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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땀 ㅣ 소설향 앤솔러지 1
김화진 외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8월
평점 :
소설집 『초록 땀』은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저마다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앤솔러지로, <소설향> 시리즈의 첫번째 권이다.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궁금하여 먼저 찾아 옮겨본다.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향’은 ‘소설의 본향, 영향, 반향’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으로 다시 선보이며 2세대 ‘소설, 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설향 앤솔러지’는 소설에 대한 열의와 희망을 되새기고, 한국문학의 오늘과 내일을 채우는 작가들과의 만남의 장을 지속적이고도 발 빠르게 마련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소설향 시리즈 첫번째 권의 테마는 ‘색’과 ‘향기’다. 초록과 검정 등의 '색'과 홍차향 등의 '향기'라는 감각적 매개체를 활용하여 작가마다 각기 다른 시선과 감각적 언어로 테마를 변주하면서 일상의 불안, 관계, 상실, 성장, 인간관계 등의 테마를 입체적으로 다룬다. 각 작품마다 <작가노트> 코너를 두어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작품 의도를 밝히고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표제작인 김화진 작가의 「초록 땀」에서 ‘초록’이라는 색은 인물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투영하면서 주인공의 정체성, 불안, 그리고 성장과 깊이 연결된다.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에 갑작스레 셔터가 내려가서 장 통하던 공기나 물이나 바람이나 그런 것들이 통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p18)'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숨쉬는 게 힘들어졌던 화자는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생인 보영의 숨을 부러워하며 지켜보다가 보영이 초록 땀을 흘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보영은 이 땀을 자신의 약점이 아니라 삶을 정의하는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런 보영과 소통하게 된 주인공은 '초록의 흔적이 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p40)'는 믿음으로 초록 땀 하나를 산다.
언젠가부터 안 좋은 쪽으로만, 불퉁한 쪽으로만 흘러가는 내 생각들, 낯선 삶을 걸으며 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하는, 닫힌 창문 뒤에서 성격 나쁜 마녀처럼 세상 탓을 하는 그런 투덜거림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기를 제발 멈추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고 나는 초록 땀을 창가에 두었다. 땀이 말라서 초록의 흔적만 남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까.
감각이라는 것은 인지하기에 앞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던가. '감각으로 보는 세계는 그러기에 더욱 기민하게 현실을 포착하며 우리의 의식을 보다 깊고 넓게 확장한다.' 각 작품 속 감각들은 단독이 아니라 상호 얽혀 인물의 내면이나 인간관계, 사회적 조건까지 연결하는 상징적 언어로 활용된다. 빛의 온도, 피부에 밴 땀, 공간 안에 드리운 잔상 등 시각 및 촉각적 묘사가 심리적 분위기를 촘촘하게 환기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검정이라는 색을 통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상실과 공허, 세상에서 길을 잃는 감정과 현실을 그린 김희선 작가의 『뮤른을 찾아서』 는 삶의 빈틈, 상실의 감정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화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어떤 색깔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이 현상이 자신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 혹은 전 지구적으로 퍼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이 비현실적인 현상의 중심에는 물리학자 출신의 예술가가 존재하고 그의 집은 블랙홀 같은 어둠으로만 이루어져있다. 검정은 단순히 어둠이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서 길을 잃거나 소외된 감정, 무엇인가를 잃고 난 뒤의 깊은 공허와 절망, 그리고 현실에서의 소속감 부재까지 확장되어 진다.
가서 사람들에게 그날 사라진 색이 뮤른이라고 전하세요. 뮤른을 기억해보라고, 그게 어떤 사물에 그 색이 깃들어 있었는지 떠올려보라고, 전해달란 뜻입니다. 나에게 뮤른이 이런 색이라면 당신에겐 뮤른이 저런 색이고, 만약 이 지구에 8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뮤른은 80억 개의 빛깔을 띨 거라는 얘기도, 꼭 덧붙이고요
잃어버린 색은 제목 속의 단어인 '뮤른'이다. '곧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p211) 화자가 나지막이 그 색깔 이름을 중얼거리는 마지막 장면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내 세계에서도 어떤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김희선 작가는 작품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마다의 해석으로 다가가기에 작가노트에서는 무지개의 일곱가지 색에 대해 서술해본다고 하면서, '무지개의 진짜 색깔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을 뿐이다. 무지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색깔이 그러하다(p220)' 라고 전하고 있다.
앤솔러지 『초록 땀』 의 각 단편의 이야기들에는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장면들 속에 시각, 후각, 촉각 등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감각의 부스러기처럼 읽는 이의 마음에 쌓인다. 감각과 존재가 연결되며 읽는 이들만의 '색'과 '향'을 인식하도록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