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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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나의 관심과 끌림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슨 계기가 있었냐 하면 그것도 딱히 없다. 시작은 모를지라도 아마 본격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나의 20대 후반 남의 나라 가서 혼자 지내는 몇년을 미술관과 박물관을 구경다니며 버틸 수 있었던 그 기간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 기간을, 나의 선택을, 잘 넘어가고 싶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랑하는 형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갑자기 생겨버린 빈 자리에 익숙해지는데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미술관에서 일하며 갖기로 한다.

미술관에는 여러 직종이 모여있지만 저자가 지원한 직종은 경비원. 전시 미술품 옆에 서서 관람객으로부터 전시물을 보호하고 주의 시키는 임무를 하는 사람이다. 

경비원 동료들 사이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해야 하는 일'이 경비일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지루할 수도 있는 일이다. 관람객 대상으로 전시 해설을 하는 일도 아니고 기획자도 아니고 그저 경비 업무이니까.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대번 느꼈다. 저자는 경비원이면서 동시에 미술관 관람객으로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한 작품 앞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 충분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자기 마음으로 감상해보려고 했다. 이것은 곧 자기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 특징들을 찾는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114쪽)


일주일, 혹은 수 주일 단위로 담당 구역이 바뀐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책의 한 챕터에서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듯이 새로운 분야에 대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공부도 하고 자료 조사도 해가며 이해를 위한 노력의 시간으로 여긴다. 이슬람 전시관에서의 3개월 근무가 주어졌을때에는 이슬람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통해, 왜 이들의 디자인에서는 원과 분할, 반복에 의한 패턴이 생겨났는지,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낸다. 그것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전시된 초상화의 대상이 된 인물인 16세기 수피파의 더비시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 수도사와 비슷) 란 인물이 더 알고 싶어 그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고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신을 향한 더비시의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저자는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했다.


초상화의 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이었을까? (218쪽)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이 하고 있는 말이다. 누구에게는 들리고 누구에게는 들리지 않을 수 있는 말이고, 들린다 할지라도 같은 말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나와 그림 사이에 다른 방식으로 교감이 형성된다. 그동안 인식 못하던 나의 번뇌와 의문점이 그림을 통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이 그림을 보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있는 동료들 중 일부러 미술관 경비원이 된 괴짜는 저자 뿐이었다고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삶 그 자체라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을까.


사이먼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블레이크는 지질학을 전공했다. 루시는 시 전공으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네 사람의 삶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지금 바로 이 모습, 이것이 삶이라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31쪽)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저자에게는 아이가 태어나고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와 또 다른 새로운 삶에 맞닥뜨린다. 7만 평이 넘는 미술관에서보다 20평 짜리 자기 아파트에서 할 일이 훨씬 많고 적응하기 힘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그 20평 짜리 아파트에서 하는 일은 몇 시간을 일하든 무보수라는 것은 또 어떻고?


메트에서 일하기 시작한후 첫 몇 달을 돌이켜보면 내가 한때 날이면 날마나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그토록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아마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 가진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날마다 수많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하는 요즘 같아서는 그렇게 뭔가에 집중해서 사는 삶을 상상하기가 힘들다. 이제는 더 이상 처음 미술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단순한 목표만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살아나가야 할 삶이 있다. (269쪽)


눈 앞에 닥친 새로운 상황이 자연스럽게 저자의 삶의 목표를 바꾸어 놓는다. 그는 그렇게 상황에 적응할 줄 알았다. 다행스런 일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저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꼽은 것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가 이 그림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구경꾼 무리들에 주목을 했다는 것이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통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319쪽)


그리고 W.H.오든의 <미술관> 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린다.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 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라는.

그림 하단을 본다. 거기에는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자기가 따르고 싶은 모범이라고 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320쪽)


이것이 그림에서 뽑아내는 통찰이고, 그림을 보는 이유이다. 


그냥 조용하게 책장을 넘겨가던 시작이, 이렇게 뿌듯한 마음으로 끝에 도달하게 할 줄은 몰랐다.

원제는 All the bueaty in the world

번역본의 우리 제목이 훨씬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제목을 달 생각을 했는지.


얼마전 모 박물관의 자원봉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일이 있다. 전시해설 자원봉사였다. 아무리 자원봉사라고 해도 전시해설이라면 함부로 지원할 일이 아니었는데 차라리 떨어지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자 처럼 경비 자원봉사라면 해 볼 수 있을까, 잠시 다시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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