 첫 새해는 또 다른 배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들이 살았던 지난해를, 그들이 알았던 한 해를 뒤로하고, 그들이 절대 경험하지 못할 한 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205쪽, 물개들 중)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안다는 것, 어쨌든 뭐라도 안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다. 아니, 어떻게 되든지 죽은 사람은 산 사람에게 그 사실을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기 전까지는 죽은 뒤 어떤 형태로 계속 살아가는지, 혹은 그대로 끝인지 결코 알 수가 없다. (212-213쪽, 물개들 중)

통계학의 한 가지 결과

어린아이처럼
더 양식처럼 사람들은
더 오래 산다. (273쪽)

여자는 초콜릿을 하나 먹어도 괜찮을지, 괜찮다면 초콜릿을 혼자 먹을 분위기나 마음 상태는 어때야 하는지 궁금했다. 화나 울분이나 탐욕 때문에 초콜릿을 먹는 건 옳지 않아 보였고, 그저 쾌락을 향한 욕망이나 행복, 축하의 분위기 속에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탐욕 때문에 혼자 초콜릿을 먹었다 해도 그 초콜릿이 아주 작다면 덜 잘못된 걸까? (321쪽, 작은 초콜릿 상자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글쓰기

인생이 너무 심각해서 글을 계속 쓸 수 없다. 한때 인생은 더 쉬웠고, 종종 즐거웠고, 그래서 글쓰기 역시 심각해 보이기는 했지만 즐거웠다. 지금 인생은 쉽지 않고, 너무 심각해졌으며, 그에 비해 글쓰기가 조금 우습게 보인다. 글쓰기는 종종 현실을 주제로 하지 않는데, 현실을 주제로 글을 쓸 때면 종종 현실에 눌러앉게 된다. 또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해 글을 쓰기도 하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러니 나는 삶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 관해 글을 쓰는 대신 그냥 글쓰기를 중단하고 삶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인생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야 더 똑똑해질 것이다. 대신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다.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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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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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하기 위해 음악을 하는 거라고. 청중 앞에 얼굴을 내비치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지 꽤 됐어. 그리고 드디어 오늘......"
"누가 음악은 행복을 위해 하는 거라고 했나?"
(중략)
"나는 행복하지 않지만 그냥 견디는 거라고." (22쪽, 사후 작품)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데! 이 말을 그들에게 자주 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쑥스러움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39쪽, 유언장)

알았다면, 그때 아버지는 그를 다시 고향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서사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을 제멋대로 보여준 채, 아닌 척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속이려 든다. (49쪽, 손안의 희망)

거 봐? 아무것도 아니잖아. 신의를 저버리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62쪽, 이 분)

책 위에 쌓인 먼지는 불명예와 소홀함의 증거였다. (중략) 이 집에서 책으로 된 벽은 그 끝을 알 수 없었고, 먼지는 먼지의 성질대로 거기에 계속 달라붙었다. (74-75쪽, 먼지)

생각 자체에 실수 같은 건 없어. (143쪽, 고트프리트 하인리히의 꿈)

결과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169쪽, 결과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다른 가족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원치 않는데도 모두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온단 말이지. 그럴 때면 난 북쪽을 바라봐. 마치 가족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얼려 버리기 위해 라플란드나, 필요하면 북극에라도 가 버릴 거라고 운명에게 협박이라도 하듯 말이야. (216쪽, 흔적)

그의 모든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중략) 하루는 페테르에게 질문을 결심하고서는, 페테르 너는 행복하니 물었고 그는 그럼, 당연하지라고 답했으며, 그러자 졸탄은 이 대답이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271-272쪽, 거울여행)

그는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제야 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불운은 하필이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겨울 여행에 당첨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285쪽, 겨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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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속으로 - 더 자세한 쓰기, 사라짐의 쓰기에 대하여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에트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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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독자를 설득해 내가 믿는 무언가를 믿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비록 내가 믿는 것은 아주 아주 많지만 말이다. (23쪽)

나는 이따금씩 내가 본 것을 적었다. 3년이 지나자 그렇게 관찰해 적은 메모가 82개쯤 생겼다. 나는 그것들을 사진과 함께 작은 책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에 포함된 감정에 다양한 형태를 띤 내 즐거움, 내가 암소들과 송아지들의 자세와 행동을 지켜보며 때때로 느꼈던 재미나 공감뿐 아니라 그것들을 관찰한 바를 적고 수고스러운 즐거움, 그리고 세상의 암소 대부분이 바는 취급에 대해 내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도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39쪽)

내가 느낀 흥미를 유지시켜준 건 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내게 중요한 두 가지 요소였다. 그 하나는 책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개성이다. (중략) 다른 한 가지 특징은 글 자체의 문체다. (52쪽)

수레바퀴 제작에 필요한 몇몇 기술과 그 기술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 이후로, 그는 이 특정한 책을 쓰기에 적합한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 어쩌면 거의 유일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지식을 무덤까지 가져가는 대신 알리고 싶어 했다. 누군가 흥미로워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일단 기록하면 그것은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게 될 터였다. 누군가 읽든 읽지 않든 말이다. 그러니 그가 그 책을 쓴 것은 그 지식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거의 확실하게는 쓰는 동안 그것에 감탄하고 이야기하ㅕㅁㄴ서 음미하고 기억하고 다시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61-62쪽)

우리가 글을 쓰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짧고 긴 이야기의 흐름들을 품고 계속된다. 바로 지금도 내 삶에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내가 계속 글을 쓰는 동안 각각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점에 도달한 다음 지나갈 것이다. (중략) 대개는 그렇다. 그리고 내 기쁨의 순간들 역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내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68쪽)

나는 내가 듣게 되는 언어에 마음이 움직이고, 그 언어는 한 편의 이야기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또한 나는 내가 읽는 언어에도 마음이 움직이는데 또 다른 작가가 영리하거나 미묘하게 언어를 다룰 때 그렇다. (93-94쪽)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있고, 그래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와중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글쓰기와 글쓰기의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의 더 많은 뉘앙스를 내가 읽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있을 것이다. (100쪽)

어쩌면 내가 그것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이 하루의 이 순간을 재현해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는 감각으로 인식한 그 현실을 취해 내 뇌를 통해 걸러낸 다음 종이에 옮겨놓고 그것이 거기 붙어있게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내가 이 장면을 혹은 이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내 눈앞의 현재를 나눠 갖기 위해, 눈앞의 현재 속에서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쓴다는 것일지 모른다. (중략) 무언가에 대해 쓰고 싶어 하는 것과 실재로 그것을 쓰는 것은 다르고 때로 그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또 다르며,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보여줄지 역시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119-120쪽)

글쓰기를 가르치던 시절, 나는 학생들에게 예를 들어 이야기를 훌륭하게 끝내는 법을 배우려면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의 훌륭한 결말을 많이 읽고 그 결말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스스로 파악해보라고 말하곤 했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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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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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가장 진심을 담으면 쓰는 사람은 쓰면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소중하고 중요한 어떤 것을 자유롭게 쓰고 있다면 글쓰기 작업에 반드시 수반되는 물리적 가혹함을 전혀 낼 수 없다. 간절히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가장 정직하게 써 나갈 때 나는 보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어간다. (17-18쪽)

진짜로 간절하게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내게 재능이 있을까?‘라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정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재능이 밖으로 흘러넘쳤을 테고, 대부분 고만고만한 우리에게 재능은 있고 없고의 문제라기보다, 여러 가지 행동과 실천의 ‘결과‘로서 어쩌면 중간부터 드러나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저 너무 쓰고 싶으니까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목표 지점의 성취나 인정을 바라기보다 글쓰기 작업 자체를 일단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60-61쪽)

수정을 좀 더 편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수정이 어려운 것은 내가 쓴 것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정은 나의 부족함을 정면으로 보는 일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과 그에 따른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138쪽)

내게도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나니 심한 편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만약 그 작품이 어떤 절대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작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176쪽)

현실에서는 책만 쓰며 먹고살수 없다. 대체 언제까지 청탁 원고나 강연, 글쓰기 수업 같은 숱한 ‘다른 일들‘을 해치우면서 동시에 시간을 쪼개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장담도 못한다. 책만 써서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쳐도 그 감사한 상황이 지속될지는 미지수이다. 전망은 대개 비관적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쳐내야 하는 현실을 겪다 보면 문학을 사랑하기엔 때로는 너무나 지쳐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4쪽)

하나의 특성을 두고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한다. 이거싱 바로 이토록 다채로운 개성의 작가들이 공존하며 저마다의 독자들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중략) 그러나 그책을 사지 않았다고 해서 독자가 그대로 바로 빠져나간 것도 아니다. 그들은 사라져 있다가 다음 책의 소재가 마음에 들면 다시 독자로 돌아온다.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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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인가요?
존 버거 지음, 마리아 나도티 엮음, 셀축 데미렐 그림,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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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책을 쓰고 싶어진다
오롯이 시간에 관한 책을
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지,
왜 과거와 미래가
끊임없는 하나의 현재인지에 관한 책을.
모든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았던 사람은
그리고 앞으로 살 사람은, 지금을 살고 있다. (8쪽)

우리는 정치적 실행이란 것이 종종 베틀처럼 예상한 것과 예상치 못한 것 사이를 오가며 두 방향으로 베를 짠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20쪽)

자본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도록 강제되듯이, 끝없는 기대의 문화인 자본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얻을 것‘이 ‘지금의 것‘을 비운다. (38쪽)

순간의 경험이 깊을수록 더 많은 경험이 축적된다. 순간이 그처럼 오래 살아남는 이유가 그래서다. 흐르는 시간의 소멸이 저지된다. 살아낸 시간의 총량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나 밀도의 문제다. (60쪽)

기억의 수명에 비하면 어떤 생도 기이할 만큼 짧다.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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