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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일기
소피 퓌자스.니콜라 말레 지음, 이정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평점 :
살아 있다는 건, 늘 무언가를 흘려보낸다는 것이 아닐까. 감정은 흐르고, 순간은 지나가고, 말은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어쩌면 우리는) 기록한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잠시나마 머물게 하기 위해.
소설가, 화가, 철학자 등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87인의 일기가 빼곡하게 수록되어 있는 『내면일기』 를 읽으며 나는 내 일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책 속의 각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지만, 사랑, 애도, 삶의 위기, 고독, 자기성찰, 역사적 사건, 여행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일기로 기록했다. 누군가가 쓴 일기를 읽다 보면 그 사람이 텍스트 너머의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삶을 살아낸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무언가를 걱정하고, 기대하고, 다짐했던 그 마음.그 순간의 체온이 문장 너머로 전해지는 『내면일기』 에는 내게 익숙한 유명 작가들뿐 아니라, 이름이 생소한 역사적 인물들의 일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책은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내밀함>, 2부는 <시선>, 3부는 <여행>에 관련된 일기들이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부는 주제에 포함되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2~3개의 장으로 다시 나뉜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일기는 1부의 1장 <사랑>편에, 프란츠 카프카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1부의 3장 <고독과 자기성찰> 편에 수록되어 있는 식이다.
각 페이지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일기에서 발췌한 주요 텍스트와 필사본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한 인물의 일기에서 발췌한 텍스트와 그 인물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글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앤솔로지적 배열의 구성을 취한다. 각 인물들은 서로 직접적인 인간관계나 서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일기’라는 형식과, 내면의 경험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일기라는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는 해설이 더해져, 일기라는 장르의 깊이를 생각해볼 수 있게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친숙한 인물들의 일기부터 먼저 찾아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는 필사도 해보면서 문장을 음미해보기도 했다.
인물들은 시대, 국적, 직업, 성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각 일기는 사랑, 상실, 창작, 고독, 역사적 격변, 자기성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기 형식의 짧은 글들을 통해, 각기 다른 삶의 순간과 감정을 진솔하게 느껴보게 된다. 2부의 <시선> 편은 다양한 시선들을 만나보게 되어 좋았다. 특히 1장의 <일상 예찬>에 포함된 일기들은 내 일상의 시선들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어떤 일기들을 통해서는 약간의 관음적 호기심을 충족하기도!
3부 <여행> 에 대한 일기들은 모험의 동반자가 된다. 3부의 일기들의 필사본에는 텍스트 뿐만 아니라 스케치들이 포함되어 있는 일기들이 또 다른 매력들을 뽐낸다. 여행 중 낯선 환경에서의 경험, 혹은 일상적인 삶의 소소한 순간들까지 여러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들의 글들을 만난다.
책의 서두에는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와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으며, 필리프 르죈Philippe Lejeune의 해설이 마지막에 실려 있다. 프롤로그에서 책의 의도와 일기라는 장르의 의미를 설명하고, 본론에서 각 인물별로 일기 발췌문과 해설, 필사본 이미지를 보여준 후, 마지막 해설에서 정리한다. 책 속 인물들은 자신과 주변 세계를 관찰하고, 그 속에서 발견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기록했다. 일기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의 결과라는 점을 공감하게 되는 지점이다.
“나는 누구였지?” “어떤 감정을 느끼며 이 하루를 버텼지?”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그때, 일기 속에 써둔 문장을 읽어본다. 아무도 모르게 적어둔 나의 말. 눈물이 그렁했던 날, 너무 좋아서 말없이 웃었던 밤, 혹은 이상하게 쓸쓸했던 아침. 그 문장을 다시 만나는 순간, 나는 ‘그때의 나’와 다시 연결된다.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제대로 통과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내면 일기』 를 통해 책 속 인물들의 삶과 잠시나마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다.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인물들에 대해 엿볼 수 있지만, 각 인물의 이야기가 짧게 스쳐 지나가 깊이 있는 서사에 목마름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그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는 선순환이 반복된다. 화가의 그림을, 작가의 책을, 역사가의 역사적 사건들을 찾아보다보면 책이 책을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