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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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책 제목만 봤을 때 폭력의 역사나 정치적 테러를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읽다보면 곧, 우리가 뉴스에서 쉽게 소비하는 총격, 폭동, 전쟁 같은 “가시적 폭력”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언어와 제도,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스며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흔히 '폭력'이라 정의하는 개념의 지평을 완전히 뒤흔드는 도발적인 책이다. ( 사실 지젝의 책에서 도발적이지 않은 책이 있던가.. )



지젝은 이 책의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sideways)' 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서문에서부터 우리가 뉴스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끔찍한 학살, 테러, 범죄와 같은 이른바 '주관적 폭력'에만 매몰될 때, 정작 그 비극을 가능케 하는 더 거대한 힘을 놓치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책에 대해 '도덕적 감상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냉혹한 찬물' 이라던 미디어의 한줄평을 먼저 옮겨본다.

서문에서 저자는 폭력을 세가지 층위로 분류한다. 먼저 언급한 주관적 폭력에 더하여 상징적 폭력, 그리고 구조적 폭력으로 말이다. 2장에서 이야기하는 '언어적.인종적 폭력'과 5장의 이야기는 상징적 폭력으로 읽혔다.3장의 자선적 자본주의와 4장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구조적 폭력으로 묶어본다. ( 개인적 의견이다.) 지젝은 구조적 폭력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내게는 상징적 폭력이 먼저 다가왔다.

지젝은 2장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라는 제목을 선택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타자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관용(Tolerance)'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타인의 문화나 고통에 개입하지 않으려 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타자를 비인격화하는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이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욕망의 주체로서의 타자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이처럼 두려워하는 것인가? 커피에서 카페인을 제거하듯이 왜 타자에게서 그들이 가진 주이상스주1)라는 본질을 빼앗으려 하는가?

주1) 주이상스(jouissance) : 쾌락이 고통을 줄이고 쾌감은 늘리려고 하는 쾌락원칙을 따르는 반면에, 주이상스는 고통마저도 감수하는, 혹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주이상스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즐김이다.

- p10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 (p109, 페터 슬로터다이크)" 라는 지젝이 언급한 문장에 공감해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p109)". 일단 끄덕끄덕.

이야기는 언어 그 자체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기호 속에 이미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힘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언어가 평화의 도구가 아니라 타자를 특정 범주에 가두는 첫 번째 폭력의 현장' 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정상성 강박” 에 대한 여러 키워드들, 이를테면 '좋은' 대학, '좋은' 회사, '자가' 아파트 등은 지젝이 말하는 상징적 폭력과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폭력이 총이나 주먹이 아니라 “너는 뒤처지면 안 된다”는 언어로 작동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지점.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풀어가면서 많은 작품들을 소환하고 있다. 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의 예를 들자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나 예이츠의 시구, 그리고 닐 게이먼의 『샌드맨』의 문학작품은 물론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크시의 <희생> 등을 넘나든다. 지젝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라캉과 들뢰즈 또한 빠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헤겔과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도 거든다. ( 지적 도전의식을 불태우게 하는지라 밑줄 인덱스를 빼곡하게 붙이며 여러 번 읽어야 했다. )


구조적 폭력 측면에서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내부의 폭력을 해부한 작업”으로, 지젝은 폭력을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의 작동 방식으로 읽어낸다. 지젝은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인물들이 한편으로는 시스템적 폭력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선을 통해 그 피해를 복구하려 드는 행위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자선적 자본주의(Liberal Communist)' 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지젝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자선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적 폭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마취제'에 불과하다. 과거 중세 시대에 죄를 짓고 면죄부를 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빌 게이츠의 이중성은 소로스의 이중성과 완전히 판박이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 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중략>

그들은 자본주의적 절차 그 자체에 내재된 자기 부정을 몸소 보여준다. 그들이 자선사업을 벌이고 공공복지를 위해 막대한 기부를 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특성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자선 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이 논리적으로 낳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이는 철저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도 불가피하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0, 61 <SOS 폭력>

이 지점은 우리나라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노동 구조는 유지하면서 ‘상생 광고’를 하는 기업, 장시간 노동 문화는 남아 있는데 웰빙 캠페인을 진행하는 사례 등 우리는 한번쯤 "왜 이런 '치유'가 계속 필요할 정도로 시스템은 사람들을 소진시키는가?" 란 질문을 던져보지 않았던가.


책의 말미에 미주만 15페이지, 참고문헌만 5페이지다! 가나다 순으로 찾아보기도 제공되어 있어, 읽다가 떠오르는 키워드 중심으로 다시 찾아보기에도 수월하다. ( 찾아보기를 자주 확인하다 보니 발터 벤야민만 14곳에서, 니체는 11곳에서, 라캉은 25 곳에서 언급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소소한 재미 )


폭력에 반대한다는 거짓 주장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해방적 폭력을 승인하는 데 이르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작 그들이 혐오하는 그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이다. 우리는 폭력의 궁극적 원인을 이웃에 대한 두려움에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언어 자체에 내재된 폭력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중략>

우리는 오늘날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는 지배적 관념으로서 관용이 가진 한계를 지적했다. 그리고 끝으로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신적 폭력이란 범주의 해방적 차원을 직접 다루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가?

- p305, 에필로그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직접 정리해주는(!) 교훈 세 가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200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난민 문제, 혐오 정치, 금융 위기 이후의 불평등, 알고리즘과 미디어가 생산하는 언어적 폭력까지 지젝이 말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은 오히려 지금 더 일상적인 것이 된 듯 해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 소비하는 뉴스, 무심코 받아들이는 경제 시스템 역시 폭력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그는 우리가 '선량한 시민'으로서 누리는 일상이 사실 얼마나 거대한 시스템적 폭력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직시하게 한다. 대중문화, 영화, 정치적 사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지젝의 서술 방식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민낯'을 보게 만든다. 결국 뉴스에서 만나는 폭력 사건이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배경음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다소 불편하다. (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책일지도.. ) 지젝의 이런 '측면에서의 성찰'은 우리가 마주한 비극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렌즈가 되어준다.

그러니 독서 토론을 해보고 싶은 책으로 '찜콩'해두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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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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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옷을 입고 나온 『반짝반짝 빛나는』 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보았다. 국내 출간 25주년을 기념하여 커버가 있는 디자인으로 새로 나왔다. 커버부심이 가득한 내게 선물같은 책! 이 소설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권에서도 독특한 감성과 파격적인 설정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정상성에 대한 우아한 반격' 이라고 했던 평도 떠오른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는 아내 쇼코와 동성애자인 남편 무츠키, 그리고 그의 연인 곤이 이루는 기묘한 삼각관계를 그려낸 작품이다. 지금에서야 그렇게 충격적 소재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일본에서는 1991년, 한국에서는 2001년)는 동성애나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재가 매우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금기'처럼 받아들여졌던 시대라 꽤 파격적인 설정으로 주목받았었다. 나는 이 책으로 에쿠니 가오리란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이야기는 쇼코와 곤의 1인칭 시점으로 번갈아 전개되는 구성이다. 알코올 의존증이 있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쇼코가 화자가 될 때는 남편 무츠키와 그의 연인 곤 사이의 기묘한 관계가 '부도덕'이 아닌 '반짝이는 무언가'로 미화되거나 수용되는 과정을 읽는 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쇼코는 남편 무츠키와 그의 연인 곤을 관찰하는데 질투보다는 애정어린 호기심의 시선으로 서술한다. 덕분에 그들의 관계가 막장 드라마가 아닌 '성장통을 겪는 아이들'의 관계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무츠키와 곤이 공유하는 세계에 끼어들 수 없는 쇼코의 외로움이 그녀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 절절하게 전달되는 듯.

무츠키에게 쇼코는 무엇보다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쇼코가 자신의 시점에서 스스로를 '엉망진창'이라고 비하한다면, 무츠키의 시선에서 그녀는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는 투명한 유리알' 같은 존재다. 무츠키는 쇼코의 정서적 불안과 알코올 의존을 병명이 아닌, 그녀가 가진 고유한 특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돌발 행동을 보며 당황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상처받지 않고 이 안온한 공간에 머물게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게이인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 준 쇼코에게 깊은 경외감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곤과의 사랑이 현실적인 갈등을 동반한다면, 쇼코와의 생활은 무츠키에게 일종의 정서적 안식처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종종 미니멀리즘이라고도 불리는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는 감정을 과잉해서 쏟아내지 않고, 담담하게 일상을 서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외로움이 더욱 극대화되어 다가온다. 문장은 투명하고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서늘한 슬픔이 깔려 있다. '마치 잘 닦인 유리잔을 보는 것 같다.' ( 다른 리뷰어의 이 문장이 인상적이었기에 옮겨둔다.)

​결혼 전에 읽었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여러가지 다른 면들이 부각되어 보인다. 부모님의 기대나 사회적 시선 때문에 시작된 결혼이지만, 결국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찌보면 우리의,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30년 전 소설이지만 오늘날 읽어도 어색함이 없는 까닭은 그만큼 에쿠니 가오리가 시대를 앞서간 감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혈연이나 전통적인 성 역할이 아닌 서로의 결여를 인정하는 정서적 연대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드는지 보여주면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나 '개인의 상처'로 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여질 듯 하다.

과거의 책 표지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찾아 비교해보기도 했다. 이번 개정판은 현대에 쓰는 어휘로 번역을 다듬은 것은 물론 책의 판형도 하드커버로 바뀌었고, 표지도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세련된 디자인을 채택했다. 제목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무츠키는 잠들기 전에 별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p11) 이란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려보게도 된다. 쇼코는 비극적일 수 있는 상황을 '반짝거린다'거나 '예쁘다'고 느끼고는 했다. 작가가 의도한 '투명한 슬픔'을 극대화하는 장치다. 표지가 반짝거리면서도 어딘가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이리라.




작가의 말을 읽다보니 각 장의 타이틀 중에 <잠자는 자와 지켜보는 자> 및 <별을 뿌리는 사람>은 그림에서 차용한 제목이라는 것을 알았다. 관련된 시메온 솔로몬의 <The Sleepers and ont that watcheth> 이 책 속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흑백으로 수록되어 있어 다시 그림을 찾아본다. 오! 소설의 느낌과 비슷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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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예술
이선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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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서 길을 걷다가 멈추는 순간이 많아졌다. 공원에, 건물 앞에, 그리고 내가 걷는 거리에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걷다가 예술』 은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가지 않고도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23인 예술가들의 조각, 건축, 회화, 미디어아트 등을 소개하니 말이다.




현직 기자인 저자가 한국경제신문 문화예술 플랫폼 ‘아르떼’에 ‘걷다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연재한 칼럼을 엮고 수정한 책으로, 연재 당시 서울, 경기 등 수도권의 작품들에 한정되었으나 이번 단행본에는 경주, 강릉, 부산 등 ‘지방편’을 추가하여 보다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즐길 수 있게 보완되었다.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상대를 꿰뚤어보는 듯한 동공. <아이 벤치> 앞에 앉으면 마치 작품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벤치에 앉는 순간, 방문객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바뀝니다.

부르주아가 신경 쓴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바라본다'는 행위야말로 세상을 지각하는 주체적인 행위이고, 예술작품을 통해 이것을 관람객에게 직접 느끼도록 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생전에 이 작품에 대해 "그 누구도 내가 '본다'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주체성'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 p39


호암 미술관에서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를 보고 왔지만,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 6층에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이 벤치>는 대한민국 최초이자 오래된 백화점인 신세계 백화점 본점 6층에 조성된 옥상정원 트리니티 가든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방문객이 의자처럼 앉을 수도 있다고! 옥상정원에는 호안 미로, 알렉산더 콜더, 헨리 무어 등 세계적 거장들의 조각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오랜만에 명동도 가볼 겸 달려가봐야 겠다는 생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실물이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호암 미술관에서도 본 것 같은 작품이었다. 급히 찍어놨던 사진을 뒤진다. 호암 미술관 작품도 앉아봐도 되는 거였을까?




이 책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여행 가이드북이 될 것 같다. 명동 신세계백화점을 들렀으면 가까운 광화문 흥국생명 앞,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 맨>을 보러가면 된다. ( 사실 근처에서 프로젝트 하면서 많이 봤던 작품인데, 그 때는 그냥 구조물로만 인식했었다... )


그동안 생소했던 설치미술이란 개념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준 대작으로, 높이 22미터, 무게 50톤짜리 작품이다. 35초마다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망치질을 하는데, 나도 신기하게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이 해머링맨은 세계 곳곳에 형제들이 있다고 한다. 총 11명의 해머링맨 중 광화문의 해머링맨은 세계 일곱 번째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최초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1분 17초 간격으로 망치질하도록 설계했지만 '너무 느리다' 라는 의견에 간격을 줄인 것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한국의 해머링맨이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를 배운 것 아니냐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고! ( 사실 제게는 35초도 느려보이더라는! ) 1년에 24번 '건강검진'을 받는 이 작품은 연간 유지보수 비용만 7000만원이 든다고 한다. 거의 20년 근속인만큼 이제는 부장급 연차인 해머링맨을 다시 만나러 광화문에 가봐야지. "매일 똑같은 일상에도 지치지 않고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현대인이여, 힘내라!"(p19)


“예술은 언제나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도 예술이다”.

- 책 소개 중에서


몇일 전 다녀온 여의도 더현대서울 근처에도 작품이 있었다. 건물 외부의 '빨간색 철골' 이 작품이었다고!! 2020년 문을 연 파크원의 외부 기둥 골격은 모서리마다 강렬한 빨간색의 철골이 띠처럼 둘러져 있다. 리처드 로저스는 청,적,황,백,흑 다섯 가지 색의 '단청'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미래지향적이면서도 한국적인 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듯한 붉은색을 선택했다고. 파크원 옆의 더현대서울도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처럼 내부의 기둥을 없애도 새빨간 크레인 8개가 밖을 지탱하도록 해, 보다 넓은 공간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했다. 파크원의 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파크원이 대작인지, 흉물인지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지만, 여의도를 지날 때 빨간색 철골 건물이 보인다면, 로저스의 삶을 한번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p57

책은 <걷다가, 돌의 시간>, <걷다가, 빛멍>, <걷다가, 내가 뭐?>, <걷다가, 인간> 이렇게 4장으로 나뉜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은 예술작품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읽고 나면 꼭 세계적인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출근길에 만난 조형물, 백화점에 놓인 조각상, 오피스텔 정문에 설치된 미디어 아트 등 우리 주변의 작품들을 오롯이 바라보게 된다.


제 나름대로 찾은 답은 '예술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단순해 보이는 작품일지라도 그 뒤에는 수십 년간 반복된 트라우마와 처절한 고통, 그 속에서 찾아낸 희망과 삶의 의미,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집념과 고뇌가 모두 녹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거리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조각, 호텔 로비 한편에서 마주했던 그림이 새삼 달라보인다는 것도요.

- 작가의 말중에서


정말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선물하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강력 추천.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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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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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회사 근처에 어린이집 아이들의 벼룩시장이 열렸다.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행사로 아이들은 준비한 물건들을 어른들에게 판다. 현금이 없는 회사원들을 위해 친절하게 QR코드로 카카오페이 결제를 안내하면서 말이다. 원서로만 있던 그림책이 보이길래 한 권 사고, 소중한 지구를 지키기 위해 기부를 했더니 쿠폰을 한 장 준다. 쿠폰은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만들어주는 간식으로 바꿔올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 모습에 행복한 엄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안보윤 작가가 <매일경제>와 <세계일보>에 연재한 칼럼들을 중심으로 엮은 수필집 『외로우면 종말』 이다. 마침 학교에서 이름 모를 학생들의 신이 난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다른 사람들의 예쁜 부분은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는데, 문득 스스로를 어여삐 여긴 적이 언제였는지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은 나를 존중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마음을 헤아리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나는 눈 밑이 까맣고 우중충하니 맛있는 것을 먹어볼까. 향이 진하고 고소한 커피와 크림브륄레를 곁들이면 즐거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겠지. 무르고 진한 연필심으로 책에 밑줄을 실컷 그으며 좋아하는 구절을 노트에 옮겨 적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늘의 나를 다독여 내일로 보내면, 내일의 나는 적어도 오늘보다 예쁘고 신이 나지 않을까.

- p73. 어여삐 여기는 마음





방금 읽은 문장을 필사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필사 노트를 꺼냈다. 나는 에세이를 읽을 때 필사를 더욱 많이 하게 되는 듯 하다. 필사를 하다보면 내 일기에도 이런 멋진 문장들이 적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은 담담하고, 언어는 정제되어 있으며, 감정이 흐르되 과잉되지 않는다.



책은 <그날의 줄넘기>, <외로우면 종말>, <아주 작은 쉼표> 의 제목의 3부로 나누어 일상에서 건져 올린 순간들, 타인의 손길과 우연한 친절, 외로움의 내부 풍경을 조용하고도 선명하게 들여다본다. 산문집의 표제로 선택된 제목은 개인의 외로움과 그로 인한 감정 변화를 드러내며 묘한 여윤을 주고 있기도 하다. 책 속 에세이들은 거창한 플롯 없이, 한 편 한 편이 ‘오늘의 단상’처럼 읽힌다. 일상을 통과하는 감각들이 읽는 이들에게 작은 결을 남기게 한다.


외로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 사이’의 틈이 아닐까.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 일상 속 작은 친절, 타인의 배려는 외로움의 배경 위에서 반짝이는 조각처럼 빛나고, 그런 것들이 쌓여 위로와 삶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친절을 경험하고도 싶지만, 그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하루.


아이들이 담아준 과자가 참 기분좋게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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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싱.아누라그 시리시 카루파르티 지음, 김상필 외 옮김 / 에이콘온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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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업계의 핫트랜드라고 하면 역시 AI 일 것이다. 특히 생성형 AI 는 논의의 최전선에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한 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회사에서 AI 관련한 사람들을 뽑는 이유다. 이 책은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컴퓨팅의 융합이라는 최신 트렌드를 체계적으로 다루는 실무 지침서로 생성형 AI의 원리부터 시작해, 대규모 언어 모델(LLM)과 트랜스포머 모델의 발전사를 설명하고, 클라우드 환경에서의 통합과 실제 활용 방안을 폭넓게 다루는 책이다. IT 업계의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본 가이드 중의 한 권이다. 다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클라우드 컴퓨팅 및 관련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책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다시 5부로 나뉘어 분류된다. 1부는 1장과 2장을 포함하고 있다. 1장에서는 클라우드에서 엔드 투 엔드 생성형 AI 솔루션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역사, 핵심 개념, 필수 정보들을 강조하며 워밍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2장에서 모델 기능의 기본이 되는 LLM의 NLP 기능과 트랜스포머 아키텍처에 대해 풀어낸다. 

2부에서는 LLM 맞춤화를 위한 기술들을 소개한다. 미세 조정(fine-tuning), 검색 증강 생성(RAG),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등 최신 기술을 실무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이를 통해 LLM 기반 애플리케이션의 개발, 운영, 확장, 배포 전략을 심도 있게 다룬다. 

3부에서는 에이전트, 코파일럿, 자율 에이전트와 같은 개념을 살피면서, 시맨틱 커널, LangChain, AutoGen 에 대해 설명한다. 자율 생성형 AI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다. 즉 개발프레임워크와 LLMOps, 그리고 배포 및 확장전략을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4부에서 데이터 프라이버시, 보안, 책임 있는 AI와 같은 현실적 이슈에도 구체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단순히 기술적 설명에 그치지 않고,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마주치는 윤리적·법적 문제에 대한 가이드까지 제공하는 등 AI 실무자와 클라우드 엔지니어 모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기에, 주위의 엔지니어들과 함께 읽었다. 


생성형 AI의 핵심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면서도, 실제 클라우드 환경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코드 예시를 통해 실용적으로 풀어낸 점이 눈에 띈다. 예제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Azure AI 클라우드와 Open AI 렌즈를 사용한다. 깃허브에 실습 예제가 올라와 있어 활용하기에도 편하다. 

물론 실무를 위한 책이다보니 AI와 클라우드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이에게는 다소 진입 장벽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특정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많아, 다양한 플랫폼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살짝 아쉬운 점도 있었다. 최신 트렌드와 현실적 고민을 모두 반영하며, 명확한 설명과 실습 중심의 구성으로 초중급 실무자에게 특히 추천해보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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