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24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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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촌장이 부른 <가시나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페소아 속에는 페소아가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는 여러 개의 이명(異名, 다른 이름)을 만들어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그가 만든 이명들은 단순한 가명이나 필명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명을 만들고, 각 이명들마다 나름의 직업과 캐릭터, 상황까지 설정해뒀습니다. 이명들마다 문체나 주제는 당연히 달랐습니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는 세 명의 페소아가 쓴 시들이 묶여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목가적인 삶을 추구했던 알베르투 카에이루. 그는 모든 이명들의 스승이자, 페소아가 유일하게 심신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너무 고전적이어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적었던 리카르두 레이스, 그는 외과의사이자 시인이었고 그리스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진짜라서 일관된 캐릭터나 성향없이 중구난방으로 작품활동을 했던 페르난두 페소아. '진짜'였기 때문에 어떤 성향으로 특징 지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저마다 성향에 맞는 시를 그들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나면, 어디에도 끼워넣을 수 없는 시들이 남았을 것이고, 페소아는 그런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발표했을 것입니다.


   사물 내면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들에 내면의 의미 따위는 없다는 것뿐. 23쪽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연스럽고 편안해지는 것

    행복할 때든 불행할 때든

    보는 것처럼 느끼는 것,

   걷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하루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

   노을이 아름답고, 남는 밤도 아름답다는 걸……

   그런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62~63쪽


   여름이 산들바람의 가볍고 따뜻한 손길로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게 산들바람이라서 상쾌하면 그뿐

    혹은 뜨거워서 불쾌하면 그뿐,

   그리고 내가 그걸 어떻게 느끼든,

   그렇게 느끼기에, 그 느낌이 나의 의무…… 63쪽


   개인적으로, 이 시집에 소개된 세 작가의 작품들 중 알베르투 카에이루의 시들이 가장 좋았습니다. 알베르투 카에이루는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사물은 그냥 사물로만 존재할 뿐, 그 사물 속에는 어떤 내재된 의미 같은 것은 없으니 사물은 사물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사물에 어떤 내재된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항상 그것들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들은 얼마나 피곤할까요? 심지어 자신 속에 여러 명의 '자신'을 갖고 있는 페소아는 오죽할까요?

   이 시집의 제목 또한 그의 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게는 야망도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11쪽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181쪽


   페소아 속에는 여러 명의 페소아가 늘 존재해서, 오롯이 한 이명으로서 시를 쓸 때에만 그 한 명의 이명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그가 홀로 있을 수 있는 방편이 되었을 겁니다.

   페소아의 표현을 빌려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책은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페소아의 시집을 처음 읽게 된다면, 김한민 번역가의 해설을 먼저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페소아가 여러 개의 이명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모른채 이 시집을 접했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페소아의 작품에 다른 작가의 작품이 함께 실려있다고 오해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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