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지리학 :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21
박승규 지음 / 책세상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연히 논문은 검색이 되지 않아, 일상의 지리학 관련 리뷰로 내용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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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숙일을 보았다’를 보았다

흔히들 서평하면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단행본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생뚱맞게도 석사학위 논문과 관련된 내용이다. 논문이지만 조그만 문고본 정도의 분량으로 볼 수 있으니 단행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시중에 학위논문을 정리해 출판하는 책들도 상당히 많다.(현재 춘천교대에 근무하시는 박승규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일상의 지리학 :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가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언제 기회되면 이 책에 관련된 글도 쓰고 싶다) 내가 애기하려는 논문은 <거리노숙인이 생산하는 ‘차이의 공간’에 대한 연구 -서울역 거리노숙인을 중심으로- >이다. 개인적으로 단행본 형식으로 출간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약 한 달 전에 한겨레21에 실린 “나는 노숙인을 보았다”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처음엔 뭐 일반적인 ‘노숙인’관련 기획기사겠지 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20대의 한 대학원생이 서울역에서 ‘생’으로 노숙생활을 하며 직접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쳐가며 그네들의 ‘말’과 ‘행동’을 바탕으로 작성한 석사학위 논문에 관한 기사였다. 일종의 사소한 그리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문화인류학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참여관찰법을 지리학에서도 활용할 수 있구나 하는 번뜩임이 들었다. 기사를 읽은 후 바로 경희대 지리학과 사무실로 수소문을 해 연구자와 통화한 후 논문을 우편으로 받아 바로 읽었다. 논문의 시작은 연구자의 주류 사회의 노숙인에 대한 시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에 관한 의문에서 출발 되었다고 한다. 노숙인에 대한 기존 연구가 대부분 연구자 신분으로 설문지 작성이나 구술면접을 통해 작성된 것이어서 한계 분명하며, 바로 이점이 직접 연구자가 노숙인 생활을 시작한 이유이다. 촬영과 기록이 어려워 화장실에 숨겨놓은 노트에 3,4일에 한 번씩 기록을 했다고 한다.

연구자는 논문에서 “노숙인은 시도 때도 없이 구걸하거나 잠만 자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대로 공공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공공 공간에서 권리를 찾지 못하는 노숙인을 위한 실천적인 대안을 찾지 못한 부분은 한계”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결론에서 언급하듯이 “본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거리노숙인과 그들의 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이러한 과정이 갖는 함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차이의 공간’ 그 자체가 주는 함의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한다. 거리노숙인들이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차이의 공간’은 과언 어느 정도 선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 즉, ‘차이의 공간’을 통해 거리노숙인을,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판단할 것인가? 이것이 합당한가?”라는 연구자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노력만으로도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난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이런식의 대안은 없고 문제 제기만 하는 행동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폄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언제까지 계속 근본적인 부분을 덮어버린 채 ‘현실적’인 애기만 할 수는” 없다, “이상주의자로 비치더라도, 또는 탁월한 대안을 제시할 역량까지는 비록 갖추지 못했더라도, 한 번쯤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거리’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현 시대는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평가받으며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자본주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올바른 시민의 상’이 존재한다. 아마도 서울역 노숙인들을 대한민국의 당당한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 ‘부적응 존재’들의 ‘현실태’이거나, 바람직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사회의 충실한 ‘순응자’, ‘하수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ps : 연구자가 어느 매체에 쓴 기사의 글 일부이다. 참고해 볼만 하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거리 노숙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래서 시스템에 동화되지 못하는 그들을 제재하거나 강제로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주류 사회의 시도는 굉장히 ‘타당하게’ 비친다. 결국 필자는 “‘틀림’이 ‘다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주류 사회는 시스템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통일성’을 주요 가치로 내건다. 이 과정에서 ‘차이’는 ‘틀림’이 돼버린다. 거리 노숙인을 노마드적 주체로 바라보는 이상적 세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다름’이 ‘틀림’이 돼버리는 세상이라면 그 사회는 굉장히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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