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시인선 27
안상학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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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쳤다고, 오를 일만 남았다고 발을 굴렀을 때 허방처럼 빠져드는 그런 바닥은 대체 뭐라 이름 불러야 할까요. 아침이 오고 있다는, 봄이 오고 있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의 타이밍은 어느 페이지에 끼워 넣어야 적절할까요. 동강난 동맥을 이어붙인다고 기도에서 호흡이 재생될까요. (11쪽, ‘바닥행‘ 중)

거꾸로 쓰는 글씨는 쓸 때는 그것이 바른 것이지만 감상할 때는 거꾸로 놓고 봐야 바른 것이 되는, 글씨를 쓰는 자신을 글씨를 보는 자신이 들여다보게 되는. (33쪽, ‘좌수 박창섭‘ 중)

꽃이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듯이
좀 길기는 하지만 우리 사랑도 간헐적으로
이 세상에 다녀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36쪽, ‘간헐한 사랑‘ 중)

고비에서는
길을 모르는 양은 길을 잃지도 잃을 길도 없었네
오직 길을 아는 인간만이 길을 잃고 헤매던 날이 있었네. (51쪽, ‘착시‘ 중)

마음을 가두어 놓고 살아야 한다.
내 몸은 내 몸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없으니
내 몸은 내 몸을 품어 줄 수도 없으니
몸속 가장 먼 마음에라도 기대며 살아야 한다
그래도 마음이 몸과 한통속일 때 가장 자유로운 법 (95쪽, ‘마음의 방향‘ 중)

가고 싶은 곳에 앞장서 가는 발을 따라나서리라
머물고 싶은 곳에 발과 함께 머물리라 마음먹어 본다
발이 머리가 되고 머리가 발이 되어 생각해 본다
머리가 발 같고 발이 머리같이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 (105쪽, ‘발에게 베개를‘ 중)

봄소식

꽃 그림 한 점 보냅니다
나비는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계실 당신이 있으니까요
벌써 향기를 맡고 계시는군요
한 폭의 그림입니다

다만 그 봄날 함께할 수 없어서 서러울 따름입니다 (112쪽, ‘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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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 - 한 권의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파는 사람들은 어떻게 움직일까?
박혜진 외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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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간의 도구만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사유 그 자체이기도 해서 어떤 유행보다 더 빨리 소모되고 교체된다. 그럼에도 기어코 소모되거나 교체되지 않는 작가를 우리는 문호라 부른다. (12쪽)

원문에 대한 집착에이라는 함정에 빠지려 할 때면 문득 편집자의 감각이 깨어난다. 원어를 그대로 옮기려는 번역자로서의 나와, 좀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우리말 읽듯 번역서를 읽고 싶어 하는 독자 사이 어디쯤에서 말이다. (39쪽)

좋은 글이란 빼어난 글솜씨로 쓰인 문장들의 묶음이 아니라 정돈된 사유를 탁월하게 표현한 글이고, 좋은 책이란 존재 이유가 명확한 책이다. (46쪽)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책임을 자질로 거론할 수 있는 드문 직업이 편집자다. 한편 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눈에 비치는 현실이 폐허라면, 그것을 냉철히 응시하고 묘사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의무와 편집자의 의무가 다르지 않다. (52쪽)

결국 책을 통해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 삶을 바꿀 이야기와 만난다는 것은 감이 감나무에서 떨어지길 기다리기보다 훈련을 거쳐 인생 문장과 의미를 찾아 나서는 행위에 가깝다는 메시지다. (76쪽)

널리 읽히고 많이 팔린다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며 좋은 책이라도 안 읽히고 안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내가 참여한 책은 내재적 가치는 물론이고 대중적 호응도 뛰어나기를 바라는 욕심이 생겼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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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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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는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그리고 잡균 섞인 절망보다는 언제나 순도 높은 희망을 산다. 생각해보면, 우우, 지겹고 지겹다. 눈 가리고 절망하기, 눈 가리고 희망하기. 아옹! 아옹! (1981)(22쪽)

존 스타인벡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떠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부터 떠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그것이 특히 정신적 현실로부터 떠나는 것일 때에는, 몹시 어렵다. 왜 떠난다는 것은 그처럼 어려운 일일까? 글쎄, 시인 이성복의 시([다시 정든 유곽에서])를 인용하자면, ‘철들면서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 마음은 변 본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84)(58쪽)

인간은 강하되, 그러나 그 삶을 아주 떠나지는 못하고, 아주 떠나지는 못한 채, 그러나 수시로 떠나 수시로 되돌아오는 것일진대,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은가 한 번 물으면 어느새 비가 내리고, 그 삶을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였는가 두 번 물으면 어느새 눈이 내리고, 그사이로 빠르게 혹은 느릿느릿 캘린더가 한 장씩 넘어가버리고, 그 지나간 괴로움의 혹은 무기력의 세월 위에 작은 조각배 하나 띄어놓고 보면, 사랑인가, 작은 회한들인가, 벌써 잎 다 떨어진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한 해가 이제 그 싸늘한 마지막 작별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1984)(59-60쪽)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죽음을 보고 겪게 되고, 그리고 그때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점검하게 된다. 나 역시 앞으로 더 많은 죽음을 보면서 나 자신의 삶을 수시로 되돌아보게 되리라. 마침내 내가 나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될 때까지. (1986)(96쪽)

앞서 나는 1980년대는(그리고 1970년대는) 내게 가위눌림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가위눌림을 어떻게 구체화시켰는가?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자신이 그것을 구체화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나는 그 가위눌림에 대하여 시적 저항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저항은 강한 비명과 비탄, 과격한 에너지를 가진 어휘들과 이미지들의 사용 등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앞서 나 자신이 의식보다는 무의식,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많이 기대어 왔다고 고백한 것은. 나를 짓누르는 그 가위눌림에 관하여 그것의 실체나 구조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거나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지 못한 채, 무섭다고 싫다고 비명을 지르기만 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89)(140쪽)

내 병의 정식 이름은 정신분열증이다. 거진 다 나았어도 아직은 약을 먹어야 한다. 12년째 정신분열증과 싸우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다. (중략) 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것은 한 5년. 퇴원하여 두세 달 후에 보면 약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있는 꼴을 보게 된다. (중략) 이 짓을 최근 몇 년간 되풀이하고 있다.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2010)(172-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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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부엌 - 삶의 허기를 채우는 평범한 식탁 위 따뜻한 심리학
고명한 지음 / 세이지(世利知)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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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이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모와 도 사이에는 둘을 이어줄 개와 걸, 윷이 필요하고 흑과 백 사이에는 다양한 색들이 존재한다. 슬픔과 기쁨은 분열되어 대치 상태에 놓인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 슬픔에 빠졌을 때는 훌훌 털고 일어날 힘과 희망을 주는 긍정적 감정이 필요하다. 주체하기 힘들 만큼 기쁠 때도 자칫 판단력을 잃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추스르고 누그러뜨릴 수 있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25쪽)

우리는 나의 선택이 스스로의 이성과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무의식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행위다. 어떻게든 그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선택을 아쉬워하는 후회는 감정 소모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후회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두 배로 불행하고 두 배로 무능하다"라고 말했다. (108쪽)

삶은 수많은 변수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을 변칙이 아닌 지극히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풀어내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깨우친 것은 나이 들어가며 얻은 큰 수확이다. (126쪽)

그럼에도 과거와 미래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삶의 연장선에서 너무도 중요한 시간이다. 나는 과거에 엄마의 집밥을 먹으며 성장했고, 앞으로 남은 깃털처럼 많은 날 동안 수많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의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것은 이 순간 내 입과 혀로 온전히 느끼며 경험하는 현재의 음식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 정성 들여 차린 밥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187쪽)

"나는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것을 초탈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생각지 못한 일을 겪고 나니 별일 없이 무탈하게 반복되는 평범하고 고요한 일상에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행복한 그 일상에 파묻혀 한껏 즐기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완전히 고유한 ‘나다움‘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초탈의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선을 긋고,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 또는 삶‘이라 거부하던 모든 것들과 마주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서서히 나에게 스며드는 것이었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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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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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혼자 있을 때면 그들은 결코 그녀가 흑인이라는 어렴풋한 의심마저도 품지 않는 듯했다. 그래, 저기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라고 그걸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린은 분노와 경멸, 그리고 두려움이 차례로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흑인 것이나, 심지어 그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장소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것이 드레이튼 측에서 취하리라 예상되는, 제아무리 정중하고 세련된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랬다. (23쪽)

선택의 시점에 클레어가 자신이 치러야만 할 대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해도, 이제 와서 다른 사람들이 그 빚을 청산해주리라 기대할 권리는 없었다. 클레어의 문제는 자기 케이크를 차지하고 먹겠다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케이크에까지 손을 댄다는 데 있었다. (70쪽)

그래, 삶은 전과 똑같이 계속되었다. 달리진 것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우연히 마주한 사실이 그녀를 바꿔놓았다. 오랫동안 희미한 그림자들로 가득하던 어두운 방에 성냥불이 켜지며 끔찍한 형체들을 낱낱이 보여준 듯했다. (123쪽)

아이린의 몸과 마음에서 피곤함이 점차 사라졌다. 브라인언. 이건 무슨 의미지? 그녀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까? 아이들!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절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이 뒤따랐다. 실제로, 그녀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저 아이들의 엄마일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못한 장애물이었다. 그녀 안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127쪽)

그는 그들을 밀쳐내고 거실로 들어가 클레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두가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조금 뒷걸음질치며 그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러니까 네가 깜둥이란 말이지, 빌어먹을 더러운 깜둥이!" 으르렁거리며 신음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고통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남자들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펠리스가 그들과 벨루 사이에 끼어들어 재빠르게 말했다. "조심해요. 당신은 여기서 유일한 백인이에요."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말한 내용 못지않은 경고였다. (15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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