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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 - 1930년대 경성 거리를 누비던 그들이 되살아온다
안재성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8월
평점 :
당신들의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내 주위에는 '해방된 조국'에 대해서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들에게 언제나 엄정한 한국사회의 대안이라는 것은 '자주'와 '반미'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며, 그 롤 모델은 크게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자주'와 '반미'를 선취하고 있는 그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한동안은 부정으로, 나중에는 '역사적 정통성'을 들고나와 배를 째곤 했다.
그들에게 지친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를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복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본가들의 세상을 타파하고 민중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난 그들에게 조금 더 마음을 빼앗겼지만, 궁극적으로는 좀 더 튕겨나간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지리한 'NL-PD' 혹은 '주사파-vs 좌파'의 구도를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이유는, 당시에 '북한사회'에 대한 책들을 읽었을 때 PD들이 이야기하는 몇 가지의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당시에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박헌영'과 '여운영' 정도 밖에 없었기에 다른 이들에 대한 언급이 무슨 말인지를 도통 모르고 그냥 듣기만 했지만, 그들의 이야기의 핵심은 기억할 수 있었다. "민족해방 운동의 전통이 오로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사회주의자들 또한 한 축으로 있었으며, 민족주의자들이 밖에서 깃발을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때, 국내에서 파업을 조성하고, 혁명운동을 하던 일군의 그룹이 존재했다" 뭐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명제의 강렬함은 기억되었으나, 그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유추'만 했을 뿐 그 디테일에 대해서 읽은 적은 없었다.
<경성 스캔들>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사실 창피하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인 줄 알고 <경성 트로이카>를 집었다. 항상 사회과학-역사-철학 따위의 이야기만 나오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척하며 잘난 척하던 나였지만, 이럴 때도 있다. 밑천 드러난 거 인정한다. 여튼,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이효정의 시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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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활활 불태워
한 점 재라도 남기기 싫은 심정이지만
이 세상 어디에라도
쓰일 데가 있다면
꼭 쓰일 데가 있다면
주저 없이 바치리라
먼 젊음이 이미 다짐해둔
마음의 약속이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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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버린 자들의 이야기. 이현상과 경성 트로이카의 이야기. 이야기는 살아남은 경성 트로이카의 운동가 이효정의 목소리를 통해서 복원된다. 어느날 인사동 전시를 보다가 비장한 그림을 보고 반해버린 저자와의 인연을 통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괜찮은 인텔리였던 이효정을 '빨갱이'로 전향시켜버린 이현상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설득하는 힘과 경청하는 힘이었고, 그런 가운데 '진실'에 기대는 그의 호소력이었다.
사회주의를 패션으로 생각하던 '모던뽀이'들과 '모단 껄'들을 일제는 두려워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현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을 통해서 '정치적 아젠다'를 제기하는 진짜 멋쟁이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일제는 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사랑도 꽃피고, 또한 질투도 싹트며, 일상이 주는 압박 또한 펼쳐진다. 언제나 '부양가족'의 문제는 남자든 여자든 그 힘을 축소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희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걸 강제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세상을 뒤집어 엎고 싶었던 거다.
이런 그들의 열정이라는 것들도, 일제의 압제하에서, 또한 해방후의 좌우대립속에서 '이방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순간 결국 '이룰 수 없는 세상'의 꿈으로 아스라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에서는 '미제의 쁘락치 박헌영'파로 분류되어 사상검증과 '자아비판'이 필요했고, 남쪽에서는 '빨갱이'라는 그 한마디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광장>의 이명훈의 고민이라는 것은 마음 속의 것이었다면, 이건 모든 곳에서의 폭압을 수반한 물리적인 것이었다.
이제 해방후 60년이 넘었고, 전쟁이 끝난지 55년이 되어가지만, 이들은 여전히 제 위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독립운동>의 정사(正史)에도 기록되지 못하는 이방인의 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글로, 또 다른 어떤 이는 발로 뛰면서 해방을 갈구 했다. 그들에 대한 재평가는 우리의 몫이고 우리의 '정치적 건강함'의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살아남아있는 자들의 기록이 역사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지금 쇠락해 있지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기록의 발견이라는 것에 역사를 대입한다면, 우리가 복권해야 할 역사는 이런 것이 아닐까? 괜한 알맹이 없는 국체 논쟁을 할 께 아니라면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