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아도르노의 예술 이야기에 관한 책을 먼저 읽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20세기 독일어권 문화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을 모른다면, 이 책의 제목에 나온 '복제(複製)' 가 과학에서의 복제, 즉 유전자 조작에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분야가 다를 뿐이지 '본래의 것과 똑같이 만드는 일. 또는, 그 만든 물건.' 이라는 단어의 뜻은 같다.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 는 벤야민이 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라는 저서에서 표현한 내용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키워드 중심으로 풀어 설명한 책이다.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
강용수 지음
(주)자음과 모음
영화감독인 아빠, 추상화 화가인 엄마, 사진가인 삼촌, 연극배우인 이모의 환경 속에서 자라는 주인공은 학교 동아리 중 연극부에 지원하게 된다. 히틀러라고 불리는 6학년이 부장으로 있는 곳이다. 막상 연극부에 들어가고보니 10월의 연극제를 미리 준비하는 과정 보다는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는 히틀러를 위한 선거운동연습이 한참이다. 왜 연극부원들이 선거운동을 도와야 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주인공의 학교에서의 사건과 각각의 예술을 펼치는 가족 구성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벤야민이 말한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있다.
발터 벤야민 철학의 키워드 중 예술에 관련되어 잘 알려진 것은 아우라(Aura) 다. 아우라(Aura)는 그리스 신화에서 산들바람을 뜻한다. 산들바람처럼 너무 빨라서 아무도 뒤쫓아갈 수 없던 여신 이름이기도 했다. 보통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할 때 쓰기도 하는 단어다. 우리는 예술 작품에서도 아우라를 느낀다고 표현하기도 한다.(p30)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 의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의 이모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복제 방법이 늘어났기에 아우라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고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술 작품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거든. 벤야민은 아우라를 '유일하고도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인 현상' 이라고 했어. 쉽게 말해서 멀리 있는 것이 내 피부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지.
- p32
벤야민은 복제 기술로 인한 아우라 파괴를 나쁘게만을 볼 수 없었다. 복제 기술로 인해 예술 작품을 비롯한 모든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최초로 귀족층이 아닌 대중이 예술을 감상하고 즐기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복제 기술이 적용된 분야는 영화와 사진이다. 해당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의 아빠와 삼촌과의 대화를 통해 복제 예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의 예술은 귀족들만 즐길 수 있는 고급 문화였는데, '멀리 있으면서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 싶어했던 대중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복제된 예술품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예술 작품은 인쇄와 복제를 통해 상품화되면서 그 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예술품으로서의 권위를 잃었다고 설명한다. 최초의 예술은 종교적인 의식에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작품 자체가 가지는 '종교 의식적인 가치' 보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 가치'의 의미가 더 크다. 그러면서 경매, 재테크, 투자 수단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연극을 하는 이모와 추상화를 그리는 엄마를 통해서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대화가 진행된다. 세계에 대한 모든 체험은 미디어로 매개된(mediated) 체험이다. 벤야민은 영화와 연극을 구분하며, 영화는 아우라가 없지만 연극에는 아우라가 있다고 주장했다.
벤야민은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을 구분해. 경험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면 체험은 부서진 조각처럼 흩어져 있어. 유식하게 말하자면 파편화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전통과 공동체 의미가 없어진 대중예술에는 경험이 아닌 체험만이 있다고 할 수 있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각 작용은 매번 똑같은 것, 반복하는 것에 민감해지면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 했어.
- p95
연극부를 선거운동에 동원하는 연극부장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는 주인공은 가족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치적 예술에 대해 듣게 되기도 한다. 이어 악용되는 아우라는 어떤 것이 있는지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게 이끈다.
예술의 기능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종교적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 또 요즘과 같이 정치적 대상이 되기도 하는 거란다.
-p146
이어지는 [철학 돋보기] 코너에서 TV와 영화 등 대중매체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 즉 지각 방식을 속도와 폭력에 중독되게 만든다고 설명하는 저자는 벤야민이 살던 시대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때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당시 예술이 전쟁을 미화했던 것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을 풀어낸다. 독재자가 아우라를 강화해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히틀러의 예를 통해 '정치의 예술화' 를 설명하는 식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아우라를 강화하기 위하여 영화를 이용했다. 이야기 속 히틀러 연극부장은 회장이 되기 위해 연극부원들을 이용한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회장이 되면 연극부가 더 커지고 활성화되는 것이니 오히려 잘된 일일까. 연극부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며 고민을 계속한다. 책을 읽는 아이들과도 이야기해볼 수 있는 주제다.
책의 후반부에 수록된 [통합형 논술노트] 코너의 제시문에는 맥루한의 미디어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다. 아도르노의 예술이야기로 시작된 독서는 발터 벤야민의 복제 이야기를 지나 이제 다음 책인 맥루한의 미디어 이야기를 고르게 한다. 마침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 에서는 발터 벤야민이 주장하는 경험과 체험에 대한 설명 중에 체험 속의 '충격' 에 관한 대화가 있었다. 매일 방송을 통해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돼도 그것이 다음 날이 되면 잊히고 새로운 정보로 채워지는 체험에 대한 것이라던가, 사람 지각과 몸이 다양한 매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해가는 현상(p97)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맥루한은 이런 매체와 관련하여 어떤 주장을 펼쳤을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책이 책을 부르는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시리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