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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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서 길을 걷다가 멈추는 순간이 많아졌다. 공원에, 건물 앞에, 그리고 내가 걷는 거리에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걷다가 예술』 은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가지 않고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23인 예술가들의 조각, 건축, 회화, 미디어아트 등을 소개하니 말이다.




현직 기자인 저자가 한국경제신문 문화예술 플랫폼 ‘아르떼’에 ‘걷다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연재한 칼럼을 엮고 수정한 책으로, 연재 당시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의 작품들에 한정되었으나 이번 단행본에는 경주, 강릉, 부산 등 ‘지방편’을 추가하여 보다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즐길 수 있게 보완되었다.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상대를 꿰뚤어보는 듯한 동공. <아이 벤치> 앞에 앉으면 마치 작품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방문객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바뀝니다.

부르주아가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바라본다'는 행위야말로 세상을 지각하는 주체적인 행위이고, 예술작품을 통해 이것을 관람객에게 직접 느끼도록 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생전에 이 작품에 대해 "그 누구도 내가 '본다'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주체성'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 p39


호암 미술관에서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를 보고 왔지만,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 6층에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이 벤치>는 대한민국 최초이자 오래된 백화점인 신세계 백화점 본점 6층에 조성된 옥상정원 트리니티 가든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방문객이 의자처럼 앉을 수도 있다고! 옥상정원에는 호안 미로, 알렉산더 콜더, 헨리 무어 등 세계적 거장들의 조각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오랜만에 명동도 가볼 겸 달려가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실물이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호암 미술관에서도 본 것 같은 작품이었다. 급히 찍어놨던 사진을 뒤진다. 호암 미술관 작품도 앉아봐도 되는 거였을까?




이 책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여행 가이드북이 될 것 같다. 명동 신세계백화점을 들렀으면 가까운 광화문 흥국생명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을 보러가면 된다. ( 사실 근처에서 프로젝트 하면서 많이 봤던 작품인데, 그 때는 그냥 구조물로만 인식했었다... )


그동안 생소했던 설치미술이란 개념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준 대작으로, 높이 22미터, 무게 50톤짜리 작품이다. 35초마다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망치질을 하는데, 나도 신기하게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이 해머링맨은 세계 곳곳에 형제들이 있다고 한다. 총 11명의 해머링맨 중 광화문의 해머링맨은 세계 일곱 번째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최초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1분 17초 간격으로 망치질하도록 설계했지만 '너무 느리다' 라는 의견에 간격을 줄인 것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한국의 해머링맨이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를 배운 것 아니냐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고! ( 사실 제게는 35초도 느려보이더라는! ) 1년에 24번 '건강검진'을 받는 이 작품은 연간 유지보수 비용만 7000만원이 든다고 한다. 거의 20년 근속인만큼 이제는 부장급 연차인 해머링맨을 다시 만나러 광화문에 가봐야지. "매일 똑같은 일상에도 지치지 않고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현대인이여, 힘내라!"(p19)


“예술은 언제나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도 예술이다”.

- 책 소개 중에서


몇일 전 다녀온 여의도 더현대서울 근처에도 작품이 있었다. 건물 외부의 '빨간색 철골' 이 작품이었다고!! 2020년 문을 연 파크원의 외부 기둥 골격은 모서리마다 강렬한 빨간색의 철골이 띠처럼 둘러져 있다. 리처드 로저스는 청,적,황,백,흑 다섯 가지 색의 '단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미래지향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듯한 붉은색을 선택했다고. 파크원 옆의 더현대서울도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처럼 내부의 기둥을 없애도 새빨간 크레인 8개가 밖을 지탱하도록 해, 보다 넓은 공간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했다. 파크원의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파크원이 대작인지, 흉물인지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지만, 여의도를 지날 때 빨간색 철골 건물이 보인다면, 로저스의 삶을 한번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p57

책은 <걷다가, 돌의 시간>, <걷다가, 빛멍>, <걷다가, 내가 뭐?>, <걷다가, 인간> 이렇게 4장으로 나뉜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은 예술작품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읽고 나면 꼭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출근길에 만난 조형물, 백화점에 놓인 조각상, 오피스텔 정문에 설치된 미디어 아트 등 우리 주변의 작품들을 오롯이 바라보게 된다.


제 나름대로 찾은 답은 '예술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작품일지라도 그 뒤에는 수십 년간 반복된 트라우마와 처절한 고통, 그 속에서 찾아낸 희망과 삶의 의미,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집념과 고뇌가 모두 녹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거리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조각, 호텔 로비 한편에서 마주했던 그림이 새삼 달라보인다는 것도요.

- 작가의 말중에서


정말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선물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강력 추천.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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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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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회사 근처에 어린이집 아이들의 벼룩시장이 열렸다.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행사로 아이들은 준비한 물건들을 어른들에게 판다. 현금이 없는 회사원들을 위해 친절하게 QR코드로 카카오페이 결제를 안내하면서 말이다. 원서로만 있던 그림책이 보이길래 한 권 사고, 소중한 지구를 지키기 위해 기부를 했더니 쿠폰을 한 장 준다. 쿠폰은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만들어주는 간식으로 바꿔올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 모습에 행복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안보윤 작가가 <매일경제>와 <세계일보>에 연재한 칼럼들을 중심으로 엮은 수필집 『외로우면 종말』 이다. 마침 학교에서 이름 모를 학생들의 신이 난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다른 사람들의 예쁜 부분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는데, 문득 스스로를 어여삐 여긴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마음을 헤아리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는 눈 밑이 까맣고 우중충하니 맛있는 것을 먹어볼까. 향이 진하고 고소한 커피와 크림브륄레를 곁들이면 즐거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겠지. 무르고 진한 연필심으로 책에 밑줄을 실컷 그으며 좋아하는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늘의 나를 다독여 내일로 보내면, 내일의 나는 적어도 오늘보다 예쁘고 신이 나지 않을까.

- p73. 어여삐 여기는 마음





방금 읽은 문장을 필사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필사 노트를 꺼냈다. 나는 에세이를 읽을 때 필사를 더욱 많이 하게 되는 듯 하다. 필사를 하다보면 내 일기에도 이런 멋진 문장들이 적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은 담담하고, 언어는 정제되어 있으며, 감정이 흐르되 과잉되지 않는다.



책은 <그날의 줄넘기>, <외로우면 종말>, <아주 작은 쉼표> 의 제목의 3부로 나누어 일상에서 건져 올린 순간들, 타인의 손길과 우연한 친절, 외로움의 내부 풍경을 조용하고도 선명하게 들여다본다. 산문집의 표제로 선택된 제목은 개인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감정 변화를 드러내며 묘한 여윤을 주고 있기도 하다. 책 속 에세이들은 거창한 플롯 없이, 한 편 한 편이 ‘오늘의 단상’처럼 읽힌다. 일상을 통과하는 감각들이 읽는 이들에게 작은 결을 남기게 한다.


외로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의 틈이 아닐까.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 일상 속 작은 친절, 타인의 배려는 외로움의 배경 위에서 반짝이는 조각처럼 빛나고, 그런 것들이 쌓여 위로와 삶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친절을 경험하고도 싶지만, 그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하루.


아이들이 담아준 과자가 참 기분좋게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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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솔루션을 위한 생성형 AI - 안전성, 확장성, 책임성을 고려한 최신 클라우드 LLM 솔루션 설계
폴 싱.아누라그 시리시 카루파르티 지음, 김상필 외 옮김 / 에이콘온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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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업계의 핫트랜드라고 하면 역시 AI 일 것이다. 특히 생성형 AI 는 논의의 최전선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한 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회사에서 AI 관련한 사람들을 뽑는 이유다. 이 책은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컴퓨팅의 융합이라는 최신 트렌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실무 지침서로 생성형 AI의 원리부터 시작해, 대규모 언어 모델(LLM)과 트랜스포머 모델의 발전사를 설명하고, 클라우드 환경에서의 통합과 실제 활용 방안을 폭넓게 다루는 책이다. IT 업계의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본 가이드 중의 한 권이다. 다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클라우드 컴퓨팅 및 관련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책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다시 5부로 나뉘어 분류된다. 1부는 1장과 2장을 포함하고 있다. 1장에서는 클라우드에서 엔드 투 엔드 생성형 AI 솔루션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역사, 핵심 개념, 필수 정보들을 강조하며 워밍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2장에서 모델 기능의 기본이 되는 LLM의 NLP 기능과 트랜스포머 아키텍처에 대해 풀어낸다. 

2부에서는 LLM 맞춤화를 위한 기술들을 소개한다. 미세 조정(fine-tuning), 검색 증강 생성(RAG),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등 최신 기술을 실무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이를 통해 LLM 기반 애플리케이션의 개발, 운영, 확장, 배포 전략을 심도 있게 다룬다. 

3부에서는 에이전트, 코파일럿, 자율 에이전트와 같은 개념을 살피면서, 시맨틱 커널, LangChain, AutoGen 에 대해 설명한다. 자율 생성형 AI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다. 즉 개발프레임워크와 LLMOps, 그리고 배포 및 확장전략을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4부에서 데이터 프라이버시, 보안, 책임 있는 AI와 같은 현실적 이슈에도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단순히 기술적 설명에 그치지 않고,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마주치는 윤리적·법적 문제에 대한 가이드까지 제공하는 등 AI 실무자와 클라우드 엔지니어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기에, 주위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읽었다. 


생성형 AI의 핵심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실제 클라우드 환경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코드 예시를 통해 실용적으로 풀어낸 점이 눈에 띈다. 예제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Azure AI 클라우드와 Open AI 렌즈를 사용한다. 깃허브에 실습 예제가 올라와 있어 활용하기에도 편하다. 

물론 실무를 위한 책이다보니 AI와 클라우드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이에게는 다소 진입 장벽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특정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많아, 다양한 플랫폼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살짝 아쉬운 점도 있었다. 최신 트렌드와 현실적 고민을 모두 반영하며, 명확한 설명과 실습 중심의 구성으로 초중급 실무자에게 특히 추천해보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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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땀 소설향 앤솔러지 1
김화진 외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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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초록 땀』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저마다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앤솔러지로, <소설향> 시리즈의 첫번째 권이다.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궁금하여 먼저 찾아 옮겨본다.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향’은 ‘소설의 본향, 영향, 반향’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으로 다시 선보이며 2세대 ‘소설, 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설향 앤솔러지’는 소설에 대한 열의와 희망을 되새기고, 한국문학의 오늘과 내일을 채우는 작가들과의 만남의 장을 지속적이고도 발 빠르게 마련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출판사 소개 중에서





소설향 시리즈 첫번째 권의 테마는 ‘색’과 ‘향기’다. 초록과 검정 등의 '색'과 홍차향 등의 '향기'라는 감각적 매개체를 활용하여 작가마다 각기 다른 시선과 감각적 언어로 테마를 변주하면서 일상의 불안, 관계, 상실, 성장, 인간관계 등의 테마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각 작품마다 <작가노트> 코너를 두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작품 의도를 밝히고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표제작인 김화진 작가의 「초록 땀」에서 ‘초록’이라는 색은 인물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투영하면서 주인공의 정체성, 불안, 그리고 성장과 깊이 연결된다.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에 갑작스레 셔터가 내려가서 장 통하던 공기나 물이나 바람이나 그런 것들이 통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p18)'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숨쉬는 게 힘들어졌던 화자는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인 보영의 숨을 부러워하며 지켜보다가 보영이 초록 땀을 흘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보영은 이 땀을 자신의 약점이 아니라 삶을 정의하는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런 보영과 소통하게 된 주인공은 '초록의 흔적이 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p40)'는 믿음으로 초록 땀 하나를 산다.


언젠가부터 안 좋은 쪽으로만, 불퉁한 쪽으로만 흘러가는 내 생각들, 낯선 삶을 걸으며 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는, 닫힌 창문 뒤에서 성격 나쁜 마녀처럼 세상 탓을 하는 그런 투덜거림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기를 제발 멈추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고 나는 초록 땀을 창가에 두었다. 땀이 말라서 초록의 흔적만 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까. 

- p40, 김화진, 「초록 땀」


감각이라는 것은 인지하기에 앞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던가. '감각으로 보는 세계는 그러기에 더욱 기민하게 현실을 포착하며 우리의 의식을 보다 깊고 넓게 확장한다.' 각 작품 속 감각들은 단독이 아니라 상호 얽혀 인물의 내면이나 인간관계, 사회적 조건까지 연결하는 상징적 언어로 활용된다. 빛의 온도, 피부에 밴 땀, 공간 안에 드리운 잔상 등 시각 및 촉각적 묘사가 심리적 분위기를 촘촘하게 환기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검정이라는 색을 통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상실과 공허, 세상에서 길을 잃는 감정과 현실을 그린 김희선 작가의 『뮤른을 찾아서』 는 삶의 빈틈, 상실의 감정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화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어떤 색깔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이 현상이 자신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 혹은 전 지구적으로 퍼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 비현실적인 현상의 중심에는 물리학자 출신의 예술가가 존재하고 그의 집은 블랙홀 같은 어둠으로만 이루어져있다. 검정은 단순히 어둠이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서 길을 잃거나 소외된 감정, 무엇인가를 잃고 난 뒤의 깊은 공허와 절망, 그리고 현실에서의 소속감 부재까지 확장되어 진다. 


가서 사람들에게 그날 사라진 색이 뮤른이라고 전하세요. 뮤른을 기억해보라고, 그게 어떤 사물에 그 색이 깃들어 있었는지 떠올려보라고, 전해달란 뜻입니다. 나에게 뮤른이 이런 색이라면 당신에겐 뮤른이 저런 색이고, 만약 이 지구에 8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뮤른은 80억 개의 빛깔을 띨 거라는 얘기도, 꼭 덧붙이고요

- p211, 김희선, 『뮤른을 찾아서』 



잃어버린 색은 제목 속의 단어인 '뮤른'이다. '곧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p211) 화자가 나지막이 그 색깔 이름을 중얼거리는 마지막 장면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내 세계에서도 어떤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김희선 작가는 작품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마다의 해석으로 다가가기에 작가노트에서는 무지개의 일곱가지 색에 대해 서술해본다고 하면서, '무지개의 진짜 색깔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을 뿐이다. 무지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색깔이 그러하다(p220)' 라고 전하고 있다. 


앤솔러지 『초록 땀』 의 각 단편의 이야기들에는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장면들 속에 시각, 후각, 촉각 등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감각의 부스러기처럼 읽는 이의 마음에 쌓인다. 감각과 존재가 연결되며 읽는 이들만의 '색'과 '향'을 인식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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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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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해의 반이 지나갔다. 출퇴근길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열된 열섬의 공기를 마시며 휴가를 떠올리게 되는 계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비행기표를 먼저 찾아보게 되는 여행 패턴. 국내가 아닌 이상 여권 유효기간부터 확인하게 된다. 그러고보니 여권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여행면허』는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와 한나라 중국에서부터 현대의 여권 심사대와 난민 캠프에 이르기까지, 여권의 기원을 추적하며 그 문화적·정치적 의미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책이다. 특히 저자는 단순히 제도적·법적 측면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가, 작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인물들의 경험과 문학·영화·예술 속 여권의 모습을 통해 여권이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권이라는 이 일상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문서를 통해 인간의 이동, 정체성, 국가 권력, 그리고 자유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세계사 혹은 문화사적 탐구서, 혹은 사회학 서적 그 어딘가에 머무는 책.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는 다시 1~3장으로 나뉘어 서술된다. 1부는 여권의 일종의 ‘선사시대’로, 여행 허가증의 초기 형태와 그 사회적 맥락을 다룬다. 2부에서는 여권 제도의 본격적 등장과 제도화 과정을, 3부는 오늘날 여권이 갖는 의미와 여전히 남아 있는 배제와 통제의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모더니스트 작가 앙드레 지드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겪었던 ‘여권의 번거로움’을 편지에서 토로하거나, 슈테판 츠바이크가 1914년 이전에는 ‘지구가 모두의 것이었다’고 회상하는 대목 등은 여권이 개인의 자유와 이동성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여권이 국가 행정체계 안에서 어떻게 서류적 정체성을 구축해왔는지에 관해서도 다룬다. 서류 속의 우리는 실제의 우리가 아니라, 정부가 인정한 이름과 사진, 생년월일, 국적 등의 데이터적 주체다. 이런 점에서 여권은 오늘날 디지털 신원 확인 시스템이나 생체 인식 ID와도 궤를 같이한다.

문학적이고 유려한 문체, 폭넓은 사례,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이 책은 여권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게도 한다. 예술가와 지식인, 작가, 음악가 등의 다양한 여권에 대한 경험이나 여권이 등장하는 문학, 영화적 장면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부분은 단순한 제도사나 정치사와 달리, 인간의 경험과 감정, 예술과 사유의 영역까지 아우르며 여권이 어떻게 현대 세계와 인간성을 정의해왔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여권 신청서에 "writer(작가)" 대신 "waiter(웨이터)"로 오기되었던 일화, 다다이즘 예술가(다다이스트)였던 시인 폴 엘뤼아르가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에게 여권을 보내줘 국경을 넘을 수 있던 사연, 거트루드 스타인의 『자서전』 과 공식적인 여권의 관계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 외에도 난민의 절박한 탈출, 예술가의 국경 통과, 여행자와 망명자의 불안과 기대 등은 여권을 둘러싼 감정의 스펙트럼을 드러낸다. 여권이 단순한 행정적 문서를 떠나 인간성을 정의하는 문화적 매개체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저자는 여권이 "다른 어떤 역사적 문서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고 전한다. 내 여권에 찍힌 도장, 사진, 만료일, 내 국적등은 모두 내가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고 싶은 곳,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과 경험을 상기시키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여권에는 내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왜 갔는지, 어디에 가지 못했는지, 어떤 경계에서 멈추었는지 등, 개인의 선택과 한계,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나의 개인적 여행경험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여권을 들여다보는 짧은 시간이 어쩌면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여권이라는 일상적인 사물 하나로, 근대국가의 작동방식, 국가와 개인의 관계, 행정기술의 역사, 인종과 젠더의 편견, 그리고 자유와 감시의 딜레마까지 짚어내는 지적 여정을 떠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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