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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당나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7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민음사 / 2014년 11월
평점 :
제목때문에 읽기를 미뤄놓고 있던 소설을 제목때문에 뽑아 읽게 되는 날도 있나보다. 소설 제목이라기 보다 동화책이나 시집 제목같은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이걸 동화라고 봐야할까 소설이라고 봐야할까 구분이 잘 안선다.
작가가 그리는 이상향을 동화처럼 그렸다고 할까?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내가 처음부터 끌려갈 내용은 아닌데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아 페이지는 금방 금방 넘어갔다.
읽기 시작하고 곧 이건 성경의 아담과 이브, 에덴 동산의 다른 버젼 아닌가 넘겨짚기도 했고, 그렇다면 등장인물들을 성경과 대조시켜볼까 시도도 해보았다. 나중엔 그게 오히려 작품에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 그만 두긴 했지만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너희들은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선 어린 암나귀 등에 앉으신 채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는 사실을. (48쪽)
이 문장으로 봐도 제목의 당나귀는 그냥 당나귀가 아니었던 것. 성경에 나오는 내용에 근원을두고 있다.
책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각종 성지 축일이 줄줄이 나오고, 금단의 땅, 천사, 악마 등이 자주 언급된다.
이곳은 비옥한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이 거하고 있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 피안의 세계 (52쪽)
열두살 소년 콩스탕탱이 금단의 땅에 처음 들어서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피안의 세계.
콩스탕탱은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뻬이루레 마을 의 산 기슭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하인 세명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마을의 산 위에는 다른 마을 주민들과 떨어져 접촉을 않고 사는 시프리앵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노인이 있는데 가끔 마을의 성당에 당나귀를 내려보내고 성당의 신부와 말을 나누는 것이 소통의 전부이다. 어디서 왔는지 근본을 알 수 없는 이 노인은 사람들과는 떨어져 지내지만 '플레롸이드 (꽃 피는 동산이라는 뜻)' 라는 정원을 가꾸며 동물, 식물들과 교류를 나누며 살면서 여우의 살생으로부터 정원이 다른 생물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그곳, 금단의 땅에 대한 궁금증에 이끌려 비밀스런 접근을 시도한 콩스탕탱을 발견한 후부터 시프리앵은 콩스탕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키워간다.
콩스탕탱 또래의 이아생트라는 소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소녀 역시 출신, 성격, 존재 의미가 묘연한 인물이고 콩스탕탱과 시프리앵, 모두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뚜렷하게 그 관계의 정체가 무엇인지 묘사되어 있진 않아서 이아생트가 이 작품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해석의 여지가 많다.
책의 전반부 반 이상은 콩스탕탱의 이야기로 진행되고, 후반부엔 시프리앵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핵심은 콩스탕탱보다는 시프리앵의 일기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외로움 속에서 그가 정원, 즉 금단의 땅, 작가가 그리는 이상향을 만들어 추구해온 것, 그의 자기 성찰과 고뇌가 일기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상당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깊이가 보여지는 서술이다. 여러 가지로 볼때 시프리앵은 어쩌면 작가의 분신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작가 연보를 훑다보니, 작품 속 시프리앵의 생일과 작가인 앙리 보스코의 생일이 같다는 발견!)
작가 앙리 보스코는 프랑스 작가이지만 원래 이탈리아 집안이다. 할아버지가 프랑스로 넘어와 정착하여 앙리 보스코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후에 이탈리아에서 수학하기도 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모로코에서 문학교사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57세때에는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직에서 은퇴한다. 모로코에서 거주한 기간이 24년. 꽤 오랜 기간이고 <반바지 당나귀>는 모로코에 거주하는 동안 연재 형식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반바지 당나귀>는 우리 나라에 처음엔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었고, 이 외에 <이아생트>, <아이와 강>, <말리크루아> 등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책 뒤의 작품해설을 읽어보니, 작가가 성경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그가 그리는 이상향은 어떤 곳이고 그런 곳을 추구하는 것이 곧 삶의 과정이고 핵심이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정도를 겨우 끌어낸 나로선 짐작도 못한 해석과 의미가 달려 있었다.
술술 읽힌다고 후딱 한번 읽어선 얻어내기 어려운, 아직 캐내지 못한 뜻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살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경탄하지들 않는 것 같아요."
그분이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정말이지 이상한 일은, 죽는다는 일에는 다들 놀라워하지." (206쪽)
수수께끼 노인 시프리앵과 그가 유일하게 소통했던 신부와의 대화이다.
위의 대사는 시프리앵, 아래 대사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