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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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버스가 출발한 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얼마나 더 서 있었을지를. 나를 태운 버스가 사라진 후의 어두운 신작로를 아버지는 무슨 마음으로 내다보았을지를. 아버지가 얼마 후에나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을지를. (17쪽)

아버지는 어느날의 바람 소리, 어느날의 전쟁, 어느날의 날아가는 새, 어느날으 폭설, 어느날의 살아봐야겠다는 의지,로 겨우 메워져 덩어리진 익명의 존재, 어버지 내면에 억눌려 있는 표현되지 못하고 문드러져 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 (76쪽)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를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126쪽)

나는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데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간혹 조부를 원망하며 학교에나 보내주실 일이지, 했던 혼잣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197쪽)

내가 웃으니 아버지가 재밌냐? 물었다. 내가 고갤 끄덕이자 아버지는 바로 그거라고 했다.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재밌게 여기면 금방 탈 수 있다고 했다. 넘어지려고 해도 뒤에서 아버지가 꽉 붙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228쪽)

다 지나간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업다. 하늘 아래 니가 건강하면 그뿐이다. (231쪽)

세상의 기준은 이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소. 필요에 따라 변화하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러니 신념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12쪽)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띁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 자네 아버지는 자네 옆에 그저 있어주고라도 싶은데 자네가 옆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며 고통스러워했네. 자네가 죽은 사람처럼 기척이 없다고 애태웠지. (323쪽)

인간이든 동물이든 죽은 다음엔 짓무르고 분해되는 육체만 남을 뿐이지. 나는 평생 그 잊을 수 없는 냄새에 시달리며 살고 있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내 뒤를, 내 곁을 따라다니는 그 지긋지긋한 냄새...... 그러니 저 가엾은 생명을 묻어주고 가게나. (324쪽)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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