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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사람의 일생을 세 조각으로 나눈다면 처음 한 조각은 그저 떠나보내는 조각들로 채워지고 두 번째 조각은 현재라는 찰나의 조각이고 나머지 한 조각은 두 조각들의 잔해로 사는 것 같다. 우리의 일생은 기억만으로 충분한 시간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백세 시대라 하여, 우리의 생의 시간들이 예전보다 연장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그 연장된 시간 역시도 우리는 어느 순간에 멈춰서서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는 것만으로 시간을 채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도 도리고 에번스의 일생은 세 조각으로 나뉜다.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던 어린 시절의 불확실한 시간의 기억들과 항상 현재인 것만 같은 사랑과 전쟁의 잔해와 두 조각들의 추억과 회한들로 보내는 노년의 조각들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세 조각의 기억을 갖고 산다. 바빴던 부모님을 둔 덕에 늘 부모님의 뒷모습이 어린 시절의 잔상처럼 남져진 것처럼, 도리고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형 톰이 이웃의 재키 맥과이어 부인과 키스하고 있던 장면이 전부다. 마치 에이미와의 불륜이 이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그의 생의 방향은 오로지 에이미를 향해 있다는 것을 항변한다.
도리고의 두 번째 생의 조각은 대동아공영이라는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포로가 되어 일본군의 철도 라인에 참여하는 기억들이다. 외과 의사였던 도리고는 대령의 신분이어서 일본인들에게 장교의 대우는 받았지만 역시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다. 다른 이들의 실상은 더위와 더러움과 역겨운 냄새와 죽음이 도처에 있었지만, 도리고에게 찾아온 에이미와의 사랑은 죽음과 연관된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천국의 기쁨이었다.
일본인들에게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황의 뜻'으로 통하는 무적의 정신앞에서 포로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불가능을 필로폰에 의지해서라도 이루려고 하기에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도 철도라인을 성공시키려 하는 무모함과 더불어 무식함이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에 몰아치는 철도공사에 죽어나가는 포로가 더 많은 현실에서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흡사 악귀처럼 그려진다. 게다가 천황폐하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며 아픈 다키를 죽을 때까지 매질하여 숨지게 하는 장면은 전쟁의 잔혹성과 일본인들의 잔인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쟁 한 가운데에도 사랑은 피어난다. 휴가를 나가 만나게 된 키스 고모부의 부인 에이미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진 도리고의 모습은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인해 삶이 무의미해지는 전쟁속에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동료의 죽음을 보며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하다가도 스쳐가는 죽음의 바람소리에 잠 들지 못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도리고에게 에이미만이 숭고하고 순결한 상징처럼 도리고의 시간을 잠식해간다.
호텔을 운영하며 짬짬이 시의원이라는 일도 열심히 했던 키스와 에이미 사이에 균열이 생긴 건 도리고 때문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에이미는 결혼 전 키스의 아이를 임신하였지만 키스의 강요로 유산을 한다. 강요된 유산은 결국 에이미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 에이미 뱃속에 자리잡았고 이후 에이미는 잠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균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것이 도리고였다. 사랑은 상처나 균열로 침범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이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고 대담해져 갔고, 결국 키스에게도 둘의 관계가 알려진다. 부대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도리고는 오히려 에이미에게 결혼을 맹세한다. 하지만 이후 도리고가 속해 있는 부대가 전쟁으로 인해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이 에이미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세 번째 조각은 이후 에이미만을 추억하며 남은 생을 보내는 도리고와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과 회환으로 점철된 노년의 조각들이다. 도리고는 일본의 패배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포로로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전쟁영웅으로 유명해졌고 외과 의사로서도 명성을 떨치며 살고 있다. 반면 일본인 장교였던 나까무라는 전쟁범죄자로 수배령이 떨어졌고, 마약중독자로 살다가 다시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 ‘최상민’이라는 포로경비병의 이야기는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작가가 조선인 포로의 이야기를 이처럼 문제적으로 접근하여 현실감 있는 캐릭터로 그려냈다는 것에 우선 놀라웠고,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제3자의 시선에서 더욱 처절하게 인식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최상민의 생의 세 조각은 가난한 조선인으로 태어난 어린 시절과 일본인 가정의 하인으로 들어가 매달 2엔과 혹독한 매질을 받고 살았다. 이후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자원하면 50엔을 준다고 하여 이곳까지 온 것이 전부다. 그의 여동생은 정신대에 팔려갔다. 일본이 패망하자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수가 되었는데 그에게 남아있는 생의 기억이란 그저 '50엔'이라는 돈이었다.
‘위대한 조선이라니 무슨 소리야? 최상민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 50엔은 어디 있어? 난 조선인이 아니야. 난 일본인도 아니야. 난 식민지 백성이야. 내 50엔은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P426
현재라는 찰나의 시간은 때론 미래의 영원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리고가 에이미와의 사랑을 추억하며 그 기억만으로 남은 시간들을 살아내는 것처럼 우리는 세 번째 생의 조각에서는 지난 시간위에 생을 덧칠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기억을 재단하고 편집하며 왜곡하는 과정을 겪으며 다시 아름다운 나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이 일생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런 과정에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만약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도리고가 그처럼 에이미를 추억하며 살진 않았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그 현재의 찰나의 시간들이 주었던 그 여운이 너무 진하였기 때문에 그 여운만으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피는 것만이 에이미에 대한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변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소중한 기억의 한 조각만으로도 남은 생의 조각을 채워갈 수 있다. 사랑한 순간들의 기억은 남은 생의 시간을 전부 채우고도 남는다. 도리고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의 잔혹함과 사랑의 숭고함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지는 생의 서사시였다.
****기억에 남는 구절
도리고 에번스는 미덕을 싫어하고,미덕이 찬양받는 것도 싫어하고,그에게 미덕이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도 싫어하고, 덕이 있는 척 행세하는 사람들도 싫어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덕이 있다는 칭찬아닌 칭찬을 들을수록 그는 미덕이 더욱더 싫어졌다. 그는 미덕을 믿지 않았다.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 -p75
에이미에게 사랑은 우주에 닿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절이었다. -p202
그가 끊임없이 바람피우는 것은, 좀 기묘한 방법이긴 해도, 에이미의 기억에 대해 정조를 지키는 행동이기도 했다. 마치 엘라를 배신함으로써 에이미를 기리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p491
사랑은 두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