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접한 세계 크로스 1
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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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중략) 그때 큰 집이 조금만 도와줬더라도 자신은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말이었지요. (중략) 아버지는 서울에 남았다면 자신이 기자가 됐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서울 아저씨는 아버지가 가보지 못한 미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35쪽)

제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쉰 살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열네 살의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우리는 이 세계를, 시간을, 삶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시간과 공간 속에서 깨어 있는 채로 경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눈을 감고 잠든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60쪽)

나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보이지 않던 것을 보려는 건가. 이미 보이던 것에 집착하려는 건가. 하지만 기억 속 필름에 확실히 정착된 건 없었고, 필름도 없는 채 알아채지 못했던 무언가를 의식에 현상하려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110쪽)

왜 그때 그 상자를 열었을까.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온다. 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세계가 어딘가에 있다면 지금 이 세계의 나를 잃더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피해자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전시회 성공을 기뻐하는 나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나도,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 문제는 미래 세대와도 공유해야 한다. (167-168쪽)

제(김연수) 소설에도 어떤 시점이 있다면 저는 ‘미래적 시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과거의 일을 서술할 때 그 뒤의 미래까지도 다 알고 있다면 이미 기록된 과거는 수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래는 끊임없이 갱신되니 과거 역시 끊임없이 수정될 것입니다. 무한한 글쓰기가 가능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략) 무한한 버전의 과거는 무한한 버전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미래만 가진 사람에게는 결단의 행위가 없을 것입니다. (중략) 무한한 버전의 미래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200-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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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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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11쪽)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38쪽)

저녁의 소묘 2


목과 어깨 사이에
얼음이 있다.

그게 부서지는 걸 지켜보고 있다.

이제는
더 어둡다

손끝으로 더듬어 문을 찾는 사람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알지 못한다

그가
나가려는 것인지
(어디로) 들어가려는 것인지 (64쪽)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80쪽)

겨울 저편의 겨울 2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중략)

숙제를 풀지 못하기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때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중략)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97-99쪽)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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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가난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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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그 완벽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난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했다. (중략) 성서가 끈질기게 말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넉넉함‘이다. 모든 이의 필요를 채우기에는 넉넉하지만, 모든 이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넉넉하지 않다. (10쪽)

(왕상 21:19) 예언자가 사용한 두 동사는 서로 잘 들어맞는다. ‘죽이다‘와 ‘차지하다‘, 차지해야 한다면 죽여라! ‘탈취‘에 관한 본문 전승이 교회와 회당에 전해 내려왔고, 지금은 교회에 맡겨져 있다. 교회는 경제 문제를 회피하면서 결국 이런 본문 전승을 체계적으로 무시해 왔으며, 이는 가시 교회가 그런 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우리는 교회에서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어떻게 탈취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48쪽)

사유화 그리고 공동선을 이루어 할 영역에 부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는, 이스라엘 예언자 전승의 주요 주제이며, 특히 고발과 판결이 등장하는 ‘소송‘이라는 수사적 도구를 통해 표현된다. (중략) 호세아 4장 1-3절이 제시하는 예언자의 ‘소송‘ 모델은 두드러지게 간결하고 명쾌하다. (중략)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성실함과 연대(solidarity)가 없음을 한탄하다. (96-97쪽)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안에 있을 사람과 밖으로 몰아낼 사람, 삶에서 가치 있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와 그럴 자격이 없는 자를 가려내고자 ‘정결함과 부정함‘(clean and unclean)에 관한 규칙과 범주를 만들어냈다. (중략) 배제와 반대로 이스라엘의 고대 언약과 예수 운동이 강조한 것은 포용이다. 즉 예수는 나병 환자, 여성, 외인, 이방인은 물론, ‘부정한‘ 자와 관련된 모든 사회 장벽을 무너뜨리셨다. (129-131쪽)

(막 10:17-31) 그는 가진 것이 많았다. 권력과 풍요와 안전의 정점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처럼 그도 가진 것이 많았다. 이 사람은, 복음이 제시하는 대안 사회, 시내에서 이미 시작된 대안 사회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 가장 좋게 여기는 꿈과 모순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어려운 선택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 모순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예수는 철저히 상반되는 이것 아니면 저것을 이 사람 앞에 제시하신다. (중략) 예수가 시작하신 새로운 세상도 이웃 사랑에 기초한 참여와 연대와 변화를 꿈꾸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144-145쪽)

탐냄은 이웃의 본분을 어기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부적절한 욕망의 감춰진 힘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욕망이 실제로 세상에서 드러내는 탐욕을 선뜻 함께 연결한다. 데즈먼드는 가난을 가리켜, 힘과 특권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전체 공동체에 속해야 할 자원을 그들 자신을 위해 비죽하는 탐욕의 파괴적 힘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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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하다 앤솔러지 5
김경욱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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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미래의 감옥.
오래동안 충분한 고통을 겪은 자만이 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 마주하기 두려운 무언가를 용기 내어 끌어안을 때 시간의 문은 열리나니. 남겨진 자들이 두려움을 놓아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순간 비로소 그는 미래로 돌아갈 수 있다. (40쪽,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질)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는 똑똑하든 멍청하든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괴롭게 만들었다. 일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신정윤이 보기에는 이 회사의 모든 것이 어이없고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결국 돈도 일도 모두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었다. (57쪽, 가짜 생일 파티)

위엄을 잃지 않은 뒷모습.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이 그뿐이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이날까지 나를 살아남게 한 중요한 직관이다. 나는 그것에 한없이 집중하여 사무실의 문을 닫은 뒤에도 꼿꼿한 뒷모습의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왕처럼 당당하게 그 의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은 무너지지 않은 뒷모습, 그것만이 중요했다. (77쪽, 가짜 생일 파티)

우리 목사님이 그러더군. 그 말 하나는 참 맘에 드는데 좀 어려운 말이지만 마음을 재지 말래. 발이 먼저 나서면 마음이 따라온다는 거야. 그걸 유식하게 삶의 형식이라고 하더구먼. 지나가야 할 자리는 그냥 지나가는 거야. (110쪽, 히치하이킹)

그들이 어떻게 재회할지 궁금했다. 허방 같은 긴 시간을 두고 헤어진 연인들이 이제 어떻게 만나는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실망했다. 지영은 영호를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자신이 영호에게 애틋한 추억으로 남을 수 없다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내가 지나치게 큰 욕심을 가졌던 걸까. 그녀는 자책했다. 어쩌면 나를 용서하고 잊어 달라는 말은 실상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오래 기억해 달라는 말이 아닐까. (116쪽, 히치하이킹)

우리는 자리에 선 채로 노을을 바라보다가, 이내 왔던 길을 되짚어 묵묵히 걸었다. 저물어 가는 빛 속에서 우연히 평점 4.9의 식당을 발견하게 되면 좋을 것이다. 인생에는 드물게 그런 행운이 있으니까. 발견하지 못해도 또 다른 곳이 있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148쪽, 다시 한번)

엄마들은 자신이 노인이라는 걸 언제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글쎄. 난 이제 물어볼 수도 없고. 아마도 그냥 우리처럼 잘 몰라서 혼란스러워하지들 않으셨을까. 우리는 우리가 중년이 됐다고 인정하지만 그게 실은 어떤 건지, 거기에 뭐가 필요한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186-187쪽, 그녀들)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야기들은. 언젠가는 말할 수 었는 이야기도 있다. 서로에게 아직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고 어쩌면 앞으로 더 생길지 몰랐다. (중략) 어쩌면, 서로를 이해해서 멀어질 때도 있을 거야.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선배는 여기 온 것 같았다. (190쪽,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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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생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62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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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결국 우물에 포섭되고 만다네. (12쪽, 폴짝인입니까?)

법의 언어가 아니라
경전의 언어가 아니라
숫자의 언어가 아니라
신화의 언어가 아니라
고유명사를 찬미하는 송가가 아니라
보통명사 하나하나를 고유한 세계로 맞이하려는 태도,
그 따스한 흔들림으로부터

이곳의 정의는 (평평으로)

(중략)

이곳의 민주주의는 (평평으로) (39족, 한 마을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

발 딛고 선 이곳이 운명이라는 건
어디서든 의지로 나를 지킨다는 건

당신이 내 운명이라는 건
내 의지로 당신을 지킨다는 것

그러므로 운명은 없다는 것 (73쪽, 벼랑 끝 나무로부터 배운 운명은)

꽃을 먹으면서
내가 먹는 것이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말과
돌과
금과
총알과
포탄이
뒤섞인 하늘 아래에서
너무나도 똑똑해진 사람들이 살아간다

꽃을 들고서
꽃이 없다고

꽃을 먹으면서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96-97쪽, 무화과)

배꼽에서 탯줄이 자라
엄마에게 닿을 때까지 (104쪽, 축 생일)

궁리 끝에 도달한 결론은 시시했다
떠났다 혹은 흩어졌다, 이 정도로구나
세상의 이쪽에서 어딘가 다른 쪽으로 떠나는 것
유목민이 천막을 걷어 살 곳을 옮겨 가듯이

여기에 사람으로 잠시 머물다 흩어져
저기의 무엇, 무엇, 무엇인가로 가는 것
그리하여 어느 날 어느 때에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 (121쪽, 여명)

지금껏 살던 대로 살아간다 해도
봄은 올 것입니다

인간 없는 봄이

그때
우리의 부재를 슬퍼할 누군가 있을까요? (140쪽, 거대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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