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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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친구 아들'과 '내 친구'의 간극

요즘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지만, 어찌나 '우리 엄마 친구 아들, 딸'들은 다 잘나가시는지. 다들 수백만원 월급을 받는 직장을 다니고, 부모 효도관광 보내드리고, 집까지 센스있게 청약통장 잘 응용하여 마련하고, 결혼전에 이미 결혼준비를 마치는 대한민국의 '내로라 하는 엘리트'들만 가득하다.

그에 반해, 학교에서 만나는 졸업한 '내 친구'라는 녀석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눈치보며 겨우 때우고, 씻고 학교갈 준비를 한 후에, 엄마를 빼꼼이 쳐다보고, 불쌍한 눈초리를 보냄으로써 '만원'을 확보하고, 학교에 가서 담배한갑(2500원)을 사고, 커피 석잔을 마시고(150*3=450원), 학생식당에서 두끼를 때우면서(2000+2500 => 4500원) 공시나 임용고시에 몰빵하는 인생들을 보내고 있다. 만원에서 남은 얼마 안되는 돈을 꼬깃꼬깃 모아서, 겨우 일주일에 한번 노가리 놓고 소주 먹는 수준으로 버티는 녀석들도 수두룩하다. 어느날 겨우 엄마한테 연기가 먹혀서 2만원 받는 날 기분으로 맥주를 먹으면서 버티는 날은 기분이 좋은 날인 거지.

이 간극은 도대체 좁혀지지가 않는다. TV 드라마와 현실의 간극이 벌어진 것도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금처럼 극명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또 모른다. 나처럼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어정쩡하게 걸터있는 이의 체감과, 'SKY + KaPot'에 해당하는 이들의 체감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테고, 지방대나, 2년 · 3년제 전문대, 혹은 대학 비진학자가 겪는 체감은 또 엄청나게 다르리라 생각한다.

난 사실, 이런 이야기들에서 한발 비껴나 있긴 하다. 당장은 유예기간(이제 1년 반쯤 남았구나.)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느끼는 이들의 압박감이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더 작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88만원 세대'가 시대적 유행어가 되고 있는데, 이런 '88만원 세대'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세우는 이들은 그리 많아보이지 않는다. 정말 우석훈의 말처럼 '세대간 격차'를 통해서 우리 세대를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있는 것인가?

그 와중 신문에서 마무리가 된 <<퀴즈쇼>>를 '풀무질'에서 샀고, 한달만에 읽게 되었다.

 

김영하, 퀴즈쇼

김영하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30 와 <<빛의 제국>> 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25 을 읽으면서 느꼈었지만, 정말 말의 질감을 살려서 표현하는 작가로 내게 보인다. 성석제가 '이빨'에 능한 '이야기꾼'으로 느껴질 때, 김영하는 '말' 그 자체가 감각을 곤두서게 하는 그런 힘을 느끼게 해준다. 여전히 김영하는 탐미적인 그 '김영하'였다.

"나는 쓰고 있다. 내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나의 펜은 혀, 종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밀도 높은 공기였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씌어진 말, 기록된 말로 가득한 방에서 우리는 말이 필요 없는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p.264)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가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아무리 대단한 영화도, 그 어떤 기상천외한 롤러코스터도 그것에 필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냄새가 있고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역사가 있다. 무엇보다 그 방은 삼차원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나는 뚜벅뚜벅 그 안으로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물건들은 만져볼 수 있으며 작은 것이라면 슬쩍 가져갈 수도 있다. 천장은 그녀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처음으로 보는 바로 그 천장이며 침대는 그녀가 자신의 온몸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바로 그 침대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방에서 우리는 얼마간 탐정이고, 또 얼마간은 변태이며, 그리고 또 얼마간은 수집가다. 방은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단서들로 가득하며 그것들은 나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p.261)

그리고 신촌쪽의 묘사는 내가 걸어갔던 길들을 자꾸 떠올리며 그 상황들을 상기시키곤 하였다.

하지만 김영하가 그런 '표현'과 '묘사'에만 몰입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가지는 장점은 그러한 도구들을 가지고 현 시대를 읽어내는 데에 있다. 예전 <<빛의 제국>>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답답함들이 떠올랐다. 같이 호흡하는 세계에 대해서 놓치지 않는 거다. 김영하의 <<퀴즈쇼>>는 이 시대의 '88만원세대'이야기고, 어디서든 벌어지는 일들이다.

숱한이들이 인용을 했었지만, '88만원 세대'에 대한 묘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p.193)

그냥 저냥 빚으로 '사생아'인 손주를 키워주었던 외할머니가 죽고, 그 외할머니의 빚으로 집이 넘어가버리고 고시원 신세를 전전하면서 알바로 생활을 해결하려 했으나 그 마저 잘 되지않고, 고시원 한달치 요금을 낼 돈이 없어 방도 빼앗긴 이민수가 택하는 것은 한타 한타로 지식인 룸펜들이 할 수 있는 막장인 '퀴즈 배틀'의 퀴즈쇼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퀴즈쇼라는 것이 '가장 추악한' 자본주의의 단면인 것도 아니다. 실은 그나마 '우아하게' 순결한 수단인 '지식' 그 자체를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사실 '지식' 그 자체가 현대 사회에서 어떤 수익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실사구시'니 '실용'이니 하는 말들이 끊임없이 한국 사회에서 돌고 있는 맥락도 같은 것이다. 뭔가에 '쓸모', 실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만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다소 순환논리 같은 상황에 '지식'이라는 것은 입주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무나 '순수한'(실은 세상에 대해서 조금은 흐리멍텅한) 이민수는 그런 퀴즈쇼를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물론 고시원 옆집 여자의 죽음이 결정타를 날리긴 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가슴을 졸였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민수와 내 모습이 너무나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지식 자체를 좋아하고 실용적인 무언가에 대해서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 자체를 획득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하지는 않는. 전형적인 '베짱이 형 인텔리' 같은 모습. 생각이 많고, 알려는 욕구도 강하다. 그런 이민수가 인터넷 채팅방의 '퀴즈쇼'에 집착하는 만큼, 나도 시사주간지와 신문, 그리고 또 책에 집착하고 있었고, 또 한동안 'TV 퀴즈쇼'에 나가려 하지 않았는가.

"이러다가 나도 .."하는 압박감이 잠시 들기도 했었다. 조금 떨어져 생각해 보니, 이 시대가 박멸하고 싶어하는 건 '이민수' 와 같은 형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강한 사람들이 '이민수'와 같은 사람일 거라고 위안을 했다. 왜냐면, 그런 세상의 맥락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민수는 결국 '퀴즈쇼' 서바이벌에서 돌아오고, 어떻게는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어낸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의 표지가 생각이 난다.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 '짱돌'이 물리적인 힘을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저항' 혹은 '의사전달'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구도'에 대해서 말하는 이가 오래 버티고, 또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하의 '이민수'는 헌책방으로 숨어들어가 '개인'의 생존방법을 찾아내지만, 난 김영하와 우석훈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공동 생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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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명랑'의 코드로 읽은 한국 사회 스케치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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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우석훈

올 초, 한미 FTA에 대한 설전이 한참 오가고, 협상 체결이 된 당일 TV를 켜고 토론회를 지켜보았다. 제대로 된 정론을 알기 위해 읽었던, 이해영의 <<낯선 식민지, 한미 FTA>>와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정도가 나의 지식의 전부였고, 이해영이 나오는 토론회를 보다가, 왜인지 모르게 고답적이고 쳇바퀴를 도는 듯한 논의 전개에 지쳐 채널을 돌리던 도중, 눈은 튀어나오고 두꺼운 약시용으로 추정되는 안경을 낀 한 남자의 논변이 나를 사로잡았다. 우석훈이었다.

그후, 우석훈을 웹상에서 검색했고, 그의 블로그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의 글들(사실 좀 읽었던 글들도 있었을 것이다.)을 다시금 읽어냈다. 그리고 그의 블로그는 내가 컴퓨터를 켤 때마다 하루에 최소한 한번은 들르는 곳이 되었다.

그의 말에 동의를 하게 만든 것은 바로 <<88만원 세대>> http://blog.aladin.co.kr/hendrix/1515926 이다. 내가 바로 그 대상(82년생 - IMF사태를 중3과 고1에 정타로 맞고 시작한)인데다가, 그가 읽어내는 세상의 이면이라는 것들이 우석훈에 대해서 존경을 하게끔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읽고나서,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맥을 짚어낼 수 있었다. 그의 사회를 읽어내는 인식,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대안들의 방향성까지.

사실 나의 독서편력과 지적인 편견(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101936 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101938 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101939 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101940 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101941 )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는 여러가지면에서 탈출구를 필요로 했었다. 얼치기로 배운 고전적 맑스주의와(일견 트로츠키주의적이기도 했던), 학교에서 배운 정치학(주로 국제정치학), 또 내 나름의 출구로 찾아냈었던 네그리와 하트에 근거한 <<제국>>의 논의 등은 얽히고 섥혀 있었지만, 현실에 대응시켜보기에 일견 무력했고, 또 내가 원하는 세계에 부합하는 결론을 딱 떨어지게 만들어 주었던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내가 바라는 것에 걸맞는 이론적 짝패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우석훈은 나에게 다시금 '상상력'을 발휘할, 그리고 무엇을 공부해야할 지에 대해서 한 가지의 통로를 더 뚫어준 은인인 셈이다.

 

명랑 좌파 우석훈, 이 시대를 그나마 버티게 하는 힘

이 책은 우석훈이 썼었던(블로그에서 봤던 글도 다수이다) 글들의 모음이다. 언젠가 그의 블로그에서 읽었었지만, 그는 이 책이 펴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쪽팔려'했다고 했다. '잡글'을 통한 출간을 그리 크게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의 등장과 함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지난 4년 반 동안의 글들이 부끄럽지만 시대의 기록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위 사람들이 생각한 것 같다. 살면서 작은 부끄러움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들은 따라서 그가 읽어낸 4년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2003-2007 비망록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가 읽어내는 구도는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보았던 '정치평론' 혹은 '경제평론'과 궤가 다르다. 왜냐하면 그의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을 고려하건데 '경제평론'에 국한하여 보더라도, 그의 '경제'에 대한 접근법은 기존의 '생산담론' vs '분배담론'의 구도를 넘어선 접근이다. '생태담론'이라 칭할 수 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편견을 깔고 있는 "환경을 살리자"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담론들의 한계가 현실에서 부딪혀서 보여지고 있는 결과물들(혹은 거기에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징후적 현상)을 토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참여정부의 '농정 로드맵 10개년 계획', 이른바 6, 7만, 119라는 숫자에 대한 이야기다.

"6헥타르, 즉 1만 8천 평의 농사를 짓는 농가를 7만 호 육성하겠다는 것이고, 이걸 뼈대로 하는 '농정 로드맵 10개년 계획'에 투· 융자 119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이걸 '농업정책'이라고 부른다.

 현재 우리나라 농가당 평균 경작면적이 3천 5백 평, 즉 1헥타르가 조금 넘는다. 농가 여섯 집을 합치면 6헥타르가 되는데, 당연히 6분의 5에 해당하는 농민들은 농업에서 철수해야 한다. 이 사람들이 삶터를 등지고 서울에 올라오지 않게 하는 것을 '농촌정책'(농림부 용어대로 하면 '탈농재촌정책')이라고 부른다. 괜히 서울 가서 사회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둘을 합쳐 '농업 · 농촌정책'이라고 부르는데, 현실에서는 농업 말살, 그리고 지방 토호 부자 만들기 정책이 된다."(p.272)

이런식의 숫자를 토대로 직접적인 결과물들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게 우석훈의 글들이 갖고 있는 강점이다. 이건 그의 정책 협상가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라 볼 수도 있겠고, 기본적으로 그가 갖고 있는 수리 경제학적인 우위에서 오는 강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석훈의 글들은 항상 시작은 우울하다. 극단적인 위기와 붕괴가 기다리는 구조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냉소'나 '회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름의 대안들을 보여주고, 우리의 상상력 발휘를 권면한다.

특히 20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런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스물일고여덟 나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20대에 작가로 혹은 사상가로 데뷔할 수 있는 인생의 단 한 번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이들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명석함과 함께 부끄러움까지 모두 사회에 꺼내놓는 데 머뭇거리지 말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 ...(중략)...

... 지금부터 1만 명의 20대 작가가 자신의 생각과 삶을 책으로 엮어낸다면, 예비 철학자 혹은 예비 사상가 1만 명이 나이를 먹고 생각이 굴절되면서 진화하는 과정을 이 사회가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생활인은 직업으로 완성될지 모르지만 사상가는 책으로 완성된다... (중략)...

... 지금 책으로 데뷔하는 20대가 10만 명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정말로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10만 명의 젊은 사상가들이 서로 논쟁하고, 사회가 그걸 지켜보는 상황은 가히 학문의 백가쟁명 시대라고 할 수 있다."(pp. 163-164)

이런 우석훈의 글은 이 시대를 그나마 버티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나를 더 강하게 추동하여 끌고나가게 하는 버팀목이다.

한동안 내가 바라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쉽다.

한참 자신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서 말해야할 내 친구 누군가가 지금처럼 사채업자 밑에서 일하지 않을 수 있고 오로지 '즐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맥주 한잔씩 빨면서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고,

돈을 많이 준다는 이유로 대기업 공장에서 주7일 근무를 하는 친구에게 '휴일'과 '휴식'을 안겨줄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이 되는 세상,

아이들이 아프지 않는 세상이었다(이건 좀 얼마 안되지 않은 생각이지만).

그 꿈을 접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이 읽고, 쓰려던 와중 하나의 통로를, 숨통을 열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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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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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대가를 대가이게 하는 요소에 대한 그의 통찰 하나.
그는 아도르노와의 대담을 마치고 이렇게 쓴다. "아도르노에게 이렇게 어린애처럼 뽐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의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작가들의 '자아현시욕'에 대한 이야기들과 같은 맥락에 놓인 이 판단은 학적 탐구의 근원적인 추동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로잡힌 영혼>>(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에 대한 서평 中-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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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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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에 대해서

www.armarius.net 에 들어가본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꽤 쓸만한 서평을 읽을 수 있고(요즘은 좀 뜸한 듯하다), '어떤 공부를 할 때 어떤 책부터 읽어야할까'에 대해서 고민이 있을 때 그 해결책을 나름대로 얻을 수 있는 홈페이지다.

강유원을 안 지는 꽤 되었으나, 그냥 왠지 모를 그의 '꼬장꼬장함'에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고, 그냥 철학자, 그리고 좀 탄탄한 글을 쓰는 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저술들을 올해 조금씩 읽었을 때(그의 manuscript를 읽고, <<책과 세계>> http://blog.aladin.co.kr/hendrix/1713643 를 읽고 나서) 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아우라, 혹은 힘을 느끼게 되었고, 또 그가 보여준 실용적으로 즉각 사용할 수 있는 공부법(예를 들면 3공 노트의 사용법)에 대해 알고 또 따라하게 되면서 강유원에게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교양', '독서', 그리고 <<책>>

한동안 지식의 축적에 굉장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http://blog.aladin.co.kr/hendrix/1718148 물론 그 매개가 되었던 현재도 실행되지 않고 있는 '퀴즈 영웅' 프로젝트 때문이었지만, 덕분에 90% 정도의 비율로 매일 신문을 정독하게 되었고, '교양'에 대해서 말하는 책들을 예전에는 흘깃 스치고 지나가다 이제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일전에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을 읽었다. 방대한 유럽의 역사,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 지성사에 대해서 풀어놓는 그의 매력보다, 그가 말하는 '교양'과 그것을 획득한 방법에 더 끌리곤 했다.

"교양은 자신의 문명화에 대한 아주 폭넓은 지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가 사람이라면, 그 이름은 교양이 될 것이다."(p.566) "교양은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색하게 남의 눈에 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p.567) "즉 교양지식은 단지 정보의 총합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기놀이에서와 같이 게임 규칙과 정보의 혼합이다. ... 장기판의 모양과 범위와 말들의 숫자와 고유의 길에 대한 이해다."(p.575)

"초보자는 일등급의 학술서적과 삼등급의 돼지가죽책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귀중한 시간을 대학의 값싼 생산품 때문에 낭비하지 않게 된다."(p.623) "서점에서는 "그냥 구경 좀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분명하게 한마디만 하면 된다."(p.624)

그리고 강준만의 <<한국인을 위한 교양사전>>(http://blog.aladin.co.kr/hendrix/1709615)을 읽고 "이거 뭐야?"라는 생각을 했었다. 주저리 주저리 시의적 이슈들을 늘어놓은 책에 대한 반감이랄까?

<<책>>을 읽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이정우의 <<탐독>>(http://blog.aladin.co.kr/hendrix/1718148)은 굉장한 도전으로 다가왔는 데,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고, 그걸 알기에 길이 까마득해 보였다는 거다. 이건 다독으로 극복하려면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 그런 것이었다. 학문의 횡단. 너무나 아득하지만 꼭 정복하고 싶은 유토피아로 보였다.

이런 책들을 읽고난 후에 잡은 <<책>>은 또 좀 다른 '책'이다.

그가 www.armarius.net 에 올려놓은 서평들의 모음이다. 사실 다운받아서 읽을 수 있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날로그 인간인 게, 굳이 웹상에 올려놓은 글도 다시금 뜯어보기 위해서는 꼭 출력이라는 변환 과정이 필요하다. 출간이 되어있으면 산다.

성대 앞 '풀무질'에 갔다가 '월척'으로 이 책을 낚은 것을 보면 그렇다. 남들 같으면 그냥 다운 받아서 봤을 수도 있겠다(책값이 없는 독자들이여 다운 받아서 프린트 해서 보시길).

<<책>>에서 강유원의 독서의 지도를 명쾌하게 잡아내기는 어렵다. 왜냐면 단편적인 서평들의 모음이고 목차를 아무리 쳐다봐도 '무순'임에 틀림없다. 그냥 "시간순이었을까?" 라는 추측 뿐이다.

아마 다치바나 다카시였다면, 시간순으로 읽은 책들을 정리하면 그가 읽었던 주제들의 순서가 나올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프로젝트에 맞춰서 책을 몇 meter 단위로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유원이 이 책에서 어지러이 주제들을 늘어놓는 다 하여 그가 '어지럽게 생각'이 늘어져 있는 사람은 아니다. 몇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공이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이었던 점에 약간의 알리바이를 둘 수 있겠다.

그가 읽는 책들은 주되게 사회과학과, 역사 책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주로 찾아내는 주제들은 그 책들의 주제의 빈도에 따라 '파시즘', '민족주의', '현대자본주의', '미국', '서양 지성사' 등에 걸터있다.

약간의 맥락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현대 사회를 읽어내기 위해 '파시즘'과 '미국', '현대자본주의'를 살펴보고 그 근저에 있는 서구의 사상의 흐름을 읽어낼 필요가 있던 게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강유원이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 데, 그는 변명을 한다는 게 한편으로 좀 웃겼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읽는 사람이 아니다.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노는 게 인간본성에 맞는 거 아닐까. 그냥 빈둥거리는 거 말이다. 예전에는 궁금한 게 많아서 책을 읽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다. 무식하다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책을 읽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도 별로 없다. 모르면 어떠랴 하는 거다. 왜 책을 읽냐고 누가 물어보면 '그냥 읽는다', '심심해서 읽는다', '안 읽으면 할 일이 없어서' 등이 적절한 답이 아닐까 싶다."(p.295)

하지만 '그냥 읽는자'라 말할 수 없는 까칠한 그의 비평이, 그의 '날서있음'이 자꾸만 그의 글에 손이가게 한다.

이제 넘어설꺼다. 이제 내 공부를 할 구상이다. 하지만 그 성실함과, '주례사식 비평' 따위는 집어치고 있는 강유원에게 배워야 할 건 아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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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 2008-01-31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산적 책읽기50도 좋았는데 언젠가 이것도 읽어봐야겠군요^^;

양승훈 2008-01-31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원래 '생산'과는 좀 떨어져 있어서요~~ 이 책 괜찮죠.. ㅎㅎ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사실 질문 자체가 단순한 건 아니다. 우선 '이지경'에 동의를 할 지 안할 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동의를,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기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래도 굳이 '이지경' 상태를 끌고 들어가는 이유는 '이지경'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어디선 가 나오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 실제로 총체적으로 이야기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에게 '사유'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히 사치가 되었고, 3초 이상을 생각하길 권장하는 것도 굉장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다. TV에서 채널 돌리는 데 걸리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직접민주주의의 산파'로 한동안 불림당하던 인터넷 상에서도 통상 3초 이상의 인내심을 요구할 경우, 쉽게 'Home' 키를 누르는 것이 다반사이다.

그런 이들에게 책을 권한다는 건 이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행위처럼 보인다. 물론 '자기계발'서는 잘 팔린다. 하지만 박스 친 핵심 서머리가 없는 책은 팔리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는 박스로 친절하게 솔루션을 준다. 사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뉴얼이기 때문에 따라하는 것만을 강요한다. 물론 독자의 비판적 사고가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재사유하는 기반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일반'독자'들이 '비판적'씩으로나 책을 읽지 않을 뿐더러, 요즘의 자기계발서는 종교서적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라'라고 협박하는 게 일쑤다.

이러다보니 사회과학서가 안팔리는 게 당연하다. 대한민국엔 현재 인문/사회과학을 읽는 0.1% 정도의 인구와 인문/사회과학을 읽지 않는 99.9%의 인구로 대별되게 되었다. 1% 정도가 사회과학을 읽었던 70~80년대의 사회과학서적 붐은 90년대를 마지막으로 끝을 보았고, 이제 아무도 세상의 구조를 말하려 하지 않고, 한국사회는 정해진 상수(constant variable)로서의 구조 안에서 자신의 생존만을 위한 기법 계발에 몰입하는 스테이지에 돌입하고 있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는 다이나믹하게 변해가는 '구조'와 그에 대해 무기력하게 '개개인의 전술'만으로 돌파하는 쪼개진 세대인 20대의 적나라한 묘사다.) 

 

어떤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논의가 안 일어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쟁점은 더 이상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사실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한 꺼풀 벗겨볼 여력도, 의지도 없는 거다. '행간' 혹은 '맥락'을 읽어내려는 노력도 기력도 없는 거다.

게다가 한 번씩 망치로 대중을 때려대는 지식인들은 다 어디 가버렸는 지 보이지 않고, 세상엔 테크니션과 폴리페서들이 점령해 버린 듯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시점에서의 다시금 망치를 들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인 거다. '이지경'인 세상에 대해서 한 마디쯤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을 어떻게 생산해 낼꺼냐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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