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 부는 아이

 

 

 

 

 

 

 

 

 

“이름이 뭐지?”

“......”

“글자는 쓸 줄 알아?”

아이는 대답대신 고개를 옆으로 젓습니다.

“지금 몇 살이지?”

아이는 손가락을 일곱 개 펴 보입니다.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습니다. 은하공주 밍밍이 시작되면서 신나는 리듬의 주제가가 흘러나옵니다. 선생님이 먼저 따라 부르면서 아이를 쳐다보았습니다. 아이는 아무 표정 없이 비디오 화면을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이 만화 알아?”

아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만화를 모르는 아이는 없을테니까요.

선생님은 비디오를 끄고 종이 한 장을 꺼냅니다.

“여기에 그림 한번 그려볼까?”

아이에게 색연필을 꺼내주며 나무와 새와 연못을 그리라고 합니다.

아이는 천천히 그림을 그립니다. 나무를 그리고 새를 그리고, 다음으로 연못을 그렸습니다.

“그래, 잘 했어. 이젠 나가도 돼.”

 

엄마와 마주 앉은 선생님은 결과지를 보며 말합니다.

“유리 지능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요. 인지 능력도 정상이고, 이해력도 정상이고요. 아이가 말을 안 하는 것은 신체적인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폐증 단계까지는 아직 아니고요.”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쉽니다.

 

바쁜 엄마가 모처럼 시간을 내어 유리를 백화점에 데리고 갑니다.

나풀나풀 레이스가 달린 노랑 드레스를 가리키며 묻습니다.

“이 옷, 예쁘지? 사줄까?”

유리는 옷을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엄마는 옷을 삽니다. 노란색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엄마는 만족스럽습니다.

유리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 그 옷은 유리 옷장에 걸려 있습니다. 한 번도 그 옷을 입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유리를 데리고 아주 큰 장난감 가게에 갑니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많이 골라도 돼. 그래야 혼자 있을 때에도 심심하지 않지.”

진짜 같은 인형, 진짜 같은 건물, 크고 작은 블럭, 말하는 로봇, 별의별 모양의 퍼즐. 엄마가 보기에도 신기한 게 많은지 이것저것 구경하며 만져봅니다.

유리는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볼 뿐 구경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유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거기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일곱 살 여자 아이에게 인기 있는 장난감이 뭐가 있나요? 좀 골라주시겠어요?”

그 사람은 이것저것 골라서 큰 박스에 포장을 해줍니다.

엄마는 이번에도 만족스런 표정입니다.

유리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장난감 박스는 지금 유리 방에 그대로 있습니다. 한 번도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습니다.

 

유치원에서도 유리는 혼자입니다. 다른 아이들과 장난을 치지도 않습니다. 선생님이 노래를 가르쳐주시면 노래를 부릅니다. 그림 그리는 시간엔 그림을 열심히 그립니다. 하지만 다 같이 나가서 노는 시간엔 혼자 미끄럼을 탑니다. 혼자 시소에 오릅니다. 시소 맞은편에 다른 아이가 와서 앉으면 유리는 곧 내려옵니다.

 

유치원에 새로운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오늘부터 친구가 한명 더 생겼어요. 이름은 준희. 준희는 다리가 좀 불편하니까 우리 친구들이 더 많이 도와줘야해요. 알았지요?”

선생님 옆에 서있는 준희 모습이 어딘지 기우뚱해 보입니다.

“네!”

아이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은 준희와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준희는 아이들처럼 놀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걸을 수는 있지만 뛸 수가 없었습니다. 미끄럼도 탈 수 없었습니다. 뛰어다녀야하는 술래잡기도 할 수 없었습니다. 뱅뱅이를 탈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나가는 시간이면 준희도 늘 함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시소에 앉아있던 유리가 준희를 보았습니다. 준희는 놀이터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한참 쳐다보고 있던 유리는 시소에서 내려와 준희에게로 가만가만 걸어갔습니다. 준희는 유리가 오는지도 모르고, 과자 부스러기 주위에 까맣게 모여든 개미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유리는 준희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구경했습니다. 개미들도 과자가 맛있나봅니다. 유리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과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개미들을 손으로 집어다가 과자 부스러기 가까이에 내려주었습니다. 준희도 유리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했습니다. 유리도 혼자가 아니고 준희도 혼자가 아닙니다. 준희는 아까만큼 심심해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동안 유리는 그렇게 준희 옆에 있다가 함께 교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흙 속에서 개미집을 찾아내기도 하고, 꽃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져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준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냅니다. 파란색 작은 나팔이었습니다. 입에 대고 ‘훅’ 하고 불자 장난감 같은 작은 나팔에서 ‘뿌우~’ 하고 소리가 났습니다. 유리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준희가 웃으며 이번엔 좀 더 세게 불었습니다.

‘뿌, 뿌~’

유리도 웃었습니다.

“불어볼래?”

준희가 유리에게 나팔을 내밀었습니다. 유리는 대답 하지 않고 나팔을 보고만 있습니다.

“말 하는 거 싫어해?”

준희가 물었습니다.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말이 속에만 갇혀 있다가 빵 터지면 어떻게 해?”

유리 눈이 더 커졌습니다.

“그럼,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이걸 불어.”

준희는 유리에게 파란 나팔을 건네주었습니다.

유리는 나팔을 받아서 자기 유치원 가방에 넣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유리는 교실 안에서도 준희 옆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여전히 말은 잘 하지 않았지만 그림 그릴 땐 크레파스도 같이 쓰고 준희가 무엇을 그리나 보았습니다. 점심 먹을 때도 옆에 앉아 같이 먹었습니다.

 

준희 엄마가 유치원 선생님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원래 특수 유치원에 가려던 것을 준희가 하도 고집해서 일반유치원에 다니게 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준희한테는 무리가 있네요.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특수 유치원에 가서 준희에게 맞는 놀이와 교육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준희를 앞으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내일부터 준희는 다른 유치원에 다니기로 했다고 하십니다. 이 유치원은 오늘이 마지막이니 모두 안녕 인사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준희 얼굴은 시무룩했습니다.

유리는 준희가 가는 게 싫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모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준희에게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유리는 인사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던 준희 엄마가 들어와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준희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준희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유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문이 닫히고, 선생님은 준희 엄마가 가져오신 과자를 유치원 아이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유리는 가슴 속에서 뭔가 자꾸 차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점점 더 차올라 터질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준희가 준 파란 나팔을 유치원 가방에서 꺼내 들고 창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창밖을 향해 나팔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뿌우~~ 뿌우~~”

있는 힘을 다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 소리가 창밖을 넘어, 바람을 타고 날아갑니다.

유리는 나팔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입에 모았습니다.

“준희야~”

유리가 준희 이름을 불렀습니다.

“준희야, 안녕~~”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을 벗어나고 있던 준희가 돌아보았습니다. 창문에서 유리가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시무룩했던 준희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준희도 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유리 옆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모두 함께 준희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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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6-2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아이들끼리 서로 기대고 도우며 자라는군요..

hnine 2013-06-26 23:50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노아 2013-06-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찡하게 만드는 걸요. 감동적이에요.

hnine 2013-06-27 12:52   좋아요 0 | URL
너무 상투적이고, 새로울게 없다는 평을 동료들로부터 들었어요 ㅠㅠ
하지만 저에게는 소중한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잘라 2013-06-2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이 속에만 갇혀 있다가 빵 터지면 어떻게 해>... 이 부분에서 뭉클했어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준희는 마음이 참 고운 아이예요. 그림책으로 만들면 참 고운 그림책 될 것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뿌우 뿌우~"

hnine 2013-06-27 16:47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읽어주셨군요. 제가 안되는 솜씨로 끄적거린 것을 누군가 읽어주기만 해도 저는 그냥 감격~ ^^
저도 저런 나팔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안그래도, 아이가 하는 말인데 어른 말투가 들어가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답니다. 그러니 아마추어 아니겠어요? ^^

잘잘라 2013-06-29 17:56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요즘은 잘 쓰지 않는 표현'이라고 한 것은 제가 쓴 댓글에 '마음이 고운'이라는 표현을 얘기한 것이어요. 오해하실까봐요^^;; (저는 예전부터 '곱다'는 말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잘 안쓰는것 같아요.)

hnine 2013-06-29 18:48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잘못 이해했군요 ^^

다락방 2013-06-2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잘 읽었어요, 나인님.

hnine 2013-06-27 21: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다락방님.
한동안 동화쓰는 모임을 했었어요. 이제 한쪽으로 접기로 하면서 아쉬움에 그중 한편을 올려봤답니다.

아영엄마 2013-06-27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가 분 나팔소리가 가슴을 찡하게 울리네요.
나인님 오랫만에 들려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__)

hnine 2013-06-27 21:25   좋아요 0 | URL
아영엄마님, 정말 오랜만이어요. 세공주님들과 얼마나 바쁘세요. 막내도 많이 컸을텐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인데 별로 유쾌하고 재미있게 쓰는 재주가 저에게는 없네요.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더 관심이 가서요.
오랜만에 들러주신것만 해도 좋은데 가슴 찡하게 읽어주셨다고 하시니 제 마음이 오랜만에 활짝 개는 느낌이네요.

순오기 2013-06-2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 엄마 모습은 대부분 아이들 뜻은 알아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하는 우리들 모습이네요.
나팔을 부는 아이, 찡한 울림과 잔잔한 감동이 있어요~ 정말 그림책 만들면 좋을 거 같아요.^^

hnine 2013-06-28 09:18   좋아요 0 | URL
유리 엄마 자신은 모를거예요. 엄마들은 엄마들의 생각대로 아이를 사랑하니까요.
안그래도 나팔을 부는 장면이 머리 속에 그려져서 그림으로도 한번 그려볼까 시도해봤다가,... 절망했습니다 ㅠㅠ

프레이야 2013-06-28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동화 동시 습작하시는거에요? 정말 좋아요. 약자의 편에서 쓰라고 하더나구요, 동화는. ^^

hnine 2013-06-28 12:51   좋아요 0 | URL
이젠 "했었다"고 말씀드려야지요. 한 3년 했었나봐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분야가 아닌 것 같아서 접었답니다. 그동안 써놓았던 거 이렇게 심심할때 하나씩 올려보려고요 ^^

Grace 2013-07-0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준희야, 안녕~" 아니라, "준희야, 같이 놀자. 가지마~" 라고 외치고 싶어져요.
그래서 준희와 유리는 계속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며......
같은 대학을 나오는 겁니다. 계속계속 같이 있게 해주고 싶어져요!

말이 속에만 있다 빵 터지면, 하소연이나 불평말고 저도 나팔을 불고 싶어요~~
뿌우 ~뿌우~~~~^^

hnine 2013-07-05 12:28   좋아요 0 | URL
마지막을 그렇게 해도 좋겠어요. 그게 더 아이다운 솔직함일 것 같고요. 유리가 얼마나 헤어지기 서운했겠어요. 순순히 "안녕~"하는건 아이답지 않다는 생각이, 지금에서 드네요 ^^ 언젠가 한번 말씀하신대로 고쳐보고 싶어요.

안녕미미앤 2013-07-07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힝........................ 영화 같아요.. 다음편 계속 올려주세요. 어떻게 됐을까 계속 궁금해요 준희랑 유리..

hnine 2013-07-08 19:51   좋아요 0 | URL
저는 동화를 써도 꼭 이렇게 슬프게 결말을 맺는게 문제랍니다 ㅠㅠ

하늘바람 2013-07-13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이렇게 멋진 글이 있네요
음 요즘은 단편동화를 초등 1~2학년 읽기책으로 출판하기도 해요
그림동화로는 좀 내용이 길고 약간 주제가 어려워서요.
저학년 읽기책으로 만들면 아주 좋을 것같아요.
소통에 대한 주제를 더 명확히 하면 좋을 것같고요,
님을 응원합니다

2013-07-13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3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3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4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13-08-0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고운 아이들 이야기에 울컥했어요....

hnine 2013-08-04 12:07   좋아요 0 | URL
유부만두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자기 마음을 표현 못하는 아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없는 아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