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의 일 - 작은도서관의 광활한 우주를 탐험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안내서
양지윤 지음 / 책과이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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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숱한 사계절을 지나다 보면 유독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되는 시절이 있다. 특정 장면만 오려서 모아놓은 스크랩북처럼 강렬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억 속에 수집되는 것이다. 어릴 적 이웃집 텃밭에서 서리한 무를 덥석 깨물었을 때 입안에 번지던 흙의 향이라든가, 들판에 앉아 쑥을 캘 때 내 코를 간질이던 강아지풀의 촉감 같은 것들. 기억이 만들어내는 스크랩북은 오감을 가리지 않는 까닭에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스크랩한 기억을 꺼내 펼쳐보고 싶어진다. (91쪽)

구매욕을 자극하는 책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고 내게 허락된 공간은 한정된 현실 속에서, 나 같은 츤도쿠(책을 사서 쟁여두고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작은도서관은 소장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직장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133쪽)

산다는 것은 각자 살아온 시간만큼의 이야기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이다. 평소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불쑥 그 이야기들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떤 이에겐 음악으로, 또 어떤 이에겐 그림으로, 종종 누군가에겐 말로써. 그리고 내겐 글을 쓸 때 그 순간이 찾아온다. (209쪽)

살아갈수록 ‘갓김치‘ 같은 것들이 늘어간다. 꽤 좋아하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드러내기 망설여지는 것들이. 그것은 특정 사물일 때도 있고 독특한 취향이거나 내 생각이 담긴 글일 때도 있다. 그리고 점점 이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날로 강해진다. 집에서만 먹던 갓김치를 당당히 바깥에서도 꺼내서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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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기억 - 유성호 산문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유성호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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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생의 가치는 이처럼 ‘추억‘의 부피만큼만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누구라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명료한 척도로 계측할 수 있겟는가. 다만 자신의 시간 속에서 길어올린 ‘추억‘이 불러주는 꿈을 통해 이 불모의 결핍의 생을 견뎌가는 힘에서 생은 갈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의 가치는, 분주한 일상이나 만나는 사람들의 머릿수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추억 속에 살아 움직이는 ‘흔적‘의 활력과 온기에서 입증된다. (23쪽)

나는 근대문학의 속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를 ‘기억‘으로 보고, 그 ‘기억‘이 고고학자의 시선처럼 현재의 지층 속에 화석의 형식으로나 있을 법한 오래된 질서들을 발견하고 재현하는 어떤 힘임을 발견하고 있다. 특별히 그것을 근대문학을 통해 발견하면서, 형이상학적 중심의 부재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의 척박함과 가벼움을 극복해가는 기율과 비의가 그 안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작가나 시인들에 대한 ‘기억‘에 정사와 야사가 따로 있을 리 없지 않은가. (84쪽)

문학은 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이를 접하고 누리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게끔 하는 문화예술의 한 영역이다. 그 점에서 아무리 영상매체가 주도적인 예술로 자리잡아간다고 해도, 문학을 통해 경험과 생각을 계발해가는 과정은 전혀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문학은 인간이 깊이 생각하고 사물을 인식하는 데 더없이 필요하며, 언어를 통해 감동과 사상을 키우는 데 변함없는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122쪽)

미당(서정주)은 일그러진 역사에 참여했던 자신의 한때를 시대의 압력에 순응한 결과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어쪄면 그가 시를 쓰면서 정말 중요했던 건, 역사나 독립 같은 것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건 오히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요, 그후에 찾아오는 근원적 초월과 달관의 직관적 순간을 아름다운 언어로 잡아채는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그가 꿈꾸는, 그리고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시‘였다. (184쪽)

따라서 종교는 그 성격상 인간의 자기 인식 및 자기 성찰과 떼어질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 삶이 이성적 합리주의와 영적 초월이라는 두 경계선을 부단히 오가야만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종교적 인식에 토대를 두고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포함한 인간의 역사와 현실에 관심을 투사하는 일과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궁극적 실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의 양 측면을 아울러 이름하는 것이다.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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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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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다. 생활 패턴, 식성, 취향,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한 정도, 여행 방식, 하물며 성적 기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나중에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지?‘로 변해갔지만. (8쪽)

하지만 결혼한 상태에서 이별은 훨씬 더 어렵다. 이따금 결혼 후 몇 년이 지난 여자들에게서 ‘남편을 봐도 더 이상 설레지 않아요‘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서로 매일 얼굴 보며 사는 부부 사이에 설렘이 없어지는 건 아마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네가 설레지 않는 것처럼, 남편도 너를 보며 설레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나는 다정하게 알려준다. (77쪽)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지만 성은 상대에게 ‘주는‘것이 아니라 ‘빼앗는‘것이다. 서로 허락한 상대라면, 그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내 몸을 기쁘게 해버리고 말겠다, 정도의 이기심과 기세가 넘쳐야 성관계가 자유롭고 즐겁다. 단, 그 전제는 두 사람 다 똑같이 제대로 못되게 굴어야 즐겁고 창의적일 것아른 것(한 사람은 이타적인데 다른 한 사람이 이기적이면 착취가 된다). 어설픈 배려와 무지로 자체 검열을 하게 되면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하거나 상대에게 요구할 때 심리적으로 부대끼게 된다. 자신의 몸과 기분을 우선시하면서 좋아하는 사람과 팽팽하게 맞설 때, 연체료가 붙지 않는 일시불처럼 비로소 우리 몸은 가뿐하게 날아간다. (99쪽)

그는 직감적으로 아는 듯하다. 수가 틀리면 언제든 내가 자신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내가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그렇게 했던 것을 몇 번 옆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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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
김원희 지음 / 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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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몰랐던 세상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내가 살아온 세상과 내가 지나온 시간을 보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25쪽)

누구나 좋다고 하는 곳을 누구나 다 좋아할 수는 없는 것. 그래서 여행의 색깔은 다채롭다. 우리는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을 본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운 장소도 정말 많을 텐데, 그곳에 가본 사람이 없기에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81쪽)

이제 노년은 누구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이제는 자녀에게, 세상에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시대가 아니다. 다리가 아파도 묵묵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149쪽)

나이가 들면 사랑을 무색하게 만든다. 누군가가 나이든 누군가에게 잘 대해준다는 것은 사랑이라 말하기보다, 애긍*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설령 누군가가 나이든 그대를 모른 척하거나 적대시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그것은 그가 그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늙음, 그 육신의 추레함이 싫을 뿐이니까. (156쪽)

*애긍: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다.

그래서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 책 속의 작은 공간 하나, 책 속에 묘사된 그곳의 하늘과 땅, 식당, 기차역, 사람들, 은밀한 사랑과 모험, 그곳은 어떨까? 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그곳을 동경하고 그곳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어느 시간 그곳에 내가 있을 때의 환희.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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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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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버스가 출발한 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얼마나 더 서 있었을지를. 나를 태운 버스가 사라진 후의 어두운 신작로를 아버지는 무슨 마음으로 내다보았을지를. 아버지가 얼마 후에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지를. (17쪽)

아버지는 어느날의 바람 소리, 어느날의 전쟁, 어느날의 날아가는 새, 어느날으 폭설, 어느날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로 겨우 메워져 덩어리진 익명의 존재, 어버지 내면에 억눌려 있는 표현되지 못하고 문드러져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76쪽)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를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126쪽)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데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간혹 조부를 원망하며 학교에나 보내주실 일이지, 했던 혼잣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197쪽)

내가 웃으니 아버지가 재밌냐? 물었다. 내가 고갤 끄덕이자 아버지는 바로 그거라고 했다.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재밌게 여기면 금방 탈 수 있다고 했다. 넘어지려고 해도 뒤에서 아버지가 꽉 붙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228쪽)

다 지나간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업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뿐이다. (231쪽)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12쪽)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띁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 자네 아버지는 자네 옆에 그저 있어주고라도 싶은데 자네가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며 고통스러워했네. 자네가 죽은 사람처럼 기척이 없다고 애태웠지. (323쪽)

인간이든 동물이든 죽은 다음엔 짓무르고 분해되는 육체만 남을 뿐이지. 나는 평생 그 잊을 수 없는 냄새에 시달리며 살고 있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내 뒤를, 내 곁을 따라다니는 그 지긋지긋한 냄새...... 그러니 저 가엾은 생명을 묻어주고 가게나. (324쪽)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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