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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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몸과 마음은 터무니없이 격렬해서, 마치 과속하는 자동차처럼 아주 짧은 시간에도 치명적인 접촉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그런 접촉 사고들로 그녀의 마음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더 다칠 자리가 없을 정도로 상처 입었었다. 삶이 자신을 시멘트 바닥에 대고 철썩철썩 패대기치는 것 같았다. 아픈 촉각보다 힘겨웠던 것은 제 귀로 들어야 했던 그 명백한 고통의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25쪽)

40년이라는 것, 1억 5,600만 년에 비하면 먼지 같은 세월이야, 하는 말을 그는 하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이곳은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들을 만나기에 정말 좋은 장소이기는 할 것 같았다. 또 그녀는 생각했다. 왜 그를 만나야 하는 걸까, 이 만남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그걸 묻고 그가 대답할까? 그렇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다 그녀는 깨달았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61쪽)

가난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다. 선택이던 것이 필수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품질이 많이 좋고 가격이 약간 비싼 것보다 품질이 많이 떨어져도 값이 약간 싼 물건들을 고르는 것, 돈이 생기는 일이면 그게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 (116쪽)

돌아보면 시간은 언제나 두껍게 얼어버린 빙하 같았다. 좀처럼 쪼개지지 않아 틈을 낼 수 없었으나 돌아보면 한 세기처럼 거대한 단위로 훌쩍 흘러갔다. 어린 그녀들은 이제 중년을 훌쩍 넘었고 그 시간의 긴 바다를 건너 맨해튼 한복판에서 만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198-199쪽)

그런데 안개를 뚫고 떠오르는 것은 그때 썼던 편지의 구절이 아니라 편지를 쓰던 자신이었다. 배가 고팠던 밤. 바람이 거셌던 길고 긴 서베를린의 밤들. 결국 추억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를 대했던 자기 자신의 옛 자세를 반추하는 것일까. (208쪽)

육체는 40년이 지나도 그 기억을 지우지 않았고 마치 모든 것이 폐허로 돌아간 듯한 이 지하의 공간에서 그 기억을 그녀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229쪽)

"많이도 미워하고 많이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이만큼 살고 죽음이 더는 두렵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날씨가 춥죠? 하고 인사하고...... 살아보니 이 두마디 외에 뭐가 더 필요할까 싶다. 살아보니 이게 다인 것 같아, 미호야." (251쪽)

작년에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 갔을 때 버질의 시를 봤지요.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노데이, 쉘, 이라고 그가 영어 구절을 외울 때, shall, 쉘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어린 시절 영어시간에 배웠던 단어, 그건 운명 혹은 숙명 저 미래를 내포하는 단어이기도 했다. (256-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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