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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8월
평점 :
2006년 야마모토슈고로상 후보작, 2007년 제4회 일본서점대상 4위의 소설 『종말의 바보』 는 기상천외하고 독창적인 세계관을 중층적이고 정교한 구성력과 경쾌하고 소탈한 필치로 그려 내는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열한 번째 단행본이다. 넷플릭스 드라마로 <종말의 바보> 가 나온 것을 보고 원작 소설을 먼저 읽어보려 책을 펼쳤다. ( 나는 늘 원작을 먼저 읽는 편이라는 것을 깨닫는 하루다. )
표제로 선택된 <종말의 바보 > 를 비롯하여, <태양의 딱지 >, <농성의 맥주 >, <동면의 소녀 >, <강철의 울 >, <천체의 돛배 , <연극의 노 >, <심해의 지주 > 의 제목으로 종말까지 남은 3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소설 『종말의 바보』 는 《소설 스바루》에서 2004년 2월호부터 2005년 11월호까지 발표된 여덟 편의 연작소설을 묶은 작품이다.
8년 후에 소행성이 충돌하여 지구가 멸망한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있은 후 5년이 지난다. 많은 창작물에서 '지구 종말'에 대해 다뤄왔기에, '만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 대한 것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주제일 것이다.
책 속에서는 발표 후 폭동, 살인, 강도, 방화, 사기 등의 범죄가 만연하며 혼란에 빠지는 모습과 함께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고 묘사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 일본 센다이 북부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 ‘힐즈 타운’을 배경으로 가까스로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 좀 더 차분해진 힐즈 타운 주민 혹은 그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저마다의 삶을 들려준다.
<태양의 딱지 SEAL>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오히려 괴로운 일이다"
아이를 간절히 원할 때는 와주지 않았던 아기가 10년만에 아내에게 찾아왔다. 앞으로 종말까지 3년이 남았는데 임신 8주라는 것을 알게 된 부부. '우유부단 대회가 있다면 일등일 것' 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아내의 '낳을까 말까? 선택의 순간이야. 선택은 당신 특기잖아(p54)' 라는 말에 결정장애에 빠진다.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봐도 정말 어려운 문제다.
주인공은 소행성이 떨어져도 어떤 방법으로 무사히 살아남지 않을까란 희망을 품어도 보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을 만나 의견을 들어보기도 한다. 소행성이 떨어진 후에 살아남은 주인공을 상상해보니 문득,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 를 떠올렸다. 대재앙이 일어난 날에 태어난 아이.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길 위에 선 아빠의 이야기. 『로드』 의 엄마와 달리, <태양의 딱지>의 엄마 미사키는 절망으로 자살할 타입은 아닌 것 같다는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다음 장면으로 옮겨갔다.
그나저나 왜 제목이 '태양의 딱지' 인지 궁금했는데, 책 속의 문장에서 답을 찾았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떻게 결론을 내렸을 지 궁금해지지 않는가.
"저것 좀 봐." 잠시 후 쓰치야가 정면의 태양을 가리켰다. 아름다운 원형을 그리며 저물어 가는 태양은 하늘에 붙은 딱지처럼 또렷했다. "소행성이 떨어져서 우리가 사라져도 분명 저 태양이나 구름은 남겠지."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 저 딱지는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다.
"조금 든든하지?" 쓰치야가 조용히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동면의 소녀 GIRL>
"세상은 앞으로 3년이면 끝나고, 사람이 쓰러져 있는 마당에 경망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나는 신비한 예감에 마음이 들떴다."
부모가 자살하고 혼자 남은 주인공도 있다. 혼자 남은 소녀는 세 개의 '목표'를 세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책을 전부 읽는다' , '죽지 않는다' 다. 두 번째까지의 목표는 다 달성했다. 주인공 소녀 미치는 올해들어 조금씩 동네가 안정된 것을 소강상태, 즉 '진정된 것이 아니라, 찰나의 휴지(休止)'라고 생각한다. 식료품을 사러 나간 길에 만난 친구의 모습에서 새로운 목표를 하나 추가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움직인다. 첫 번째 목표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에 대해 '벚꽃이 봄철에 잠깐만 핀다고 해서 용서 못 한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없잖아요(p181)' 라고 말하는 장면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치가 왜 '동면의 소녀' 인지 또한 이야기 속에서 등장한다.
종말을 앞둔 디스토피아적 배경이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로 흐르지 않는다. 각 소제목의 의미를 찾아보며 소설을 읽는 동안 경쾌하고 따스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어떤 비참한 상황이라도, 그래도 사람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은 '내 생애 가운데 가장 멋진 하루되기' 다. 추가적으로 일어로 '今をいきる' 즉, '지금을 살다' 로 적어둔 지 오래되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과도 비슷한 결이다. ( 그러고 보니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일본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사에서 가져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 『종말의 바보』 를 읽으며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를 생각한다. 카톡 프로필로 이 문장을 적으며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초심을 떠올려보게도 되는 하루. 책을 덮은 후에도 깊은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