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15, 17, 20쪽)
역사는 이미 인정이 된 후에도 영원히 반동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견딤, 역사를 마주한 결과로 생겨난 견딤, 역사의 반동성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속성을 보장하는 견딤. 지나간 무엇과 다가올 무엇에 대한 소속감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해 주는 점이다. 하지만 역사를 마주한다는 것은 비극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해 버리게 하는 이유이다. 스스로 역사에 동참하겠따는 결심은, 설령 그 결심이 절박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희망이다. (49-50쪽)
운명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을까. 운명에 종종 기하학 단위 같은 규칙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표현할 명사는 없다. 드로잉 한 점이 명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중략) 어떤 이미지가 더 많은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자주 생생해진다. (71쪽)
노인이 되어 가는 동안, 어떻게 그림들은 그렇게 아름답게 남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 그림들은 왜 바뀌지 않는 걸까. 너무 근사한 마돈나의 얼굴은 왜 나이를 먹지 않은 걸까. 왜 그 눈은 그동안 흘린 눈물로 멀어 버리지 않은 걸까. 어쩌면 그 불멸성-영원성-은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식으로 예술은 자신을 낳은 인간들을 배신하는 것일까. (82쪽)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은 만남의 장소로 꽤 특별하다. 전시관이 마치 거리 같다. 산 자(관람객들)와 죽은 자(그림 속의 인물들)로 북적대는 거리. 하지만 죽은 자들도 떠나지 않았다. 그 인물들이 그려질 당시의 ‘현재‘, 화가들이 만들어낸 현재가 마치 그들이 직접 살았던 그 순간의 현재만큼이나 생생하고, 인적이 느껴진다. 가끔 더 생생한 경우도 있다. (99족)
만약 인간에게 있는 침묵할 수 있는 역량이 말할 수 있는 역량과 동등하다면, 분명히 인간의 삶은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 (117쪽)
인간 신체는 매우 많은 수의(상이한 본성을 지닌) 개체들로 합성되어 있으며, 이 개체들 각자는 매우 복합적이다. (중략) 인간 신체를 합성하는 개체들, 따라서 인간 신체 그 자체는 매우 많은 방식으로 외부 물체들에 의해 변용된다. (중략) 인간 신체는 외부 물체들을 매우 많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이것들은 매우 많은 방식으로 배치할 수 있다. 인간 정신은 매우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신체가 좀 더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게 됨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다. (147쪽)
드로잉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실천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서 발생하는 다른 지향의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드로잉을 할 때 나는, (중략) 대상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을 받는다. (중략) 드로잉은 무언가를 꼼꼼히 살피는 형식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려는 본능적인 충동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욕구, 점을 찍으려는 욕구, 사물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딘가에 위치시키려는 욕구에서 나온다. (중략) 모든 드로잉은 각자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독창적인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매번 드로잉을 시작할 때마다, 우리는 그때만의 서로 다른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번 드로잉은 예측할 수 없는 그때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실패한다. 그럼에도 모든 드로잉은 비슷한 상상력의 작동으로 시작된다. (중략) 바로 그 상상력의 작동-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많은 것들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것을, 나는 정의 내리고 묘사해 보고 싶은 것이다. (155-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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