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신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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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기대를 하게 되는 작가가 있다. 김숨 작가가 그렇다. 그녀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는 팬심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녀의 신간 소식은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늘 기대만큼 못 미치더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은 어느 정도는 기대할 만 했다. 내가 읽은 그녀의 다음과 같은 전작들은 최소한.

 

 

 

 

세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딱 세편.

책 제목 <당신의 신>이라는 단편은 들어있지 않다. 하지만 첫번째 단편 <이혼>중에 나오는 구절에서 책 제목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여기서 '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좀 과장일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때 비슷한 생각을 한번 씩 하는 것은 사실이다. 결혼함으로써 내 삶이 업그레이드 되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상대방의 삶이 업그레이드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보다는 내 삶이 업그레이드 되는데 상대방과의 결혼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를 기대하는 것. 결혼의 결과로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대와 현실과의 엄청난 갭을 결혼 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 아마도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의 공통점을 찾아 내자면 그런 발버둥, 안간힘, 포기, 혹은 체념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이혼>이라는 이 단도직입적인 제목의 단편은 어리버리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는데 여전히 처음의 어리버리 상태.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길지 않은 단편이라서 (이 책 전체 분량이라봤자 200쪽이 안된다.) 다시 읽는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두번 읽어도 느낌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결혼의 이유가 커플마다 각양각색이듯이 이혼의 이유 역시 그러할텐데, 문장과 서사는 자연스럽게 진행되나 참신하진 않다. 위에 인용한 저 문장도 사실 전혀 새로운 문장이 아닌 것 처럼.

<읍산요금소>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스에서 일하는 정산원이라는 직업이 좀 특이할까, 이리 저리 번죽만 울리다가 끝나는 느낌.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바로 요양원과 납골당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의미를 붙이기에는 서사 자체가 약하고 뒷받침으로 역부족이다. 뫼비우스의 띠도 다른 작품들에서 너무나 자주 인용되어 식상하다.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마지막 작품 <새의 장례식>. 그러고보니 책 표지의 저 히끄무레한 것이 흰 천을 뒤집어쓴 새였구나. 이혼 전 부인의 현재 남편으로부터 새의 장례식에 초대된 전 남편. 여자는 빼고 전 남편과 현재 남편이 독대하고 있는 기이한 상황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폭력의 대물림. 폭력의 순환은 아무리 이성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작가만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야기 설정, 풀어나가는 형식, 서사에 새로운 시도가 보였다. 앞의 두 작품이 각각 문학동네와 한국문학에 발표했던 것인데 반해 <새의 장례식>은 이 책으로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위해 쓰여진 작품이라고 해야되는데, 그렇다면 마감없이 시간 제약 없이 쓰는것이 더 작가를 작가답게 한 것일까?

이번 소설은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반나절만에 후루룩 읽힌 것도 좀 아쉬운데, 요즘 기억력으로 머리 속에서도 그만큼 빠르게 잊혀질 것 같아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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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7-12-20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제 느낌도 그렇습니다. <국수>라는 단편집 너무 좋았었어요.

hnine 2017-12-20 12:03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아쉬워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 하나 했는데, 저는 그럼 망설임없이 <국수>를 읽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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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때'

나의 이 제목에 대한 집착을 해결하지 못하고 리뷰를 쓰고 있다.

왜 '내'가 아니고 '우리'지?

따져보면 작품 중에 주인공 크리스토퍼만 고아로 나오는 것이 아니긴 하다. 어릴 때부터 크리스토퍼의 친구였던 아키라도 부모가 안 계셨고, 그가 어른이 된후 런던에 와서 알게 된 여인 세라 헤밍스도 어릴 때 부모님이 안계셨다고 하며, 나중에 크리스토퍼가 부모를 잃은 제니퍼를 입양하는 얘기도 나온다. 그런데 왜 이 사실들이 하나의 제목 '우리가 고아였을때'의 '우리'로서 함께 다가오지 않는것인지 모르겠다.

상하이에서 아편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그것을 은근히 반대하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크리스토퍼. 어느 날 아버지가 실종, 어머니도 따라서 실종되고 졸지에 고아가 된다. 하지만 부모가 안계시다고 곧바로 불우한 생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런던의 이모 집으로 보내진 크리스토퍼는 제대로 잘 교육받고 키워진다. 명문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소망하던 사설탐정 일을 시작하면서 런던의 인맥도 쌓아간다. 

부모님과의 마지막이 실종때문이라는 것, 그것을 풀고 싶고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던 크리스토퍼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나고,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아가보면서 부모님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 아키라와의 해후, 아버지가 실종되었을 때 수사를 담당했던 쿵 경감을 만나 부모님이 아직까지도 억류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짐작되는 장소를 알아내는 등, 일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하던 문제를 조금씩 풀어나가던 중 예전에 런던에서 서로 관심을 두었던 사이인 세라 헤밍스를 다시 상하이에서 만나게 된다. 세라는 그당시 남편인 세실을 두고 크리스토퍼에게 함께 마카오로 밀항할 것을 제안하는데 과연 크리스토퍼에게 부모님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과 세라와의 결합중 어느 것이 더 우선순위였을까?

끈질긴 추적 끝에 부모님 실종 전말을 알게 되고, 놀랄만한 배후사실도 알게 된 크리스토퍼는 런던으로 돌아오고, 사고로 부모를 잃은 제니퍼를 후견하기를 계속하며 혼자 무심하고, 그러나 만족하면서 여생을 보낸다.

<남아 있는 나날>이 1989년에 발표되었고 <우리가 고아였을때>가 발표된 것이 2000년이니까 이 작품이 훨씬 나중에 나온 작품인데 내가 <남아 있는 나날>을 먼저 읽어서인가 <남아 있는 나날>에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아마도 두 작품이 공통적인 색깔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에 훨씬 깊은 성찰과 집중된 서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아였을때>에는 부모님을 따라 타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작가의 실제 경험이 많이 참조가 되었겠다 싶게 구체적이고 자연스런 묘사가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서사에서 어쩔 수 없이 보이는 헛점이랄까, 한줄로 엮이기에는 약간 산만한 구성, 관련된 인물이나 사건들이어야 함에도 약간씩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 개연성의 부족, 우연하게 벌어지는 듯한 일들, 등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나 같은 독자의 눈에도 조금 거슬려 보였기 때문인 것 같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고아였을때의 '우리'에는 그가 절묘한 타이밍이 아니라면 함께 마카오행을 했을지도 모르는 여자 세라, 어린 시절 또다른 자기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친구 아키라, 부모 없는 크리스토퍼 자신 처럼 스스로 책임져주고자 한 고아 제니퍼가 포함된다. 역자가 해설에서 썼듯이 크리스토퍼가 서로 다른 이 세 인물들에게 끌린 이유, 의식한 이유는 어쩌면 같은 운명들끼리 서로 알아보는 잠재 의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타국이 제2의 고향이 되어 살아가는 가즈오 이시구로에게는 그런 잠재 의식이 특별히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녹턴>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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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넘어 걷기 여행 -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한 번은 떠나야 한다
김종우 지음 / 북클라우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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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출판사의 짧은 소개글에서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빠르게 받은 인상은 신체를 움직이는 걷는행위 보다는 걷기와 관련된 내면의 기록이었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때 한번은 떠나야 한다', '어디든 걸을 수 있는 용기와 어디서든 멈출 수 있는 여유', '심장병을 안고 히말라야를 오른 후 걷기 여행에 푹 빠진...' 등등의 문구가 그렇지 않은가? 더구나 한창 여행의 욕구가 넘치는 2,30대가 아닌 마흔 넘어, 호화 여행이 아닌 걷기 여행이라니, 마음을 훅 뺏겨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이런, 이 책은 그런 구구절절 사연과 성찰이 담긴 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걷기에 관한 실용적인 정보를 담은 책에 더 가까웠다.

첫장부터 내용이 걷기가 주는 '신체적 효용성'. 다음 장엔 올바른 걷기 자세, 배낭 꾸리는 법, 걷는 기술 등, 걷기에 대한 하드웨어적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그마저도 아주 새로운 내용들은 아니라서 좀 실망.

그 다음 일곱개 소제목으로 저자가 추천하는 세계 트래킹 명소 일곱 군데가 소개되어 있다. 네팔의 히말라야, 스페인 산티아고 물론이고, 제주올레를 표방하여 만들었다는 일본 규슈 올레, 이탈리아 아말피와 돌로미티, 터키 리키안 웨이, 프랑스 파리, 그리고 대한민국 둘레길과 지리산 둘레길, 서울 둘레길까지. 목차를 봐도 짐작이 되시리라. 각 트레킹 코스가 히말라야의 경우 높이가 3000m 이상, 산티아고가 120km 등, 만만치 않은 코스들인데 소제목 하나로 하나의 코스를 설명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와 언제 갔는지,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어느 기관에서 (아마도 모 신문사?) 단체로 손님을 모집하여 떠나는 걷기 여행에 저자가 어떤 자격으로 (이것도 분명하지 않다) 초대되어 동행하는 형식으로 다녀온 것이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그런데 그 그룹 대부분이 연령대가 있는 분들이라서 코스를 전체 완주하기 보다는 짧고, 무리가 없게 조정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산티아고도 120km정도, 6일 정도 일정으로 압축). 그러다 보니 그곳을 가보지 않고 읽는 독자들에게는 너무 건너뛰기 식의 여행기록으로 보이기 십상이고 내용이 허술해보일 수 밖에 없다.

프랑스의 파리도 세계 일곱개 트레킹 코스에 포함시켜놓았다. 파리에 트레킹 코스가 따로 있어서 갔다기 보다 오랜만에 모르는 사람들과의 여행이 아닌 아내와의 여행으로 택한 곳인데, 어차피 여행을 하다보면 많이 걷게 되니까 이것도 트레킹이랄 수 있다는 저자의 말씀. 틀린 말은 아닌데, 웬지 억지 같기도 하달까.

마지막 장 '우리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만들수 있을까'에서는 세계 여러 트레킹 코스를 둘러본 후 우리 나라의 제주 올레, 서울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비교하여 우리의 걷기 코스도 산티아고 처럼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 수는 없을까 되돌아본 내용인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유명한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의 둘레길이 꼭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교가 되어 보강되고 업그레이드 되고, 그래야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산티아고는 고사하고 우리 나라 제주 올레길에도 한번 올라보지 못한 나. 매일 트레드밀 위에서 제자리 걷기만 하며 땀도 안나는 운동이랍시고 하는 나로서는 오늘도 또 한숨만 쉴 뿐이다.

알찬 구성이라기 보다는 어딘지 이것 저것 막 끌어다 엮은 책의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저자가 그동안 이 많은 코스를 걸어오며 느끼고 얻은 생각들과 경험을 제대로 잘 담았다고 보기엔 아쉬움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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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8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12-18 14:43   좋아요 1 | URL
원래 700km 되는 코스인데 이 책에서는 간편 코스? 를 택했더라고요. 저는 좀 실망 ㅠㅠ
해파랑길이 저에게는 지금 더 가능성이 커 보이네요. 그야말로 동해를 따라 아래에서 위로 쭈욱~~
꼭 가보고 싶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1984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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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카프카의 성에서도 그랬듯이 이 소설의 주인공도 딱히 특별한 인물은 아니다.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볼수 있는 평범한 시민. 그러니까 작가는 인물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다기 보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 책을 읽으며 새삼 이 사회에서 작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생각했다. 스토리 텔링도 소설을 쓰는 작가의 중요한 능력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조지 오웰의 이 사회성 높은 소설을 읽으며 다시 확인한다. 현 사회와 인간의 행동과 심리에 대한 관찰, 비판, 분석, 거기서 나아가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한 예견까지. 작가의 역량은 내가 아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조지 오웰 자신이 평탄하고 부유한 생활을 해나갔다면 이렇게 사회의 드러나지 않는 면, 보이지 않는 힘, 권력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런 경험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영국인 부모를 둔 그는 인도 주재 영국 공관에서 일하는 아버지로 인해 인도에서 태어났다. 네살때 영국으로 이주, 명문 이튼 칼리지를 다녔고 그때부터 이미 정기적으로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해나갔다. (그는 왜 미얀마에서 경찰로 근무하게 되었을까?) 이후 파리에도 잠시 머물렀고 영국으로 돌아와 여러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그의 나이 서른에 첫 소설이 출간되었으니 비교적 이른 성공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실업 사태가 발생한 지역을 돌아보며 가난의 참상을 보게 되었고 스페인으로 가서 내전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때 얻은 부상으로 건강을 잃은 그는 요양소에 들어갔고 이후 영영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채 채 오십도 안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 <1984>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일곱 달 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과연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해 길들여지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기라도 하는 것인가, 아니면 필사적으로 거기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 진짜 본성일까 혼동된다. 너무 쉽고 안일하게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에 길들여 사는 모습을 이렇게 소설에서 접하고 난후 현재 우리가 사는 모습,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느새 오버랩되고 있는 오싹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당에 의해 자행된 것들 주 가장 끔찍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충동들과 감정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믿도록 설득한 것이다. (228)

 

전쟁이 인간들의 이권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이용되는가 하는 대목은 또 얼마나 두려운가.

그것은 잉여 소비재를 소진시킬 뿐만 아니라 계층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정서를 유지하는데 유용하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제 전쟁은 철저한 내국적인 상황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실질적인 전쟁은 각 지배층과 그들이 이끄는 국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며 이러한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거나 상대국이 자국의 영토를 점령한는 것을 저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구조를 어떻게든 유지하는데 있다. (269)

 

나중에 오브라이언의 정체가 밝혀지고, 오브라이언이 언제 주인공을 처단하는지 드러나는 대목은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사회의 반대쪽 끝에는 무정부 사회가 있을까?

조지 오웰은 소설가이면서 예언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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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4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12-16 12:55   좋아요 1 | URL
제가 그렇게 쓰긴 했지만 저도 잊고 살때가 많은데 이렇게 기억해주시고 저에게도 다시 되새길 수 있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도 아직 자신있게 말할 경륜과 지혜가 부족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든 기쁜 일만 계속 있거나 슬픈 일만 계속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것이요.
오늘도 춥지요? 아침에 실내에서 운동하던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가시는 우체부 아저씨을 창문 너머로 보게 되었어요.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하다가, 생업에 종사하시느라 추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사람 사는게 저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답니다. 추우나 더우나, 기쁘나 슬프나, 계속 되어야 하는 것...
 

 

 

 




 

엄마라는 사람은, 오랫동안 미뤄오기만 하던 책을 아이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집어들수있는 사람이다.

아들 녀석이 학교 수업 시간에 이 책 <1984>를 읽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동안 구경만 해오던 이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문장이 어렵고 복잡할 줄 알았는데 겁 먹고 있던 것보다는 그래도 수월하게 읽혀 다행이었다.

 

 

 

 



 

 

12월이다.  

반짝거리는 저 트리 말고도, 텅빈 복도.

낮에는 학생들로 붐볐을 공간이 비어있는 모습. 조용한 상태. 12월.

 

 

 



 

 

 

1년 동안 듣던 강좌들.

모두 종강하고 유인물만 남았다.

모아서 바인딩.

 

 

 

 

 

 

 


 

 

 

 

지금 이 시가 마음에 와닿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매일매일은 별로 즐겁지도 않았고, 기뻤던 일 보다는 아쉬운 일들이 더 먼저 생각나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잘 살았어 하는 그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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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12-10 07:16   좋아요 1 | URL
네, 종강했답니다.
두개의 다른 강의였는데 내년에도 연속해서 들으려고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시즌인데, 마지막이 다른 시작과 연결되니 또 한번의 기회를 선물받는 것 같아서 다행이고 감사드리고 싶고 그래요.
제 손, 솔직히 예쁜 손은 아니지만, 그래서 얼굴 화장은 안하면서도 매니큐어는 열심히 바르고 손톱 케어 열심히 받으러 다닌 적도 있었지만, 이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로션만 열심히 바르고 있습니다 잘 갈라지고 터지는 손이라서요.
어제는 그나마 덜 추웠는데 강아지 산책을 못시켰어요 제가 게으름 피우느라.
오늘은 잘 입혀서 잠깐이라도 데리고 나와야겠어요.
좋은 날 되세요~

페크pek0501 2017-12-10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에 읽었죠. <1984>를.
저, 자랑질했습니당~~~

hnine 2017-12-10 19:43   좋아요 0 | URL
pek님께선 1984 어떠셨는지요.
바로 전 빌러비드 읽고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는데 1984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요 ㅠㅠ
리뷰에도 쓰겠지만 조지 오웰은 작가이면서 마치 예언자 같아요.
지금 읽기 시작한 책 <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는 또 어떤 앙금을 남겨줄지 기대도 되고 망설여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페크pek0501 2017-12-10 21:58   좋아요 0 | URL
아, 1984년 책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끝에 반전이 일어나는데 기가 막힌 반전이었어요.
좀 더 잘 관찰하고 읽었더라면 눈치챘을 그런 거였기 때문에 무릎을 치게 만들었죠. 억지가 없어요.
그 당시 읽을 때엔 꼭 북한을 보는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CCTV에 의해 촬영되는 우리 현실 같지요.
작가는 예언자 맞아요. 그리고 심리학자예요. 시대로 볼 때 프로이드 이론이 출현하기 이전인데 이미 인간의 심리를 꿰뚫은 작가들을 보면 존경스럽지요. 예를 들면 도스트예프스키가 그렇죠.

저는 고전을 읽으면서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걸 느낄 때 참 재밌더라고요. 1984년도 그랬어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아직 접해 보지 않았어요. 관심이 가서 눈독은 들이고 있답니다.

hnine 2017-12-11 12:39   좋아요 1 | URL
저는 읽기 전에 결말을 알고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도 거의 충격이었지요. 그것은 주인공의 결말이라기 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종결점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가즈오 이시구로 책도 한번 시도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제게는 꽤 술술 읽히는, 코드가 맞는다고 해야하나요? 그런 작가인것 같네요.

2017-12-12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7-12-18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 텅빈 복도를 보니 12월이란 단어가 잘 어울리는 느낌이네요.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 조금은 쓸쓸한 느낌

마지막에 소개해 주신 시도 여운이 많이 남네요.
목덜미에 가만히 얹은 손에 대해
그 고단했을 하루에 대해 잠시 생각해봐야겠어요.

hnine 2017-12-22 05:42   좋아요 0 | URL
어떤 공간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빠져 나간 후에 보면 몇배는 더 쓸쓸해 보이고 텅 비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실감이 나는 것 같아요. 올 한해는 다 소모되어 가고 있지만 저 공간처럼 텅빈 채 남아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네요. 나름대로 채우려고 노력하며 살았다고요. 얼마나 값진 것으로 채워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둘째 문제이고 조용하나마 나름대로는 발버둥이고 안간힘이었다고 스스로 위로 하고 싶은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