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단편소설이라니.
소설집을 다 읽은 건 아니고 <백야> 한 편만 읽었는데,

도입부터 첫문장까지 줄줄이 너무 아름다워서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에.
밑줄 그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책이 표지와 같은 노란색이 될 지경.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친애하는 독자여! 그토록 별빛이 영롱하고 찬란한 밤하늘을 쳐다보면 저도 모르게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하늘 아래 정녕 각양각색의 변덕쟁이와 심술꾸러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225쪽

도스또예프스끼의 장편소설들을 몇 권 읽었지만, 이토록 감성 충만한 소설은 처음이다.

 

 

한순간의 아름다움이 그렇게나 빨리 그렇게나 돌이킬 수 없이 시들어 버림에, 그녀가 당신 앞에서 그렇게나 기만적으로, 덧없이 명멸함에 당신은 서러워한다. 그녀를 사랑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에 당신은 애달파한다...... 232쪽

여기서 '그녀'는 '봄'이다. 나도 미처 마주하지 못하고 보내버려 애달파하고 있는 봄.



하루 중에는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모든 사업과 업무와 의무가 끝나고 모두들 먹고 쉬려고 집으로 총총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가는 길에 사람들은 저녁과 밤과 남아 있는 모든 자유로운 시간에 관한 색다르고 즐거운 화제를 생각해 냅니다. 251쪽

바로 지금 이 시간.

 

 

 

 

당신이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한다면,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내 사랑이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당신이 느끼지 못하도록 그렇게 사랑할 겁니다. 당신은 다만 매순간 듣게 될 겁니다, 느끼게 될 겁니다, 당신 곁에서 감사에 넘치는, 감사에 넘치는 심장이 고동치고 있음을, 당신을 위해 뜨거운 심장이...... 29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연애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
   1999년 말 영국 BBC 방송에서 '지난 천 년간 최고의 문학가는 누구인가'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물론 1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영국이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다.'는 셰익스피어였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한 인물이 다소 의외였다. 그 수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 여왕에게 작위를 받은 대문호들을 제치고 제인 오스틴이었던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사실 평생 단 여섯 편의 작품만 쓴 작가다. 게다가 그 여섯 편의 작품도 모두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사람들은 그 작품들을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생전에도 그다지 인기를 끈 작가는 아니어서 수십 년의 작품 활동으로 번 돈이 고작 700파운드 밖에 되지 않았다. 사후에도 한동안은 그 유명한 찰스 디킨스나 T.S 엘리엇 등의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들의 유명세에 밀려, 영문학사에 그다지 이름을 올리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그녀의 작품들을 격찬하면서부터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 조금씩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20세기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200년이나 묵은 그녀의 작품들이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기의 대상이 되었다. 서수경의 『영문학 스캔들』, 262~263쪽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은 그녀가 23세 때인 1797년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쓰여졌지만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오만과 편견』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813년에 제인 오스틴이 개작해 발표한 것입니다.

   베넷 家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엄청난 재산과 지위를 가진 다아시에게 청혼을 받지만 그의 오만하고 냉랭한 첫인상과 청혼하는 태도 때문에 그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다아시는 그녀의 거절을 상상 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여자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는데, 게다가 자신은 부유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 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열렬히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67쪽

그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감정 외에 다른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야 했다. 애정에 대해서보다도 자존심에 대해 말할 때 더 열변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 그런 결혼은 집안에 수치라는 것,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성은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신분 때문인 듯했지만, 그의 청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268쪽

   "당신이 어떤 태도로 청혼을 하셨다 해도 그걸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273쪽


   영국에서는 장남에게만 부모의 재산과 지위를 물려주게 되어 있었고, 만약 그 가족에게 남자가 없다면 집안의 다른 남자에게 물려주도록 상속을 한정시킨 법적 장치가 있었습니다. 베넷 家에는 딸만 다섯이었고, 따라서 베넷 씨가 죽으면 그의 모든 재산은 먼 친척인 콜린스에게 상속되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자신 뿐만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재산 한 푼 상속 받지 못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177쪽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처음 알게 된 바로 그 순간이라 해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이미 당신의 태도를 보고 당신이 거만하고 잘난 체하며 자기 생각만 하면서 남의 감정은 무시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다른 일들이 쌓이면서 그런 좋지 않은 인상이라는 토대 위에 단단한 혐오감이 자리 잡았다고 할까요.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당신 같은 사람과 결혼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말씀 충분히 잘 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양. 당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며, 지금은 다만 제 감정을 부끄러워할 일만 남았습니다.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건강과 행복을 빌겠습니다." 273~274쪽


   오만한 다아시와 편견으로 가득 찬 엘리자베스. 다아시의 사랑도 가시 돋친 엘리자베스의 거절 때문에 끝나버리는 것 같지만, 다아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신사적인 남자였습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거절 이유를 들은 다아시는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개선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만하고 차가워보이는 인상 때문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들른 그의 영지에서 그의 평판을 듣고는 그동안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특히, 엘리자베스의 막냇동생 리디아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온가족이 힘들어하자, 가족들 모르게 리디아를 도와 사건을 해결해 줬다는 사실까지 알게되자 그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호감은 점점 더 커져버립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아시를 생각하든 위컴을 생각하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에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를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293~294쪽


   그의 태도가 놀랍도록 변해 있었던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자기에게 먼저 말을 건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다 그렇게도 정중한 말투로 가족들의 안부까지 묻다니! 이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만큼 그가 위엄을 부리지 않는 것을 그녀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한 적도 없었다. 350쪽


   존경과 존중보다도 더욱더 그녀 마음속에 간과할 수 없는 호감의 동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감사였다. 한때 자기를 사랑했다는 데 대한 것뿐 아니라, 그를 거절할 때 토라져서 톡톡 쏘아대던 무례함이라든가 그러면서 퍼부은 모든 부당한 비난들을 용서해 줄 정도로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데 대한 감사였다. 366쪽


   『오만과 편견』에는 네 커플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너무 소극적이라 상대를 놓칠뻔한 제인과 빙리, 순식간에 휩싸인 사랑의 감정 때문에 집을 뛰쳐나간 리디아와 위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사랑 없이 결합한 샬럿과 콜린스, 오만과 편견 때문에 상대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제인 오스틴은 네 커플이 사랑하는 방식을 통해 당시 영국의 사회상과 가치관은 물론, 각 캐릭터들의 성격까지 정확하게 분석해 보여줍니다.
   이런 제인 오스틴을 혹자들은 비판합니다. 그녀가 작품의 소재나 주제면에서 동시대 남성 작가들과는 달리 너무 소소한 가정사나 남녀 간의 사랑, 결혼만을 다루고 있는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얼핏 보면 제인 오스틴의 방식과 소재는 낡고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나쁜 독자들이 범하는 착각"이라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말했듯이, 20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만큼 그녀의 소설은 세련되고 섬세합니다.
   흔히들 그녀의 소설을 '연애소설'의 원조라고 하는데,
단순히 '연애소설'로만 읽는다면 제인 오스틴과 엘리자베스가 지하에서 가시 돋친 편지를 보내오지 않을까요.

   "여성의 평판이란 아름다움만큼이나 부서지기 쉽다는 것. 무가치한 남성에 대해서 여성은 아무리 몸가짐을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 398쪽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이따위 일에 우리가 감사해야 하니 말이야. 행복할 가망이 거의 없는데도 결혼해야 하고, 남자의 성격이 형편없는데도 우린 기뻐해야 한다는 거지!" 417쪽


   제인 오스틴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은 언니를 부양해야 했습니다. 결혼을 할 기회도 있었지만, 단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가난한 작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가 그렇게 외쳤던 "자기만의 방" 하나 없이 틈틈히 바느질이며 집안일까지 하며 글을 써야 했고, 끝내 작가로서의 그녀의 이름을 알리지 못한채 마흔셋이라는 나이에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고 사회에 나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겠죠.
  
책을 읽다보면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에 제인 오스틴이 겹쳐집니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 가운데 '엘리자베스'를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로 꼽기도 했습니다. 그럼, '엘리자베스' 아니 제인 오스틴을 만나보러 갈까요?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31쪽

"결혼에서 행복이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어. 서로의 취향을 아주 잘 알거나, 혹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둘의 행복이 더 커지는 건 결코 아니야. 취향이란 건 계속 변하게 마련이라 나중엔 누구든 짜증이 날 만큼 달라지게 마련이야.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의 결점은 될수록 적게 아는 것이 더 나아." 35쪽

"자신의 견해를 절대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에 판단을 잘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지요." 135쪽

"그 ‘열렬하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너무나 진부하고 의심스럽고 막연해서 감이 잘 안 잡혀. 진정으로 탄탄한 애정만이 아니라 단 반시간 동안의 만남에서 생겨난 감정에도 종종 그런 표현을 쓰곤 하니까 말이야. 빙리 씨의 사랑이 도대체 얼마나 열렬했는데?" 202쪽

조바심치며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더라도 예상한만큼의 만족을 오롯이 얻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진짜 행복의 출발점으로 다른 시기를 지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소망과 희망이 이루어질 그 시점을 정하고, 다시 그것을 기대하는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위로하고, 또 다른 실망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30쪽

마음 맞는 여행 동반자와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마음이 맞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건강한 체질, 즐거움을 더해 주는 명랑한 성격, 밖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서로 간에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애정과 슬기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3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성과 감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렇게 공감가는 세계문학은 또 없을듯. 인간은 크게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을 대표하는 두 자매가 등장한다. 혹자는 제인 오스틴이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 글을 쓰며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하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성의 두 측면을 정확하고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벚꽃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거리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입니다. 화사하게 폈다가 이내 떨어져버리는 벚꽃이 아쉬워서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펼칩니다. 그런데 체호프의 '벚꽃 동산' 역시 봄날은 아닙니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오, 나의 순수한 어린 시절! 바로 이 어린이 방에서 잠을 자며 또 여기서 동산을 바라보았지. 아침이면 행복에 젖어 잠에서 깨곤 했어. 그때도 동산은 이랬어,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기뻐 웃으며) 정말 온통, 온통 하얘! 오, 나의 동산! 어둡고 음산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겪고도 너는 다시 젊고 행복에 넘치는구나. 242쪽

   한때 「벚꽃 동산」은 파란 하늘 아래 하얀 꽃들이 펼쳐진 '정말 아름다운 동산'(243쪽)이었지만, 지금은 빚 때문에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이 벚꽃 동산의 여지주, 라네프스까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이름─에게 '벚꽃 동산'이란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과거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로빠힌 당신의 벚꽃 동산은 빚 때문에 팔리게 되어, 돌아오는 8월 22일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시고,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벗어날 방법이 있으니까요······. 내 방안은 이렇습니다. 잘 들어 보시죠. 당신의 영지는 시내에서 20베르스따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옆에는 철도가 나 있고. 만일 벚꽃 동산과 강가의 땅을 별장 용도로 분할해서 임대한다면, 1년에 적어도 2만 5천루블을 벌 수 있을 겁니다. (······) 아무 쓸모도 없는 이 집을 비롯한 낡은 건물들은 모두 철거해 버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벚꽃 동산도 벌목해야겠지요······.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벌목? 오, 맙소사,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이 지방에 뭔가 흥미로운, 아니 멋진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우리 벚꽃 동산뿐이랍니다. 237쪽

   그녀는 상인 로빠힌이 '벚꽃 동산'을 계속 소유하려면 그저 보는 것이 아닌 돈을 벌 수 있는 별장 등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할 때도 듣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씀씀이는 커서 돈을 아낄 줄도 모르고, 집으로 밴드를 초대해 파티까지 엽니다. 당연히 그녀의 벚꽃 동산은 경매에 붙여지고, 상인 로빠힌이 이 '벚꽃 동산'을 사게 됩니다.

   로빠힌 아, 하느님, 벚꽃 동산은 나의 것입니다! (······) 나의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 이 일을 모두 보신다면, 매나 맞고 배우지도 못한 예르몰라이가, 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던 바로 그 예르몰라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지를 산 것을 보신다면······. 나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농노로 지냈던, 부엌에조차 들어가지 못했던 바로 그 영지를 샀습니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287쪽

   하루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은 채 돈이나 쓰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지주네 사람들과는 달리, 상인 로빠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으로 '벚꽃 동산'을 산 것입니다. 그는 지주네 사람들을 "경솔하고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사람들"(256쪽)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로빠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당신들과 떠들어 대는 것도 이제는 괴롭군요. 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빈둥거리는 두 손이 마치 남의 손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291쪽

   로빠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일을 할 때면, 마음이 가벼워져서 내가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소. 그런데 이 러시아에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293쪽

   '벚꽃 동산'은 상인에게 넘어가고 지주네 사람들은 모두 '벚꽃 동산'을 떠납니다. '벚꽃 동산' 또한 곧 벌목이 되겠죠. 이렇게 막을 내린 희곡을 작가 체호프는 '코미디'라고 주장합니다.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각각의 상황들과 그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은 웃음을 쏟아내게 합니다.
   희곡이라는 장르답게 인물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거나 엉뚱한 대답을 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이 또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요소인데, 이런 대화들은 『벚꽃 동산』에 실려있는 6편의 희곡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체호프의 희곡에서 인물들은 서로 진정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횡설수설에 가까운 불필요한 대사들이 행위의 진행을 방해하여 집중된 대화체가 낳는 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대화를 나누는 듯하지만 독백하고 있는 것이다. 역자 해설_309쪽

   『벚꽃 동산』에는 표제작인 「벚꽃 동산」을 포함해 모두 6편의 단·장막극이 실려있습니다.
   이웃집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가 사소한 일로 아가씨와 싸우는 남자,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의 어려움을 친구에게 하소연하고 있는데 똑같은 일을 부탁하는 친구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 중요한 「기념일」에 정성껏 준비해 온 연설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들 때문에 기침을 하며 연설을 중단해 버린 대표, 사랑하는 여자에게 총으로 쏴 잡은 「갈매기」를 준 극작가, 죽은 누이의 남편이 아내로 맞이한 여자를 사랑한 「바냐 아저씨」, 그들도 역시 비극적인 상황을 코미디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인 셈이죠.

   체호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작가이다.
   그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예술가이다. ─ 수전 손택

   체호프는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이다. ─ 레이먼드 카버

   현대의 단편소설은 체호프를 통해서 양식과 주제를 습득했고, 현대의 연극은 체호프의 극적 스타일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에게 바친 헌사는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글은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 쓰여진 것처럼 세련됐습니다.
   이런 봄날의 체호프, 어떠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 황색 저널리즘의 최후
   어느 일요일 저녁, 카타리나는 뫼딩 경사의 집으로 찾아가 자신이 《차이퉁》 의 기자를 죽였다고 자백합니다.

   자신이 낮 12시 15분경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으며, 뫼딩이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녀 자신은 12시 15분에서 저녁 7시까지 후회의 감정을 느껴 보기 위해 시내를 이리저리 배회했지만,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했노라고. 12쪽

   27세의 성실한 가정관리사였던 카타리나는 어떤 이유로 기자를 죽였으며, 그 행동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건은 며칠 전 카니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변호사 댁에서 가정관리사로 성실하게 일하고 있던 카타리나는 카니발 때 우연히 만나 춤을 춘 남자 때문에 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그 남자는 은행 강도에 살인 혐의까지 받아 경찰의 추격을 받고 있었는데, 그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그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아침이 돼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경찰은 밤새 그녀의 전화를 도청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집에는 카타리나 뿐이었습니다. 살인 혐의를 받고 있던 그 남자, 괴텐은 이미 사라진 후였습니다. 밤새 경찰들이 그녀의 집을 지켰는데, 그는 어떻게 빠져나갔을까요? 경찰은 용의자 대신 카타리나를 연행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신문들 역시 빠져나간 용의자 대신 카타리나에게 일제히 초점을 맞춰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카타리나와 용의자가 어떤 관계였는지, 그녀가 얼마짜리 아파트에서 살며, 그 아파트는 어떻게 구했는지, 평소 그녀의 행동은 어땠는지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 한 뒤 기자 특유(!)의 상상력까지 발휘해 기사를 쏟아냅니다.
   심지어 암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까지 찾아가 무리하게 인터뷰를 시도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잘 몰랐던 그녀의 어머니가 던진 한마디 조차, 기자는 카타리나에게 불리한 문장으로 고쳐 보도합니다.

   그녀는 ,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차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107쪽

   얼마 후 잡힌 용의자가 카타리나는 자신의 정체를 몰랐다고 진술하자, 그녀는 혐의를 벗고 경찰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나, 몇몇 신문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차이퉁》은 또다른 음모를 제기하며 카타리나를 몰아갑니다.

   경찰이나 검찰청은 블룸의 혐의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파렴치한 괴텐을 정말 믿을 생각인가? 본지는 수차례 반복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의 심문 방법이 너무 부드러운 것은 아닌가? 비인간적인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118쪽
 
   이 사건으로 인해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던 그녀의 일상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뿐만아니라 그녀와 함께 일상을 공유했던 지인들도 엉뚱하게 기사의 표적이 되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는 '이 쓰레기를, 한 사람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이 빌어먹을 쓰레기를 읽고 또 읽었지만, 읽을수록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 쓰레기의 날조된 표현들이나 "빨갱이 트루데"라는 표현에 대한 분노가 점점 고조되어, 마침내 항복하고 트루데에게 도와 달라고 비굴하게 부탁했다. 87쪽

   
그들은 살인자이자 명예를 훼손한자라고. 그녀는 물론 그런 것을 무시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의 명예, 명성 그리고 건강을 앗아 가는 것이 이런 종류의 신문사 관계자들의 의무인 모양이라고 했다. 110쪽

   선정적이고 날조된 기사들로 인해 하루 아침에 명예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카타리나는 묻습니다. 이렇게 명예를 잃어버린 자신을 위해 국가가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어떻게 보면 경찰도 한 몫 한 셈이니까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황당합니다. 이것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며, 언론의 자유는 함부로 침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이틀 치 《차이퉁》을 핸드백에서 꺼내 보고, 국가가 ─ 이렇게 그녀는 표현했다. ─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그녀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 그사이 그녀는, 심문이 왜 '삶의 세세한 구석까지 파고드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문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게 되었노라고 했다. 하지만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 ─ 신사의 방문 같은 문제 ─ 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62쪽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언론의 자유를 경솔하게 침해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소송도 정당하게 취급되고 불법적인 정보의 원천에 대해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는 걸 그녀는 믿어도 좋다고 했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의 비밀 보장을 위해 거의 열정적이라 할 만큼 변론을 하며,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그런 무리(모임)에 끼지도 않는 자는 언론에도 그를 거칠게 묘사할 빌미를 결코 주지 않는 법임을 단호히 강조한 사람은 바로 젊은 코르텐 검사였다. 67~68쪽

   그래서 카타리나는 결심합니다. 자신의 잃어버린 명예를 위해 직접 나서기로 말입니다.

   이 소설은 하인리히 뵐이 1975년에 발표한 것으로, 당시에도 선정적인 황색 저널리즘이 날개 돋친듯 팔리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언론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여론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로 인해 한 개인이 철저하게 파헤쳐지고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소설 속 《차이퉁》 기자와는 대조적으로 사실만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절제된 표현으로 써내려 간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더는 안돼, 더는 안 된다고요. 그자들이 이 아가씨를 끝장내고 말 거야. 경찰이 안 그러면 《차이퉁》이 그럴 거예요. 《차이퉁》이 그녀에 대한 흥미를 잃으면, 사람들이 그럴 거고요." 42쪽

   그녀가 일했던 변호사 댁의 부인이 한 이 말이, 오늘도 선정적인 기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쫓고 있는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8-03-28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있습니다, 소설을 보시고 나서 영화도
보시면 아마 감흥이 다를 것 같습니다.

뒷북소녀 2018-03-28 12:27   좋아요 0 | URL
찾아봤는데 네이버 이런 곳에서는 다운 받을 수가 없네요. 아쉽게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