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새소설 15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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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었다. 작가 후기 읽었다. 이 책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몇개 찾아보았다.

이제 리뷰 써야겠다 하면서 마지막 한 일은 Nel Blu Dipinto Blu 를 듣는 일이었다. 들어보니 알고 있는 노래.)



등장하는 세명의 여자는 아직 오십대가 아니다. 아직 1년 있어야 오십이 되는 49세의 여자 대학 동창 세명이 25년 만에 함께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 그동안의 살아온 얘기를 하며 회포를 푼다. 얘기는 과거에 주로 집중되어 있고 세명중 그 누구도 현재에 대해 기꺼이 말하기를 꺼린다. 보여주기 그럴듯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 했던 미경은 대학생활의 또다른 축이었던 총학생회 선배 성희 언니와의 선후배 이상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뤄질 수 없던 관계로 두고 싶지 않다. 군립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아직 결혼도 안했지만 앓는 노모를 책임지고 사느라 여느집 가장만큼의 삶의 무게 속에 살고 있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정은. 동갑내기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사랑하는 남자는 재산이 없는 남자. 아이 둘을 키우느라 대학 졸업이 무색한 각종 알바 수준의 일을 몇가지씩 해가며 무너지는 가정경제를 무너지지는 않게 하느라 초등학교 급식실에서부터 설거지 아르바이트까지, 고군분투하며 산다. 담보대출, 잔고 부족, 연체 미해제 등은 그녀의 현재 인생 키워드이다. 대학때부터 쪼들리며 학교 다녔던 그녀는 가난의 시작은 어디이고 어디가 끝일까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에 제일 별탈없이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난주. 두 아이 키우고 살림 잘 하는 것에 이십 몇년을 보내고 아이 둘을 대학에 보내고 나자 별 수 없이 집에서 점점 쓸모 없어지는 아줌마가 되어 있는 자신이 속상하다. 당장 하루 종일 말 할 상대도 없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행복하지 않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나. 결코 안도할 만하지 않는 상황에 닥쳐 있다. 인생에 안도한만한 시기가 있기는 한 것인지. 오십을 넘어갈 무렵, 좀 달라진다 말할 수 있을까. 상황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여유가 조금씩 생겨난다.

작가의 소설을 초기부터 읽어온 독자로서, 갈수록 그녀의 소설이 편하게 읽혀져간다. 힘들지 않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경로가 다른 세사람을 주인공으로 썼을 것 같은데 읽다보면 그 경계가 없어져간다. 현실에서 너무나 익숙한 모습들이라는게 공감을 끌어내고 가독성있게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장점으로 돋보인다. 이 소설에서 새로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하는 아쉬운 점은 있다. 



(Nel blu dipinto di blu 이 노래의 다른 제목은 Volare. 이탈리아말로 '떠나자' 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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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4-07-07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이설 좋아해요!

hnine 2024-07-08 06:02   좋아요 1 | URL
한때 알라딘 서재의 친구였고 처음 낸 소설부터 쭉 따라 읽어왔지요. 각별해요.
초기에 낸 소설보다 읽기는 훨씬 수월해졌어요. 그녀의 소설이 이렇게 달라질줄이야. 앞으로도 어떻게 달라질리 모르고요.
작가란 ‘오늘도 쓴 사람‘이라는 김이설 작가의 신조가 있는한 앞으로도 계속 될 작품들을 기다리고 응원합니다.

다락방 2024-07-0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에서 나인 님께 동의하는데요, 김이설의 소설이 갈수록 편하게 읽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최근의 이 [안도하는 사이]는 무얼 말하고자 함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저도 그 점이 좀 아쉬웠습니다.

hnine 2024-07-08 06:10   좋아요 0 | URL
조심스럽게, 그리고 솔직한 감상을 썼어요. 친숙함으로만 읽히는게 전부라면 아쉬울수 밖에 없겠지요. 친숙하게 읽히다가 뭔가 새로운 발견을 제시하는 서사가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요. 전작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나 <잃어버린 이름에게>에서는 나름대로 주인공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주인공 나름의 방법으로 그 고비들을 넘어가는 모습이 잘 그려졌다고 생각되었었는데 말이지요. 이번 작품에서는 공감대 형성, 거기에서 더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그런데 스르륵 읽히는 자연스런 묘사, 말투, 어색하지 않은 대화들은 벌써 작가의 연륜이 짧지 않구나 느끼게 해주더라고요.
 
반바지 당나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7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민음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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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때문에 읽기를 미뤄놓고 있던 소설을 제목때문에 뽑아 읽게 되는 날도 있나보다. 소설 제목이라기 보다 동화책이나 시집 제목같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이걸 동화라고 봐야할까 소설이라고 봐야할까 구분이 잘 안선다. 

작가가 그리는 이상향을 동화처럼 그렸다고 할까?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내가 처음부터 끌려갈 내용은 아닌데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아 페이지는 금방 금방 넘어갔다.

읽기 시작하고 곧 이건 성경의 아담과 이브, 에덴 동산의 다른 버젼 아닌가 넘겨짚기도 했고,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을 성경과 대조시켜볼까 시도도 해보았다. 나중엔 그게 오히려 작품에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 그만 두긴 했지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너희들은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선 어린 암나귀 등에 앉으신 채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는 사실을. (48쪽)


이 문장으로 봐도 제목의 당나귀는 그냥 당나귀가 아니었던 것. 성경에 나오는 내용에 근원을두고 있다.

책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각종 성지 축일이 줄줄이 나오고, 금단의 땅, 천사, 악마 등이 자주 언급된다.


이곳은 비옥한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이 거하고 있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 피안의 세계 (52쪽)


열두살 소년 콩스탕탱이 금단의 땅에 처음 들어서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피안의 세계.


콩스탕탱은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뻬이루레 마을 의 산 기슭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하인 세명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마을의 산 위에는 다른 마을 주민들과 떨어져 접촉을 않고 사는 시프리앵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노인이 있는데 가끔 마을의 성당에 당나귀를 내려보내고 성당의 신부와 말을 나누는 것이 소통의 전부이다. 어디서 왔는지 근본을 알 수 없는 이 노인은 사람들과는 떨어져 지내지만 '플레롸이드 (꽃 피는 동산이라는 뜻)' 라는 정원을 가꾸며 동물, 식물들과 교류를 나누며 살면서 여우의 살생으로부터 정원이 다른 생물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그곳, 금단의 땅에 대한 궁금증에 이끌려 비밀스런 접근을 시도한 콩스탕탱을 발견한 후부터 시프리앵은 콩스탕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키워간다.

콩스탕탱 또래의 이아생트라는 소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소녀 역시 출신, 성격, 존재 의미가 묘연한 인물이고 콩스탕탱과 시프리앵,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뚜렷하게 그 관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묘사되어 있진 않아서 이아생트가 이 작품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해석의 여지가 많다. 

책의 전반부 반 이상은 콩스탕탱의 이야기로 진행되고, 후반부엔 시프리앵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핵심은 콩스탕탱보다는 시프리앵의 일기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외로움 속에서 그가 정원, 즉 금단의 땅, 작가가 그리는 이상향을 만들어 추구해온 것, 그의 자기 성찰과 고뇌가 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상당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깊이가 보여지는 서술이다. 여러 가지로 볼때 시프리앵은 어쩌면 작가의 분신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작가 연보를 훑다보니, 작품 속 시프리앵의 생일과 작가인 앙리 보스코의 생일이 같다는 발견!)


작가 앙리 보스코는 프랑스 작가이지만 원래 이탈리아 집안이다. 할아버지가 프랑스로 넘어와 정착하여 앙리 보스코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후에 이탈리아에서 수학하기도 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모로코에서 문학교사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57세때에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직에서 은퇴한다. 모로코에서 거주한 기간이 24년. 꽤 오랜 기간이고 <반바지 당나귀>는 모로코에 거주하는 동안 연재 형식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반바지 당나귀>는 우리 나라에 처음엔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었고, 이 외에 <이아생트>, <아이와 강>, <말리크루아> 등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책 뒤의 작품해설을 읽어보니, 작가가 성경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그가 그리는 이상향은 어떤 곳이고 그런 곳을 추구하는 것이 곧 삶의 과정이고 핵심이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정도를 겨우 끌어낸 나로선 짐작도 못한 해석과 의미가 달려 있었다.

술술 읽힌다고 후딱 한번 읽어선 얻어내기 어려운, 아직 캐내지 못한 뜻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살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경탄하지들 않는 것 같아요."

그분이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정말이지 이상한 일은, 죽는다는 일에는 다들 놀라워하지." (206쪽)

수수께끼 노인 시프리앵과 그가 유일하게 소통했던 신부와의 대화이다.

위의 대사는 시프리앵, 아래 대사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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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0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삼부작의 첫권이라는데요, 두번째 이아생트, 세번째 이아생트의 정원, 모두 번역 출판했습니다. 저는 두번째가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함부로 추천하기는 쉽지 않군요.
상당히 몽상적인 작품이라서 말입죠.

hnine 2024-07-04 14:03   좋아요 0 | URL
그렇다더군요. 삼부작의 첫권이라는데 이 책과 많이 다를 것 같진 않아요 저도 몽상적인 작품 읽기가 쉽지 않아서요. 12살때 부터 시작하여 상도 많이 받은 작가이던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것에 비해 국내엔 많이 소개되지 않은 것 같죠?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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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나의 관심과 끌림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 계기가 있었냐 하면 그것도 딱히 없다. 시작은 모를지라도 아마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나의 20대 후반 남의 나라 가서 혼자 지내는 몇년을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경다니며 버틸 수 있었던 그 기간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 기간을, 나의 선택을, 잘 넘어가고 싶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하는 형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갑자기 생겨버린 빈 자리에 익숙해지는데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미술관에서 일하며 갖기로 한다.

미술관에는 여러 직종이 모여있지만 저자가 지원한 직종은 경비원. 전시 미술품 옆에 서서 관람객으로부터 전시물을 보호하고 주의 시키는 임무를 하는 사람이다. 

경비원 동료들 사이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해야 하는 일'이 경비일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지루할 수도 있는 일이다. 관람객 대상으로 전시 해설을 하는 일도 아니고 기획자도 아니고 그저 경비 업무이니까.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대번 느꼈다. 저자는 경비원이면서 동시에 미술관 관람객으로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한 작품 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자기 마음으로 감상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곧 자기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 특징들을 찾는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114쪽)


일주일, 혹은 수 주일 단위로 담당 구역이 바뀐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책의 한 챕터에서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듯이 새로운 분야에 대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공부도 하고 자료 조사도 해가며 이해를 위한 노력의 시간으로 여긴다. 이슬람 전시관에서의 3개월 근무가 주어졌을때에는 이슬람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통해, 왜 이들의 디자인에서는 원과 분할, 반복에 의한 패턴이 생겨났는지,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낸다. 그것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전시된 초상화의 대상이 된 인물인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 수도사와 비슷) 란 인물이 더 알고 싶어 그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고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신을 향한 더비시의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저자는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했다.


초상화의 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이었을까? (218쪽)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이 하고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는 들리고 누구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말이고, 들린다 할지라도 같은 말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나와 그림 사이에 다른 방식으로 교감이 형성된다. 그동안 인식 못하던 나의 번뇌와 의문점이 그림을 통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이 그림을 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있는 동료들 중 일부러 미술관 경비원이 된 괴짜는 저자 뿐이었다고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삶 그 자체라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을까.


사이먼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블레이크는 지질학을 전공했다. 루시는 시 전공으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네 사람의 삶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지금 바로 이 모습, 이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31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저자에게는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와 또 다른 새로운 삶에 맞닥뜨린다. 7만 평이 넘는 미술관에서보다 20평 짜리 자기 아파트에서 할 일이 훨씬 많고 적응하기 힘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그 20평 짜리 아파트에서 하는 일은 몇 시간을 일하든 무보수라는 것은 또 어떻고?


메트에서 일하기 시작한후 첫 몇 달을 돌이켜보면 내가 한때 날이면 날마나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그토록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아마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가진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날마다 수많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 요즘 같아서는 그렇게 뭔가에 집중해서 사는 삶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단순한 목표만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다. (269쪽)


눈 앞에 닥친 새로운 상황이 자연스럽게 저자의 삶의 목표를 바꾸어 놓는다. 그는 그렇게 상황에 적응할 줄 알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저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꼽은 것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그림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구경꾼 무리들에 주목을 했다는 것이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319쪽)


그리고 W.H.오든의 <미술관> 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린다.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 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라는.

그림 하단을 본다. 거기에는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따르고 싶은 모범이라고 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320쪽)


이것이 그림에서 뽑아내는 통찰이고, 그림을 보는 이유이다. 


그냥 조용하게 책장을 넘겨가던 시작이, 이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끝에 도달하게 할 줄은 몰랐다.

원제는 All the bueaty in the world

번역본의 우리 제목이 훨씬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제목을 달 생각을 했는지.


얼마전 모 박물관의 자원봉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일이 있다. 전시해설 자원봉사였다. 아무리 자원봉사라고 해도 전시해설이라면 함부로 지원할 일이 아니었는데 차라리 떨어지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자 처럼 경비 자원봉사라면 해 볼 수 있을까, 잠시 다시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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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고른 말 - 카피라이터·만화가·시인 홍인혜의 언어생활
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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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자가 루나파크라는 홈페이지를 웹에 연재할때, 그때가 벌써 몇년 전인지 기억도 못하겠지만, 그때부터 이미 자주 들락거리며 그녀의 만화로 쓴 일종의 일기를 즐겨 보곤 했다. 




그 당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는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에게 꽤 인기있는 희망 직종이었고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TBWA나 LG Ad 같은 광고회사는 그 대표적인 회사였다. 그 중 한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던 그녀는 그림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만화를 어찌나 단순 깔끔하고 요점 정리 잘 한 요약서처럼 그리던지, 카피라이터는 만화를 그려도 어딘가 다르구나 생각했었다. 이후 그녀가 그린 만화를 엮어 책으로도 내었고 ('루나 파크 옷걸이 통신'),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혼자 영국으로 떠나 단기 체류한 이야기를 쓴 책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도 재미있게 읽었었다. 

최근에 그녀가 유퀴즈라는 방송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반가웠다. 그리고 예전 생각이 나서 최근에 출간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카피라이터, 만화가, 시인 홍인혜의 언어 생활'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 책은 그녀의 일상과 생각을 담은 가벼운 에세이라고 볼수 있다. 


불투명한 우리는 말을 통해 겨우 투명해진다. (7쪽)

그러기 위해서

말을 고르고 고른다. 거르고 거른다. 벼리고 벼린다. (7쪽)


"얘들이 새내기면 우린 이제 헌내기야?"

"아니지. 우리는 정든내기지." (31쪽)


"쟤는 참 생각 없이 밝아." (38쪽) 

고 있던 눈물이 누군가 픽 던진 이 말을 듣자마자 쏟아져 나왔다는 저자의 말이 단박에 공감이 되었다. 생각이 없는게 아니라 생각을 몇번 돌려 가까스로 눈물 대신 웃고 있는 중인데.


카피라이터도 다른 사람의 카피에 감동받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본 다음과 같은 카메라 광고 문구가 멋져서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고 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 (237쪽)

'나는 기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건 내가 가끔 일기장에 끄적거리는 문장인데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행복이란 걱정과 불안이 해결된 완전무결한 상태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언제나 강박 속에 유예되었다. 모든 것이 완결된 상태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오늘을 버티며 나를 살게 할 작은 만족들을 수집했다. 잠도 자지 않고 쉴 시간도 아끼며 걷고 또 걸어 물결치는 오아시스에 당도하면 마음껏 행복해하겠다는 계획은 허상이었다. 

낙원은 멀고 심지어 없을 수도 있다. 아득한 환상에 기대기보다 사막 중간에 있는 작은 샘이나 선인장 그늘에서 작은 행복을 드문드문 발견하는 것이 내가 살 길이었다. 그것을 인정한 순간 나의 강박도 헐거워졌다. (310쪽)


나이들어 가는 과정을, 헐거워가는 과정이라고 비유하여 그녀는 또 생각을, 말을, 고르고, 거르고, 벼리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루나가, 나와 한 공간에 함께 지낼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 좋은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만화나 글을 볼때마다 한번씩 해보는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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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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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잔뜩)


아무렇지도 않게 듣던 노래 '그것만이 내 세상'이 어느 날 문득 심상치 않게 들렸다. 내 세상.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가며 사느라 억눌렸던 나의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하는 순간 이제부턴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 외로움과 불편함을 댓가로, 남들의 시선과 구설수를 불사하고, 내 세상을 살 용기가 있는 사람. 흔치 않다.


이탈로 칼비노. 태어나기는 1923년 쿠바에서 태어났지만 세살때 이탈리아로 이주하였으니 쿠바에서의 기억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이후로 줄곧 이탈리아에서 교육받고 이탈리아에서 문학을 시작하였으며 1985년 이탈리아에서 생을 마감하고 지금까지, 현대 이탈리아 소설을 말할때 빠지지 않는 소설가로서 사랑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소설에는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권위적인 아버지, 장군의 딸인 덕에 여장군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는 엄마, 열두살 형과 누나, 그리고 여덟살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이 나온다. 이중 가장 어린 여덟살 남자 아이가 화자인 '나'가 되어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온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자리. 아버지로부터 싫어하는 달팽이 요리를 먹을 것을 계속 강요당한 코지모형은 식당을 박차고 나가 집 밖의 나무 위로 올라가버린다. 그리고사 앞으로 나무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겠다고 했고, 그렇게 형의 나무위에서의 생활이 시작된다. 열두살 소년이 하는 말을 동생인 나를 비롯하여 가족 누구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 처음에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형은 나무 위에 머물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기는 커녕 평소 이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아 왕래를 하지 않던 옆집 딸 비올라가 형이 머물던 나무에 그네를 타다가 만나 둘이 서로 호감을 가지며 친구가 된다. 

나는 나무위에 있는 형이 필요한 물건을 갖다주는 방법으로 형을 도와주고 형은 나무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나무 사이를 옮겨다니며 점차 나무 위의 생활에 적응해간다. 식구들은 코지모가 얼마 못버티고 내려올줄 알았던 처음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나무 위에서 보낸 처음 그 며칠 동안 코지모 형은 특별한 목적이나 계획은 없었지만 자신의 왕국을 제대로 알고 소유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람만은 가지고 있었다. 형은 마지막 경계선까지 자신의 왕국을 탐험하고 싶어했고 그 왕국이 형에게 어떤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을지 연구하고 싶었으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통해 그 왕국을 발견하고 싶어 했다. (80쪽)


나무 위로 올라가서 친구가 된 옆집 소녀 비올라는 때가 되어 집을 떠나 기숙사로 가고 나무 위에서 그걸 보며 코지모형은 속상해 울음을 떠뜨린다. 

코지모형은 점차 나무들의 종류에 따라 어떤 때 어떻게 이용하는게 좋은지 구별할수 있게 되고, 땅에서와 다른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직감을 갖춰 간다. 필요한 지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가끔 집에 왕래하는 신부님을 나무 위로 불러들여 수업을 받기도 한다. 

나무 위에는 코지모형만 사는게 아니었다. 물론 코지모형처럼 땅위로는 절대 내려오지 않고 나무 위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과일 좀도둑, 산적이 있었는데 산적 잔 데이 브루기와는 친분이 생기기도 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잔데이부루기의 영향으로 형도 독서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가면서 다방면의 지식을 쌓아가고 새로운 생각을 하기도 하며 책의 저자, 학자들과 편지를 나누기도 하는 등, 자신의 생각과 세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결국 항상 가까이에 있는 잔 데이 브루기때문에 코지모 형에게 독서는 소일거리가 아니라 중요한 근심거리, 하루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책을 다루고 그것들을 평가하고 구입하고 그 책에서 점점 더 많은 지식과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면서. 잔 데이 브루기를 위해 책을 읽고, 또 자신의 필요 때문에 독서를 하다 보니 코지모 형에게는 독서와 인간 지식에 대한 열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형은 하루 종일 읽고 싶은 책만 읽었고 밤에도 램프의 불빛 아래서 계속 책을 읽었다. (160쪽)


한편 마을에 화재가 발생했을때는 나무위에서 구경만 하는 대신, 마을 사람들과 협조하고 단체를 지휘, 명령, 통솔하는 법을 배운다.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고, 큰아들이 나무 위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을 것을 감지하고 본인이 나무 위의 아들을 방문하여, 자신의 남작 지위를 상징하는 남작의 검을 물려준다. 

한집에서 가족처럼 함께 살던 삼촌이 해적에게 죽음을 당하고 그동안 삼촌이 해적과 내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아 횡설수설하는 일이 잦아진 형은 이후로 이야기하는 취미를 갖게 되어, 사실과 허구를 왔다 갔따 하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빠져든다. 사람들로부터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이 형 뿐 아니라 또 있다는 말을 들은 형은 그들을 찾아 가기도 하는데 거기서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온 우르슬라라는 여자를 만나 연인이 된다. 추방령이 해제되어 그녀도 고국으로 돌아가 또한번의 이별을 맞게 되고, 그동안 아버지도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어느 정치적 단체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것을 경험하고 자기의 이상대로 새로운 규율을 만들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기 위한 책을 직접 쓰기도 하지만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 공화군이 나폴레옹 황제군으로 바뀌는 등, 사는 곳이 나폴레옹의 통치하에 들어가는 시기에 나는 나무 위에서 홀로 지내는 형을 부러워한다. 형은 어느 편에 들거나 공격하지 않으며 폭정에서 민중을 도와주는 일만 하며 지낼 뿐이다. 


나는 이 19세기, 출발도 좋지 않았고 계속 나빠지기만 하는 이 세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 알 수 없다. 왕정복고의 그림자가 전 유럽에 드리워졌다. 모든 개혁자들-자코뱅 당이든 나폴레옹 지지자이든-은 패배했다. 절대주의와 예수회가 영역을 장악했다. 젊은이들의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은 모두 재가 되었다. (369쪽)


내게 세상이 변했음을 알려준 것은 오스트리아-러시아 군의 도착도 피에몬테로의 합병도 새로운 세금이나 내가 아는 다른 그 어떤 일도 아니었다. 바로 창문을 열고 저 나무 위에 균형 있게 앉아있는 형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370쪽)


"형님, 형님도 벌써 예순다섯이 넘었어요. 어떻게 계속 나무 위에 있을 수 있어요? 형님이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이제 다 말했어요. 우린 다 이해했다고요. 형님은 정말 강한 정신력을 가진 분이에요. 이제 내려와도 돼요. 바다에서 인생을 다 보낸 사람도 배에서 내릴 때가 있는 법이에요." (371쪽)


동생은 형이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고 나무에서 내려올 것을 권유하는 대목이다. 과연 형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까. 아마 여기까지 읽은 어떤 독자도 예상못할 방식으로 그는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소설을 끝난다. 


이탈로 칼비노는 (1) 어떤 의도로 이 소설을 썼을까. (2) 코지모를 통해 그는 어떤 인간형을 나타내고자 했을까. 

1. 칼비노는 1923년 태어나 1985년까지 살았었고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이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의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변화가 많던 시기를 소환하여 그가 살던 시대를 다시 되짚어 보고자 했다.

2. 여러 주의, 이즘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만큼 개인의 판단이 어렵고 대중 속에서 개인의 위치와 기준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에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대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할지, 코지모란 인간형을 통해 그려보고자 했다. 


코지모는 결코 보통의 삶을 평범하게 살아간 사람이 아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 않았지만 이상한 사람, 독특한 사람, 미친 사람이라는 수군거림을 벗어날수 없었다. 지금의 우리 역시 남의 시선과 나의 생각 사이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며 산다. 하지만 코지모 같은 결정을 내리진 못한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나만의 세상을 꿈꾼다. 다른 사람의 기준과 지시에서 자유로운 삶을, 이상대로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자유는 댓가를 치루지 않고 그냥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나무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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