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자본주의 남한에 찌들대로 찌들어 버린, 하지만 북의 명령에 거부할 수는 없는 남파간첩 기영,
80년대 주체사상을 익히고 혁명적으로 살려했으나, 삶에 치여서 어느새 그냥 그런 주부로 사는 마리
재주가 많으나, 한국사회의 모순이라는 것을 쉽게 몸으로 느끼고 사는 그들의 딸 현미
그리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연류되어있는 인물들..

하루만에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은 남파간첩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과연 털고 갈 수 있을텐가?? 만약,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단순히 가족이 엮여 있기에 때문 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양쪽의 체제 둘 다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일 거다.

북에 귀환을 하지 못할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거기까지 생각할 틈은 없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왜냐면, 그들이 예전에 벌인 북 고위 인사출신

탈북자들을 대하는 것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배신자의 척결에 얽혀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이미 그렇게 저렇게 여기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 버린, 생의 반절을 살아버린 그냥 그럭저럭한 가장.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루의 이야기가 한시간씩 한 챕터씩으로 펼쳐진다.

단순히 기영의 중심구도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리의 시점에서, 현미의 시점에서, 그리고 또 그들과 연류된 국정원 직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애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두사람의 남자와 동시의 관계를 갖는 아줌마의 이야기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수치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는 친구의 악소문을 활용하는 중학생의 이야기나....

어쩌면, 우리의 삶의 복합체의 이야기다. 또 어떻게 본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꿈같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결에 묻어있는 흠결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졌다. 아니, 세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지난 이십 년간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고(혹은 적절한 유혹을 받지 못했고), 구매자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엄청난 정보를 취급하지도 않았고, 위에서 지시하는 모든 일을 대체로 무난히 수행해왔다. 그런데도 그의 운명은 갑자기 그 방향을 틀어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파이든 다른 그 무엇이든, 실패한 남자가 된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었다. 그는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 실패한 남자의 아내가 앉아 있었다."(pp 345-346)

"어쩌면 이것이 시작일 것이다. 여기서 한 번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카프카의 인물들처럼 그 어떤 복잡한 폐쇄회로 속을 분주히, 그러나 반복적으로 오가면서, 자신에게는 절박한 비극이 타인에게는 우스꽝스런 희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계속 겪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이들은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생물학자처럼 자신의 행동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리라."(p.379)
 

기실 개개인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없이 흘러갈 것 같은 세계, 어쩌면 반대로 세계는 반대로 가만히 있지만, 내 자신이 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결론은, 허무하다. 그냥 그렇고 그런, 서로의 내면으로는 상처받았지만, 절대 인상을 구기고서 빈정상했다고 티내기에는 가혹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상을 피고 세상과 대해야만 겨우 살아남을 만큼 가혹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역사의 행위자들을 다면적으로 비추면서 그 갈등들을 끈적거리지 않게 서늘하게 비추는 소설이다.

"기영은 차분히 그들이 알려주는 것들을 들어 익혔다. 그러면서도 빈 강의실을 가득 채운 과장된 엄숙함 때문에 모든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한편의 소극처럼 느껴졌다. 이들이 정말 남한의 체제를 전복할 혁명적 전위들이란 말인가? 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들이? 이들이 그 극악하다는 안기부의 고문을 견뎌내고 폭압적 국가제도를 전복할 수 있단 말인가? 기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북에서 본 혁명가들은 오진우나 김일성처럼 모두 칠십줄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 어쨌든 기영은 이제 NL진영의 활동가가 된 셈이었다."(p.193)


혁명의 시대로 했던 때의 사람들을 한발짝 떨어져서 비추어주고, 그 시대가 허무하게 스러져버린 지금과 연결지을 수 있는 건 어쩌면, 기영이라는 인물만이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하고 지금도 겪지 못한, 후대의 사관만이 가능하겠지..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 결의 촉감을 나타내기에 소설은 역사책보다 어떨 때는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지도 모르겠다. 다분히 주관적으로. 하지만 역사 또한 역사가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가????

 내 선배들의 이야기와, 내 삼촌의 이야기와, 내 또래의 이야기가 묘하게 오버랩된 소설이다. 탐미적인 김영하를 봤다면, 이번에는 혁명의 시대를 겪은 김영하를 보는 기분이랄까??? 여전히 김영하는 유려한 문체와 탁탁 씹히는 질감의 어휘를 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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