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24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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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촌장이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페소아 속에는 페소아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는 여러 개의 이명(異名, 다른 이름)을 만들어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만든 이명들은 단순한 가명이나 필명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명을 만들고, 각 이명들마다 나름의 직업과 캐릭터, 상황까지 설정해뒀습니다. 이명들마다 문체나 주제는 당연히 달랐습니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는 세 명의 페소아가 쓴 시들이 묶여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목가적인 삶을 추구했던 알베르투 카에이루. 그는 모든 이명들의 스승이자, 페소아가 유일하게 심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너무 고전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던 리카르두 레이스, 그는 외과의사이자 시인이었고 그리스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진짜라서 일관된 캐릭터나 성향없이 중구난방으로 작품활동을 했던 페르난두 페소아. '진짜'였기 때문에 어떤 성향으로 특징 지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저마다 성향에 맞는 시를 그들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나면, 어디에도 끼워넣을 수 없는 시들이 남았을 것이고, 페소아는 그런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발표했을 것입니다.


   사물 내면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들에 내면의 의미 따위는 없다는 것뿐. 23쪽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연스럽고 편안해지는 것

    행복할 때든 불행할 때든

    보는 것처럼 느끼는 것,

   걷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하루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

   노을이 아름답고, 남는 밤도 아름답다는 걸……

   그런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62~63쪽


   여름이 산들바람의 가볍고 따뜻한 손길로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게 산들바람이라서 상쾌하면 그뿐

    혹은 뜨거워서 불쾌하면 그뿐,

   그리고 내가 그걸 어떻게 느끼든,

   그렇게 느끼기에, 그 느낌이 나의 의무…… 63쪽


   개인적으로, 이 시집에 소개된 세 작가의 작품들 중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시들이 가장 좋았습니다. 알베르투 카에이루는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사물은 그냥 사물로만 존재할 뿐, 그 사물 속에는 어떤 내재된 의미 같은 것은 없으니 사물은 사물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사물에 어떤 내재된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항상 그것들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피곤할까요? 심지어 자신 속에 여러 명의 '자신'을 갖고 있는 페소아는 오죽할까요?

   이 시집의 제목 또한 그의 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11쪽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181쪽


   페소아 속에는 여러 명의 페소아가 늘 존재해서, 오롯이 한 이명으로서 시를 쓸 때에만 그 한 명의 이명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그가 홀로 있을 수 있는 방편이 되었을 겁니다.

   페소아의 표현을 빌려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책은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페소아의 시집을 처음 읽게 된다면, 김한민 번역가의 해설을 먼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페소아가 여러 개의 이명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모른채 이 시집을 접했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페소아의 작품에 다른 작가의 작품이 함께 실려있다고 오해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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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나와 함께 한 책들이다.

비록 100권을 못 채워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전과 세계문학을 많이 만나서 뿌듯하다.

 

나는 하고 싶은게 너무나도 많아서 뭔가를 꾸준하게 잘 못하는 성격인데,

민음사 세계문학 캘린더를 만난 이후로 꾸준하게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2019년에도 우리는 함께 할 것이다. 더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과 함께.

 

 

1. 일리아스 / 호메로스
2.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 라우라 에스키벨
3. 그날의 온도 그날의 빛 그날의 분위기 / 에그2호
4. 오뒷세이아 / 호메로스
5. 안녕 엄마 안녕 유럽 / 김인숙
6. 순이삼촌 / 현기영
7. 새로운 인생 / 오르한 파묵
8.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 정은우
9. 천일야화 1 / 앙투안 갈랑
10.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11. 천일야화 2 / 앙투안 갈랑
12. 설국 / 가와바타 야스나리
13. 천일야화 3 / 앙투안 갈랑
14. 천일야화 4 / 앙투안 갈랑
15. 천일야화 5 / 앙투안 갈랑
16. 천일야화 6 / 앙투안 갈랑
17.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18. 벚꽃동산 /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19. 침묵의 봄 / 레이첼 카슨
20.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 문태준
21. 이성과 감성 / 제인 오스틴
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프랑수아즈 사강
23.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 조 퀴넌
24.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 / 김언
25.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
26. 설득 / 제인 오스틴
27. 백야 외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28.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 로맹 가리,마누엘레 피오르
29. 피터 래빗 전집 / 베아트릭스 포터
30. 이성과 감성 / 제인 오스틴
31.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 허연
32. 무엇이든 쓰게 된다 / 김중혁
33. 전쟁과 평화 1 / 레프 톨스토이
34. 창밖은 오월인데 / 피천득
35. 인연 / 피천득
36. 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
37. 역사의 역사 / 유시민
38. 전쟁과 평화 2 / 레프 톨스토이
39. 전쟁과 평화 3 / 레프 톨스토이
40. 전쟁과 평화 4 / 레프 톨스토이
41.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42.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43.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 마스다 미리
44. 경애의 마음 / 김금희
45. 네 이웃의 식탁 / 구병모
46. 아무래도 싫은 사람 / 마스다 미리
47.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48. 이만큼 가까이 / 정세랑
49. 칼자국 / 김애란
50. 풍요와 거품의 역사 / 안재성
51. 있으려나 서점 / 요시타케 신스케
52.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53. 고고심령학자 / 배명훈
54. 열두 발자국 / 정재승
55. 문맹 / 아고타 크리스토프
56. 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57. 뜨거운 피 / 김언수
58. 미스 플라이트 / 박민정
59.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마이클 부스
60.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 피터 스완슨
61. 눈먼 시계공 / 리처드 도킨스
62. 지하로부터의 수기 / 도스토예프스키
63. 열하일기 1 / 박지원
64. 쇼코의 미소 / 최은영
65. 열하일기 2 / 박지원
66. 퇴근길엔 카프카를 / 의외의사실
67. 첫사랑 / 투르게네프
68. 사소한 부탁 / 황현산
69.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 소포클레스
70. 토지 1 / 박경리
71. 토지 2 / 박경리
72.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73. 파우스트 1 / 요한 볼프강 괴테
74. 파우스트 2 / 요한 볼프강 괴테
75. 사진의 용도 /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76. 토지 3 / 박경리 ---> 비록 몇 권 밖에 못 읽었지만, 다시 시작했다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77. 소설 보다 : 봄-여름 / 김봉곤,조남주,김혜진,정지돈
7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 작별 / 한강 외
79.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80.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81. 딸에 대하여 / 김혜진
82. 누구를 위하여 좋은 울리나 (상) / 헤밍웨이
83. 누구를 위하여 좋은 울리나 (하) / 헤밍웨이
84. 단 하나의 문장 / 구병모
85.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 허수경
86.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 혜민
87. 옥상에서 만나요 / 정세랑
88.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 백세희
89. 밤하늘 아래 / 마스다 미리
90.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유발 하라리
91. 사양 / 다자이 오사무
92.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93. 열하일기 3 /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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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01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로 고전을 읽으셨군요 -

제 새해 목표는 벽돌책 독파로 정했답니다.
과연 할 수 있을랑가는 모르겠지만요.

뒷북소녀 2019-01-02 12:54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요즘 고전의 재미에 푹 빠져있답니다.
저도... 새해에 벽돌책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레삭매냐님은 어떤 책 독파할 계획이신지 궁금하네요.

목나무 2019-01-01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한해 정말 열심히 읽었구나.
올해도 뒷북소녀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

뒷북소녀 2019-01-02 12:55   좋아요 0 | URL
넵! 저도 언니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우리 올해는 작년보다 더 건강하게 만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건강하세요.

카알벨루치 2019-01-01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과 평화!!!!! 우아 축하드립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경의감까지 ^^

뒷북소녀 2019-01-02 12:56   좋아요 1 | URL
어머, 경의감이라뇨... 감사합니다.
올해는 <부활>을 읽을 계획입니다.
카알벨루치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2018년 12월에 읽은 책들, 1일1책 실천!

 

12월 시작하면서부터 너무 신나게 놀아서 후반에는 좀 쉬면서 놀았다.

추운 날씨 탓도 한 몫해서, 이불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

2018년에 나온 책들은 2018년에 읽고 마무리하고 싶어서

마지막 주는 정말 1일1책을 하며 미친듯이 읽었다.

꼭 2018년에 마무리하고 싶었던 『열하일기』도 완독하게 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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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1 0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멋지다 뒷북소녀님! 나도 글쓰고싶은데 손가락 탓하며 댓글만 쓰고 있습니다 해피 뉴 이어~

뒷북소녀 2019-01-01 15:33   좋아요 1 | URL
민음사 세계문학 캘린더 덕분입니다.^^
꾸준하게 못하는 성격인데, 캘린더를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손글씨로 기록까지 남기게 되더라구요.
카알벨루치도, 2019년 더 많은 책으로 든든하게 채우시길 바랍니다.

blanca 2019-01-01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근사하네요. 일일 일책이라니요.

뒷북소녀 2019-01-01 15:34   좋아요 0 | URL
날씨 탓이에요. 너무 추워서요... 꼼짝도 하기 싫더라구요.^^

hnine 2019-01-01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만하지 않은 책들인데, 대단하십니다.

뒷북소녀 2019-01-01 15: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19년에 우리 더 재미있는 책들로 만나보아요.

cyrus 2019-01-01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하일기>를 읽었을 때가 고비였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즐겁게 1일 1독하세요. ^^

뒷북소녀 2019-01-01 15:36   좋아요 0 | URL
아, 어떻게 아셨어요?^^ 1권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갈수록 재미가 늘어지는게...
그래서 2018년에 끝내고 싶어서요... 몇 달 만에 3권을 완독하고... 뿌듯해 했어요.
네. 이젠 1일1책은 어려울 것 같구요... 1일1독으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잡으셔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05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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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그는 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되었나?

   1936년 7월, 스페인에서 공화파와 파시스트 간에 내전이 발발하자 전세계 젊은이들은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그 중에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특히 헤밍웨이는 왜 그 먼 곳까지 달려갔던 것일까요?

 

   스페인 북부에 있는 '론다'는 아름다운 협곡 위에 세워진 마을입니다.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마을을 찾는데, 바로 120m 협곡 위에 걸쳐져 있는 '누에보 다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문학가들도 이 곳을 사랑했습니다. 시인 릴케는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얘진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헤밍웨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이 곳을 사랑했는지는, 이 다리 끝 산책로에 붙어있는 '헤밍웨이 길(Paseo de E Hemingway)'이라는 이름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곳을 배경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이곳은 마냥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이 협곡은 인민전선에 대항한 민족주의자들이 처형되었던 장소이며, 다리 한 가운데에는 그들을 가둔 감옥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것을 소설로 남겨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고나면 스페인까지 달려가야만 했던 헤밍웨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이 이야기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지 1년 정도 지난 1937년 5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부터 화요일 오전까지, 단 며칠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 몬태나 소재의 대학에서 스페인어 강사로 일하고 있던 로버트 조던은 내전이 발발하자 1년동안 휴가를 내고 국제여단 소속으로 참가합니다. 그는 폭파전문가로, 공화파의 공격이 개시된 직후에 다리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 협곡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협곡에는 원래 게릴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몇 팀 있었는데, 그는 이 게릴라들의 도움을 얻어 다리를 폭파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성공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릴라 수도 적은데다가 폭파 후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공화파의 공격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는 점.

 

   "그럼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공격은 정규 사단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시작할 걸세. 사전 작업으로 공중 폭격이 있을 거야. 자네, 귀머거리는 아니지?"

   "그럼 비행기가 폭격을 개시하면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로군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봐도 좋아. 이번에는 내가 공격하는 거니까."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든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일세. 이 작전이 마음에 안 들면 지금 말하게. 그리고 해낼 자신이 없어도 지금 말하게."

   "하겠습니다. 잘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 다리 위로는 아무것도 올라오면 안 된다는 것, 그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조건일세. 그리고 나는 그걸 사전에 알아야겠네." 골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시시콜콜 지시하는 것을 싫어하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19~20쪽

 

   하지만 그 작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뻔히 알면서도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걸까? (……)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271쪽

 

   자신은 사전에 확실하게 알아야겠다고 하면서 조던에게는 정확하게 공격 개시일을 알려주지 않는 상관 골스. 다른 어려움은 어떻게든 극복해 볼 수 있을테지만, 이건 정말 곤란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 수 있을까요?

 

   아무튼 조던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게릴라들과 계획을 짭니다. 그 사이 게릴라군 대장인 파블로와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다른 게릴라군이 전멸하는 일을 당하기도 하고, 게릴라군에 의해 구출되어 지금은 게릴라군과 함께 지내고 있는 마리아와도 사랑에 빠져 평생 함께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로부터 도망쳐 마리아와의 평범한 일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임무만을 생각합니다. 결국 조던은 다리를 성공적(!)으로 폭파하지만, 그 다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난 뒤에 달리 할 일이 있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사랑했고 또 공화국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럼 네 정치적 신념은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그런 신념이 없지.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273쪽

 

   대체 이 공격이 왜 필요한지조차 나는 모르지 않나.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권, 141쪽

   다시 맨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헤밍웨이 아니 로버트 조던은 왜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스페인까지 달려왔을까요? 사실 그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목숨을 건 다리 폭파를 왜 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상관인 골스는 아예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혹자들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정치적인 행동 동기가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목숨을 걸고, 심지어 사랑까지 포기하면서 수행해야 했던 임무라면 강력한 동기나 정치적 신념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공에게는 그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정치적인 인물 혹은 지도자가 아닌 이상, 우리같은 대부분의 개인들에게는 '전쟁'이란 그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오는게 아닐까요? 뚜렷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왜 이 작전을 수행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

 

   저놈들과 내가 다른 것은 서로 다른 명령을 받아 놓고 있다는 것뿐이야. 저놈들은 파시스트가 아니야. 그런 명칭으로 부르기만 할 뿐 실제로는 아닌 거야. 저놈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녀석들일 뿐이야. 놈들은 우리를 상대로 싸우지 말아야 하는 건데. 나는 살인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322쪽

 

   특히, 헤밍웨이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피력합니다. 전쟁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살인, 아무런 속죄 행위 없이도 묵인되는 살인, 살인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 행해지는 살인. 그리고 '상대편'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말살되는 인간성. 이런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한 헤밍웨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집필을 시작해 1940년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합니다. 그는 직접 전쟁에 참여해 싸우거나 원조를 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의 참상을 하루빨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이런 마음으로 스페인까지 달려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좋다. 지금 일을 다 끝내면 책을 써야겠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진실된 것만을, 그리고 깨닫게 된 것만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럴려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전쟁에서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412쪽

 

   전쟁이 끝나면 모든 살인 행위에 대한 공식적인 속죄 행위가 있어야 해. 전쟁 후에 종교가 없어지게 된다면 적어도 공식적인 시민 행사 같은 것이라도 조직해서 전쟁 동안의 살인 행위에 대해 속죄를 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사람답게, 그리고 참답게 살 수 없을 거야. 살인이 필요할 때가 있기도 하지. 그러나 그건 인간으로서는 못 할 짓이야.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리 모두의 잘못을 씻어 줄 속죄 행사가 반드시 있어야 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327쪽

 

 

   "그들은 전쟁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요. 왜 싸우는지 모르는 거죠."

 

   "그건 그래요. 그들이 알고 있는 거라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주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에요."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74~75쪽

 

   다른 이유는 없어. 바로 그것 때문이야. 그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전쟁에서는 늘 그래야 하지만, 자기 자신 따위는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거야. 전쟁에서 개인적인 느낌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철저히 자아를 배제해야 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권,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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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거기까지 가신건가요? 우아

뒷북소녀 2018-12-19 09:16   좋아요 1 | URL
네네^^ 헤밍웨이도 좋아하고 미술관보다는 이런 경관을 더 좋아해서 찾아갔어요.^^ 정말 멋진 협곡이더라구요.

카알벨루치 2018-12-19 09:24   좋아요 1 | URL
진짜 작가찾아 삼만리하셨네요 로쟈님처럼 <뒷북소녀의 문학순례>뭐 이런거 찍는거 아닌가요? 열정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굿뜨

뒷북소녀 2018-12-19 13:00   좋아요 0 | URL
저도 로쟈님처럼 러시아문학기행 떠나고 싶어요^^

레삭매냐 2018-12-19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옷 저희 회사 동료분도 저 다리
보러 에스파냐 다녀왔다고 하시더라구요...

대단하십니다 !

뒷북소녀 2018-12-19 13:00   좋아요 0 | URL
ㅋㅋㅋ맞아요. 스페인 갔음 꼭 봐야죠. 다리도 정말 대단하답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북소녀님 메리 크리스마스 되소서!!!

뒷북소녀 2018-12-26 12: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
2018년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소서.
저는... 해피 뉴이어~^^
 

당신의 동네 사람은 '오싹함'에서 안녕한가요?
단편소설 「동네 사람」, 강화길,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후보작
   서로 인사하고 지내는 동네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요? 사실 꽤 오랫동안 계획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만 산 저에게는 동.네.사.람.이라는 단어가 참 낯섭니다. 알고 지내는 동네 사람? 당연히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집 앞 슈퍼를 갈 때도, 집 근처 스타벅스를 갈 때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나갈 때가 많습니다. 어차피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동네인걸요.

   어디나 눈들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나를, 너를 빤히 바라보는 눈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주목을 끌면서 온 동네가 우리를 멋대로 마음대로 오해하도록 내버려둔다. 127쪽

   그런데, 소설 속 '너'와 '나'가 살고 있는 동네는 '조금 피곤한' 동네입니다. 이런 동네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저는 생각만해도 피곤해집니다. 어디를 가든 '너'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동네 사람들도 일부러 귀를 기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동네 구조상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뿐입니다.

   참, 그때 할머니 사고 난 거 그건 잘 해결했어요?
   (…) 할머니 발가락이 부러졌다고 그러던데 아니에요? 강아지 발이 부러졌댔나. 아무튼 잘 해결됐나 해서 물어봤어요.
   여자는 요 앞 철물점에서 들었다고 하고, 미용실에서 들었다고 하고, 목욕탕에서 들었었나, 하면서 고개를 갸웃한다. 120~121쪽

   '나'는 늘 동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너'가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시장 앞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하다가 폐지 줍는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는 개를 친 것입니다. 사실은 개를 직접적으로 친게 아니라 할머니가 쌓아놓은 폐지를 차로 넘어뜨리면서 그 폐지가 개쪽으로 쏟아졌는데, 다행히 개도 멀쩡하게 잘 걸었다고 합니다. 할머니에게 혹시나 몰라서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할머니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심환이라도 사드시라고 오만 원을 건네고 나온 것인데, 동네에는 '너'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고 그냥 갔다고 소문이 난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너'는 할머니 뿐만아니라 그 장면을 목격하고, 들었다는 사람들과도 껄끄러운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더 주목받기 전에 '너'가 사과하고 마무리했으면 싶은데, '너'는 억울해서인지 사과를 하는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이상한 사람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직장이 없는 사람들. 가족이 아닌 사람들. 밤이나 낮이나 할 일 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나 하면 없고 없어졌나 하면 어디선가 또 나타나는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줄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눈에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계약이 종료되면 기간을 연장하고 또 연장하면서 몇 년간은 편하게 있고 싶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데에 얼마나 섬세하고 큰 노력이 필요한지, 너는 여전히 모르는 게 틀림없다. 125쪽

   물론 이사를 하는게 좀 힘든 일이 아니지만, '나'가 이토록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나'와 '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도를 넘는 호기심을 보이거나 혹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경계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나'와 '너'를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너'가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동네 사람들은 '너'의 편에 서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없고 가난한 할머니 편에 서서, 할머니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동네 사람들을 보며 오싹함을 느낍니다.

   지금껏 수없이 오간 이 길에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함이다. 137쪽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도 그랬지만, 작가는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울타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씁니다. 그 방식 또한 너무 과하지 않아서, 저는 작가의 이런 시선이 좋습니다. 당분간 예의주시하고픈 작가이기도 하구요.

   너와 내가 매일 오가는그 길을 따라 우리가 모르는 어떤 말들이, 추측들이, 오해들이, 따라온다. 고작 사과를 하고 말고 하는 문제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불필요한 관심을 끌고 싶지 않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너와 나의 일상 근처를 어슬렁거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 135쪽

   그러니까 이 동네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너와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우리도 모르는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불필요한 오해를 키우고 반드시 그게 어떤 부당한 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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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앙마 2018-12-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보면 우리 고향사람들이 그랬는데... 서로 대문도 없이 산다는 이유로..이런말 저런말..
흔한말로 그 집 숟가락이 몇갠지 안다는 이유만으로..
근데 정말 한번 틀어지면 죽을때까지 말도 안하는 이웃도 보고 맘 아팠고...
암튼...그 오싹함이 뭔지 살짜기...느낌이 오는기분..하지만 실제로는 그 오싹함을 겪지는 않았다는 진실..
아마도 그냥..그러려니 하고 산 고향이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동화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