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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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힘>과 함께 쓴 <도시의 기억> 서평 글을 올려 놓는다. 허접하지만. 물론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글을 좀 끄적끄적 거려보았지만 너무 재미있다. 물론 약간의 손품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리고 조금더 글 쓰는 연습을 해야 할 듯 하다. 계속 머리 속에서만 맴 돌뿐이지 글이 잘 써지지가 않는다. 물론 당연한 애기긴 하지만, 내가 글 쓰는 노력을 한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배워 본적도 없고.... 하여튼 꾸준히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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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8.22 시간의 기억, 역사의 기억 그리고 도시의 기억 

아침 6시30분 출근길. 차(승용차일수도 버스일수도)를 타고 숭실대, 상도터널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넌다. 난 한강대교를 지날 때 꼭 창문을 연다. 그 시원함이 졸린 나의 아침 기분을 조금은 상쾌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산을 지난다. 용산 남일당 빌딩. 2009년 1월20일 오전 혹은 오후일 것이다. 방학이기는 하지만 뭔 일이 있어 종로쪽에 가는 길. 차가 평소보다 엄청나게 막혀있었다. 버스에 탄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근데 조금씩 용산쪽으로 오자 엄청난 수의 전경 버스와 경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뭔 큰일이 일어났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 장면은 소방차들과 불에 탄 건물과 돌과 유리파편이 나부러져 있는 길들이었다. 그게 내가 본 ‘용삼참사’의 첫 장면이다. 그 이후 난 항상 남일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과 마주해야 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항상.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죄의식도 조금씩 느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이 불합리하고 분명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뒤에 숨어있는 듯 한 내 자신의 모습에...요즘엔 경찰인력이 보이지 않더라. 더 이상 장사할게 없어 졌나보다. 그리고 숭례문.(아직도 방화 직후 시커먼 숭례문의 모습이 기억난다) 시청. 시청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또 역시 한 무리의 경찰버스와 경찰들. 마지막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과 최근에 생긴 세종대왕 동상 그리고 광화문. 경복궁. 청와대. 근무하는 학교가 종로에 있다 보니 이런 기억들이 머리속에 새겨졌다. 고종석씨의 <도시의 기억>을 읽으며 내가 생각해본 최근 몇 년간의 서울에 대한 간단한 ‘도시의 기억’이다.

고종석씨의 <도시의 기억>은 2007년 3월부터 2008년 2월까지 한국일보에 연재된 동명의 기사들을 엮은 지은이의 20번째 책이다.(20번째라 부러울 따름이다, 난 괜찮은 책 딱 3권만 내는게 소원이다) 제목으로 봐서 단순한 여행기, 체류기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절대 아니다.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되지만, 저자의 해박함으로 인해 전해 느낄 수 있는 인문학적 성찰이 장난 아닌 책이 바로 <도시의 기억>이다. 특히나 언어에 대한 저자의 해박함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고종석씨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석사·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니 뭐 그럴만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국어의 풍경들>, <감염된 언어>도 있으니 읽어봄직 하다.

<도시의 기억>은 1992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프랑스 파리에 근거지를 두고 '유럽의 기자들'이란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취재차 둘러보았던 경험이 가장 큰 축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 샌프란시스코, 오사카 같은 도시들을 포함해서 총41곳에 관한 기억을 담고 있다. 저자 스스로도 말하고 있듯 짧은 곳은 하루 길어도 며칠을 넘기 힘든 체류기간동안의 ‘기억’에 한정하여 내용을 담아내고 있어 제한된 면도 없지않지만, 지은이 특유의 세련된 문장과 박식함으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글 읽는 재미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들은 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욕망할까? 내 존재의 생활 근거지를 떠나 낯선 곳을 찾는 ‘원심적 움직임’과 또다시 생활의 근거지로 돌아오는 ‘구심적 움직임’의 반복. ‘원심적 움직임’이 하나의 일상탈출이라면 ‘구심적 움직임’은 안정추구일 것이다. 개인의 나이에 따라 심리적 상태에 따라 결혼 유무 등등에 따라 두 움직임의 정도는 차이가 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난 예전에 비해 확실히 ‘구심적 움직임’이 월등하다. 집이 편하다. 여러분들은 어떠한지요?  

지은이는 파리에서의 첫 번째 체류기간에 파리에 매혹되어 결국 직장에 사표내고 가족이랑 파리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여파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을 때 깨달았다고 한다. “겉멋에 들려 파리 사람인 양 살았지만, 내 알량한 허영심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해온 것은 서울이었음을. 나는 파리에 살면서도 뿌리를 서울에 박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파리에 떠 있는 서울 사람이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곧 내가 지르는 비명이었다.” 여행을 떠나 가끔은 낯선 도시에 대한 호기심과 막연한 동경심,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자칫 허황된 ‘원심적 움직임’이 여행에 도시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할수 있다.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도시의 기억’을 가르쳐야 하는 지리교사로서 '현실'과 '동경'은 구분해야 할 듯 하다. 

지은이는 서문의 제목을 ‘도시의 영혼들’이라 했다. 내 생각에는 이 ‘영혼’이라 함은 다른 말로 ‘인문학적 사유’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종교가 없는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앞에서 이 말을 여러 차례 썼다. 사실 내가 이 말에 담고자 했던 것은 ‘흔적’이나 ‘무늬’ 정도의 뜻이었으나, 나는 ‘닭살스럽게도’ 영혼이라는 말을 취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종교를 백안시하는 내 이성 저 밑에 종교적 경건함이라 부를 만한 의식의 말랑말랑함이 원래부터 슬그머니 자리잡고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내가 가본 도시들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도시들의 영혼을 찾아볼 생각이다.”라는 서문의 내용이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여행하면서 아랍어에서 차용한 스페인어와 영어·프랑스어 어휘들을 떠올리거나,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집에서 인종주의의 피해자에서 그 자신들이 “최악의 인종주의자들”로 바뀐 유대인을 비판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도시가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 곳에 나 자신의 ‘시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은이가 파리에 그토록 의미부여를 하는 이유도 ‘유럽의 기자들’이란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세계 각 지역에서 온 기자들과 함께 뒹굴며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고 뽀뽀하고 보낸 그 격렬한 시간들, 밤새 술을 마실 수 있는 싱그러운 젊음의 시간들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이었다고 애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 개인에게 의미 있는 시간의 기억을 간직하게 도와주는 파리의 그 수많은 낭만적인 거리들, 카페, 박물관과 같은 사회·문화적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도시 특성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단순히 ‘경제성’, ‘미관’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부스고 또 부셔 ‘삐까뻔쩍’ 건물들을 세우는 ‘건설토목주의자’들이 횡행하는 서울의 현실은 무엇일까? 과연 서울에서는 어떤 ‘도시의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ps : 파리에서 5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매혹이 얼마나 강렬한지 35년을 산 서울의 기억들이 희미해질 지경이었다고 고백하게 만든 도시 파리. 물론 저자 개인의 감수성에 기인한 측면도 많겠지만, 파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파리지앵’과 ‘파리지엔느’로 만들고 있다. 아마도 정수복씨가 쓴 <파리를 생각한다>를 읽으면 조금 더 파리의 생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종석씨도 낯선 도시를 가서 짐을 풀고 하는 일이 도시의 이곳저곳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파리를 생각한다>는 바로 지은이기 7년동안의 파리 걷기에 대한 하나의 보고서라 할 수 있으니 이래저래 <도시의 기억>의 파리편으로 생각해도 될 듯 하다. 참고로 정수복씨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도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다 기회되시면 한번 꼭 읽어보시길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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