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했던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 당신의 가출이 승인되었습니다!
단편소설 「가출」, 조남주

   아버지가 가출했다. 엄마의 전화를 받은 것은 퇴근길 지하철에서였다. 나는 순간 가출을 출가로 착각했다.
   "응? 아버지 절에도 안 다니잖아."
   "가출하셨다고. 가, 출. 집 나갔단 말이다."
   차라리 출가했다고 하면 믿었을 것이다. 올해 나이 일흔 둘. 치매 같은 정신 질환은 없다. 일곱 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아버지. 그렇지만 엄마가 숟가락과 젓가락과 마실 물까지 완벽하게 제자리에 놓아야 식탁에 와 앉는 아버지. 정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양가 부모님 장례 이외에는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는, 삼 남매가 태어나던 날도 출근했다는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며 신용카드도 만들지 않고 자동이체도 하지 않고 인터넷뱅킹도 하지 않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가출을 했단다. 조남주, 「가출」, 61쪽

   평생 성실하게 살았던 일흔 둘의 아버지가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이제라도 내 인생 살고 싶다. 나를 찾지 마라. 저축은행 160만 원은 가져간다. 미안하다.'(66쪽)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가출을 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한 달 전쯤 가출을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뒤늦게 연락을 해왔던 것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더이상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아버지 집에 모여서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의견을 나눕니다. 실종 신고를 하고, 전단지를 돌리거나 흥신소를 통해 찾아보자는 식의 의견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가출한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없어서 당장 처리해야 되는 일들의 어려움을 막내딸에게 호소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이라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습니다. 공공기관이나 은행 업무 정도는 출근하지 않는 엄마가 해도 될텐데, 굳이 짧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 처리합니다. 두 번이나 대입에 실패한 큰오빠가 대학은 포기하고 취직해서 동생들 학비를 벌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자신의 일이라며 말립니다. 회사가 어려워 몇 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았을 때도,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모두 아버지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 집에는 평생 아버지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도맡아온 크고 작은 일 들을 처리할 사람이 없다. 조남주, 「가출」, 72쪽

   이런 아버지가 가출하고 나니, 어머니가 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지금껏 한번도 하지 않은 은행 업무를 봐야하고, 공과금을 내야 합니다.
   아버지는 휴대전화도 가져가지 않았고, 경찰은 단순가출이라며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가족회의를 마친 다음 날, 일요일 아침에 카드사로부터 승인 문자메시지가 옵니다.

   'web발신 카드 승인 4,500원 일시불 12/11 09:11 삼거리식당 누적 4,500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던 아버지에게는 막내딸인 '나'가 쥐어준 신용카드가 한 장 있었는데, 가출하면서 그 카드를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카드를 사용하면 '나'에게 카드사용내역이 날아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아버지. 나는 카드 도난 신고를 할까 고민하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아버지가 카드를 사용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한번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몇 차례 허탕을 친 후에는 더이상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고는 며칠 만에 또 카드를 사용하셨다. 이번에도 분실이나 범죄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문자메시지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삼거리식당에서 4천 5백 원짜리 아침밥을 사 먹고 카드로 결제한 아버지. 왜그러셨을까. 조남주, 「가출」, 78쪽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버지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곳은 경치가 좋구나. 너무 걱정 마라. 엄마에게 말하지 마라. 지리산을 오르고 제주 바다를 구경하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 아버지도 가족을 떠나 잘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언젠가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조남주, 「가출」, 85쪽   

   「가출」 속 아버지는 또다른 아버지를 연상시킵니다. 그 아버지 역시 평생 가족들을 위해 모범적으로 살다가 마흔에 집을 떠납니다. '나'의 아버지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빈몸으로 집을 나갑니다. 그는 바로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출한 상황, 그들의 부재만 생각하고 그들이 가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생 가족들을 위해 살면서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웠을까요? '아버지'라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기 때문에 내색 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가출'을 승인합니다!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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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8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나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돈 워리하는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을
까요.

신세대스러운 풍경이네요.

아버지의 출.가.

뒷북소녀 2018-11-30 10: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거죠. 가끔씩.
사실 요즘 젊은 작가들... 문체가 별로여서... 안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좋았어요. 아무튼 젊은 작가들 중에서는 나름 연륜이 있는 작가라서 그런지.

빨강앙마 2018-11-29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도 ㅜㅜ

뒷북소녀 2018-11-30 10:49   좋아요 0 | URL
토닥토닥! 남편분께 시그널을 보내보세요...
 

잘못된 '짐작'의 전말 : 누구도 타인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단편소설 「손」, 강화길,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후보작

   퍽, 하는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걸었다. 대문 앞에 다가섰다. 퍽, 소리가 또 들렸다. 커다란 돌덩이 같은 것이 벽에 세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나는 곧장 뒤로 돌았다. 무언가 있었다. 짧고 얇은 어떤 것이 골목길 뒤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산한 느낌이 가슴 안 쪽을 찌르며 내려왔다. 나는 서둘러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강화길 「손」, 59쪽

   초등학교 교사인 '나'는 남편이 인도네시아로 파견 근무를 떠나자 어린 민아를 데리고 시어머니가 있는 시골로 내려옵니다. 혼자서 딸까지 어떻게 키울까 걱정이었는데, 시어머니가 민아를 봐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담임교사였고 학생 수는 일곱이 전부입니다. 시골 학교라고 해서 따돌림이나 학교 폭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마을 이장의 손자인 용권이와 옆집 미자네 손자 대진이도 '나'의 학생입니다. '5학년이지만 학교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서글서글 잘생긴 소년'인 용권이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데, 용권이를 종종 괴롭힙니다. 분명 용권이의 주도로 아이들이 대진이를 괴롭히고 있는데, 대진이는 말이 없고 '나'에게는 심증이 있지만 확실하게 현장을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딱 한번 용권이가 대진이를 밀어 넘어뜨리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용권이가 먼저 '나'에게 실수라고 말하고 용권이에게 사과합니다. '나'는 용권이가 영악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늘 당하기만 하고 아무 말도 없는 대진이가 답답하기도 합니다.

   한편, 시어머니가 옆집 미자네가 이장님 이야기를 자꾸 이상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일 때문에 미자네가 이장 집에 간 적이 있는데 이장이 갑자기 뒤에서 미자네를 끌어안았고, 이 이야기를 미자네는 거들먹거리며 시어머니에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시어머니가 평소 이장님을 좋게 생각하고 있어서 미자네가 거들먹거린 것으로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소문나면 이장님 입장이 곤란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덧붙입니다.
   '나'는 이번 사건도 그렇고, 대진이의 일도 있고 해서 미자네를 방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사실을 할머니인 미자네에게는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자네 역시 용권이가 공부 욕심이 많아서 그런거라며, 심지어 착하다고 칭찬만 합니다. 아이들이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미자네 뿐만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도 '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애들이 문제가 많아요. 그래도 우리 마을 애들이 아주 착해요.아시죠?"(75쪽)

   이 마을에서는 이장의 주도로 농한기에 날을 잡아 된장을 만드는 사업을 합니다. 그 날은 '손'이 없는 날이어야 하는데, '나'는 그 손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마을에서의 첫해, 나는 시어머니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머님, 손이 뭔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악귀다, 악귀.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 그년이 없는 날 귀한 해콩을 삶는 거다." 강화길 「손」, 62쪽

   이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나'는 조금씩 불안해집니다. 어디서, 누구에게서 나는지 알 수 없는 '퍽, 퍽' 소리. 밤마다 대문을 철커덩 흔드는 어떤 것. 이 모든 것이 혹시 '손'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앙심을 품을 수도 있는 용권이가 내는 소리일까요?

   드디어 '손'이 없는 날이 되어 마을은 새벽부터 메주를 삶느라 바쁩니다. '나'도 어린 민아를 데리고 나와 못하는 일이지만 돕는 시늉을 합니다. 그런데, 눈 깜짝 할 사이에 용권이와 귓속말을 하던 민아가 사라집니다. '나'는 미친듯이 민아를 찾습니다. 지금 당장 찾지 않으면 마치 누군가가 민아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은 심정으로 말입니다. 겨우 용권이를 찾았는데, 용권이와 함께 있던 대진이는 할머니와 함께 민아가 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나'는 대진이가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채 말해서 거짓말일거라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울고 있는 민아를 미자네가 달래며 데리고 가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미자네를 찾아 미자네까지 가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이 마을에는 정말 문제가 많은 아이와 이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깨닫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잘못된 편견과 오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유독 '나'만 그토록 불길하게 따라다녔던 '퍽, 퍽'하는 소리. 무언가 부딪치고 터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두들겨 맞는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아궁이에 밀어넣은 마른 대나무 더미에서 나는 소리'(83쪽)였습니다. 대나무 가지의 빈 구멍이 아궁이 속에서 폭죽처럼 터지면서 나는 소리였는데, 그녀처럼 도시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일 겁니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용권이와 대진이는 사이가 좋았고 이장과 미자네도 스스럼 없는 사이였습니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내뱉었던 그 말은, 아이들을 벌주기 위해 저녁까지 학교에 붙들어 놨던 날 그녀가 학부모들에게 했던 말인데, 학부모들이 비꼬아 그녀에게 다시 들려준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 중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무슨 방법이든 찾아내리라는 것을. 내 화를 풀기 위해, 그리하여 내 앞에 누구를 내보낼지 결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읍내의 학원 갈 시간을 빼서라도, 곧장 집에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서라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주말에도 만나서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걸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일은 결코 대화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왜냐하면 나는 담임교사였고, 학생 수는 겨우 일곱 명이었다. 그런 건 그냥 알 수 있는 거였다. 저녁까지 아이들을 남겼던 날, 학부모에게 전화를 받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요즘 애들이 문제가 많아요. 그래도 우리 마을 애들이 아주 착해요. 아시죠?" 강화길 「손」, 86쪽

   '나'는 자신을 '학생들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담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알며 감춰진 것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겨우 일곱 명 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의 담임이니까요. 시어머니와 미자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상황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말의 늬앙스나 이야기의 전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썩은 내가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 방구석의 냄새일까. 집 안 전체에 스며든 냄새일까. 마을 전체에 가라앉은 냄새일까. 아니면,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일까. 문득 가만히 생각하니 그랬다. 손이 왜 매일같이 모두를 방해하는지, 전부를 망치고 싶어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천천히 묻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 냄새를 맡았다. 이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땅한 일이었다. 강화길 「손」, 86~87쪽

   '나'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듣던 우리는 '나'와 같은 의심을 하게 되지만, 마지막엔 깨닫게 됩니다. 마을의 평화를 깨고 문제를 일으켜 해코지를 한 건 결국 '나'였다는 것을, 사실은 '나'가 '손'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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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소설 보다
김봉곤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한 손에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시리즈 『소설 보다』
   소설 보다』는 참 아기자기한 시리즈입니다.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을 묶은 단행본 시리즈로, 1년에 네 권씩 출간된다고 합니다. 계절의 리듬에 따라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빠르게 선사하며, 한국 문학의 현재와 호흡할 것이며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 책은 봄과 여름, 두 계절의 선정작들을 담고 있습니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 :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일부의 독자들을 위한
   서점에서 '나'의 책을 발견했다며 거의 5년만에 날아온 혜인의 문자. '나'는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부산으로 내려가 직접 사인해서 줄테니 사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산해보니 혜인과는 2011년, 그녀가 졸업할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친구와의 만남은 이토록 허무하고, 쉽고, 단박에 잡혔다 안부도 없이 기별도 없이 용건만 말하고 끊었지만 그게 부족했다거나 미안하지 않았다는 것마저 익숙했다. 「시절과 기분」, 14쪽

   이렇게 불쑥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아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자주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런 친구들도 참 좋은 친구들입니다.
   아무튼 각설하고, 혜인은 '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입니다. 책 속에는 '나'의 사연과 취향이 담겨 있는데, 적어도 혜인에게는 직접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책을 사겠다는 그녀를 저지하고 다급하게 약속을 잡은 것입니다.

   책을 뿌리겠다는 말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제보'라는 단어에 지레 움칠해 나는 전화를 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 사람은 다 알았다. 등단 소감에도, 소설에도, 잡문에도 제발 좀 알아달라고 봐달라고 온갖 떼를 다 써놨는데 모를 수가. 그건 때론 대수였고 대체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혜인에게만큼은 꼭 내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다. 「시절과 기분」, 13쪽

   부산까지 내려간 '나'는 혜인과 함께했던 '그 시절과 기분'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그곳들을 돌아다닌다. 직접 사인한 책도 그녀에게 전달하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하지 못한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릴테니 그때 이야기하자고 말합니다.
   '나'가 떠올리는 그 시절 속에는 뚜렷한 사물(소재)들이 등장합니다. 훌리건천국, 스페셜포스, 나프나프, 에고이스트, 숨마쿰라우데, 개념원리... 언뜻 떠오르는 것도 있지만 짐작 조차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절을 이야기하는건지, 그때의 기분은 어떤 기분인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 김봉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좋다고 말합니다.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 오히려 그 특수함을 발견하고 알아주는 독자를 만나고 싶어요." 「인터뷰 : 김봉곤 X 황예인」 53~54쪽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름, 스피드』 중

조남주 「가출」 : 가부장의 부재, 아버지가 사라진 가정
  
아버지가 가출했다.(61쪽) 「가출」의 첫문장입니다. 일흔 둘의 아버지가 이제라도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다며 가출을 한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가 가출한지 한달이 다 되어가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뒤늦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아버지 집에 모여서 밥을 먹고 의견을 나눕니다.
   아버지에게는 막내딸인 '나'가 주어준 신용카드가 한 장 있는데, 아주 가끔씩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 '나'의 폰으로 날아옵니다. '나'는 그게 아버지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곳은 경치가 좋구나. 너무 걱정 마라. 엄마에게 말하지 마라."(85쪽) 이렇게 말이죠.

김혜진 「다른 기억」 
   학교 신문사에서 활동했던 '나'와 '너'. 신문사 주간 교수였던 임 교수가 각종 비리와 횡령에 연루돼 학교와 신문사를 떠나게 되자 그들의 사이에는 틈이 생깁니다. '나'는 임 교수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 혹은 사실들을 받아들였지만 '너'는 다른 사정이 있을거라며, 그렇게 좋은 교수님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신문사를 떠납니다.

   낡지도 닳지도 않는 책.
   뭐 하러 그런 것을 다 기억하고 있나. 그러다가도 한 번씩 내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좋은 것을 좋은 대로 두는 일.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두는 일. 망치거나 훼손하지 않고 간직하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그 모든 일을 없던 것처럼 무너뜨리지 않는 일.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묻고 싶었다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세간의 말들을 무시하고 좋았던 순간들만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네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다른 기억」, 119~120쪽

   내 것이었고 내 것이 될 수 있었던 어떤 추억에 대해. 관계를 망가뜨린 것에 대해. 내가 깨부수지 않아도 좋았을 어떤 신뢰와 믿음에 대해.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순간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을지 몰랐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내 안의 무언가가 이날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릴지도 몰랐다. 「다른 기억」, 121쪽


   '너'는 교수님과의 좋았던 기억, 교수님의 좋은 부분만 떠올리며 비리가 드러났는데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그 관계가 벌어진 것이 서운할 뿐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나빴던 부분도 퇴색되어 예전처럼 나쁘게만 여기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바로 눈 앞에 드러난 것을 외면하고 좋았던 기억만 간직할 수 있을까요? '너'는 선생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런 식으로 회피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정지돈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왔고 그 전까지 영천에서 살았으며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133쪽) 나온 태순과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한 양코씨"(133쪽). 그 시절에 그들은 비슷한 처지여서 친하게 지냈지만 양코씨는 1970년 9월 연세대 대학원을 중퇴했고, 태순은 한국 남성과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립니다. 이 소설은 오랜만에 한국에 들른 태순의 회상을 담고 있는데, 회상을 끝내며 태순은 이렇게 말합니다.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으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154쪽   
   '일상'에 관심이 없다는 정지돈 작가. 이 소설의 기획 자체가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전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듯이, 문장은 상당히 아방가르드하고 그것을 채우고 있는 소재들은 상당히 낯섭니다. 그는 소설 속에 현실을 그려놓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데, 소설은 물론이고 인터뷰까지 그만의 세계가 있어 보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그때 다시!
   봄엔 김봉곤과 조남주의 소설이, 여름엔 김헤진과 정지돈의 소설(하필이면 두 작가 모두 뜨거운 여름의 상징, 대구 출신입니다.)이 '이 계절의 소설'로 선정되어 실려있습니다. 『소설 보다』에는 각각의 작품들에서 봄과 여름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또 어떤 작가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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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3권은 살인자 김평산의 아내 함안댁의 자살로 시작한다. 그저 인간 노릇 못하는 남편을 둔 죄로 죽은 함안댁이 안쓰럽긴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죽은 함안댁이 목을 맨 나무에서 내려지자 사람들은 목을 맨 새끼줄부터 시작해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 간다.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藥物)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라는데, 그 모습이 살풍경하다. 아마도 사람이 목을 매 죽은 나무를 꺼려하거나 무서워할까봐 만든 말일텐데.

   옮겨지는 시체를 따라 사람들이 방 앞으로 몰릴 때 봉기는 짚세기를 벗어던지고 원숭이같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목맨 새끼줄을 걷어 차근차근 감아 손목에 끼고 난 다음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툭툭 분지른다. 그 소리에 돌아본 몇몇 아낙들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였다. 어느새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바우랑 붙들이, 마을의 젊은치들도 덤비듯이 쫓아왔다. 모두 엉겨붙어 나뭇가지를 꺾어 간수하기에 바쁘다. 순식간에 나무는 한 개의 기둥이 되고 말았다. 넋빠진 것처럼 강청댁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서 서방은 주저주저하다가 두만네와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짜고 있는 마누라를 힐끗 쳐다본다. 그는 살며시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옷소매 속에 밀어 넣는다. 노상 횟배를 앓는 마누라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마는 그 중에서도 하늘병(간질병)에는 떨어지게 듣는다 카더마."
   몽톡하게 된 나무를 올려다보며 봉기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
  
"죽은 나무라서 우떨란고? 효험이 있이까?"
   아낙 한 사람이 미심쩍게 말했다. 봉기는 씩 웃는다.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藥物)이 된다는 믿음에서 모두들 덤벼들어 꺾은 것인데 죽은 나무여서 과연 정기가 통하겠느냐는 아낙의 의심이다. 병에 효험이 있기로는 목을 매단 끈이나 새끼줄이 제일이라는 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었다. 『토지』 1부3권 11쪽

   3권에서는 함안댁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들이 죽는다. 호열자가 유행해 김 서방과 강청댁이 죽고, 봉순네와 윤씨 부인까지 죽는다. 심지어 문 의원을 호열자도 피했는데, 낙상해서 죽는다. 신난 건 조준구뿐이다. 그는 서울에서 부인과 아들까지 대동해 내려왔다. 집안을 추스릴 사람이 없어진 최 참판댁에서 조준구는 사랑방을, 그의 부인은 안방을 차지하고 주인 노릇을 한다. 그나마 멀리 떠났던 최치수의 지기 이동진이 돌아왔지만 이내 떠나버려, 서희는 다리 병신이 된 수동과 길상, 어머니를 잃은 봉순이 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

  
최 참판댁에서는 김 서방이 죽은 뒤 돌이와 봉순네는 동시에 발병하여 죽었다. 그 다음의 희생자는 윤씨 부인이었다. 길상은 밤길을 타고 읍내까지 문 의원을 데리러 갔다. 문 의원이 와도 이미 허사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길상은 앉아서 부인의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고 수동이도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읍내에 가서 길상이 들은 소식은 문 의원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집에서 말고 출타한 곳, 그러니까 우관스님을 찾아 절에 갔다는 것은 착오였었고 진주에 갔었다가 그곳에서 변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길상이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윤씨 부인은 힘없는 팔을 들어 자기 가슴을 두 번인가 두드렸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는 손목을 잡고 길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토지』 1부3권 251~252쪽

  
무엇보다도 윤씨 부인의 죽음이 허망했다. 그렇게 단단히 최 참판댁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죽음에 이르는 길은 순간이었다. 게다가 책에서는 단 몇 줄로만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일이란, 사람의 생이란 그런 것이다. 
   3권에서도 역시 용이의 우유부단한 처신은 끝나질 않는다. 호열자로 강청댁이 죽고, 임이네는 용이의 아들을 낳았지만 용이는 다시 돌아온 월선을 찾아간다. 임이네는 호열자로 두 아들을 잃었지만 용이의 마음이 월선이에게 향할까봐 전전긍긍이다. 아무리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만, 어미로서 자신을 잃은 안타까움을 전혀 보여주지 않아 정이 가지 않는다. 우악스럽긴 하지만, 강청댁의 죽음에 마음이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1~3권 주요 사건별 인물 정리

■ 윤씨 부인 : 최 참판가의 안주인이며 최치수의 어머니. 큰 키, 곧은 상체, 두드러진 뼈대에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여성으로 당당하게 집안의 권위와 재산을 지켜나간다.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기도드리러 갔다가 휴양차 와 있던 김개주에게 겁탈당한다. 문 의원과 월선네의 도움으로 무사히 김환을 낳고 이 사건은 집안의 비밀로 묻어버린다. 불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치수에게 냉정한 어머니가 되며, 김환에 대한 어미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찾아온 그를 하인으로 곁에 두며, 며느리 별당아씨와의 불륜을 용인한다.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저울의 추처럼 갈등을 안겨주어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김개주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조준구의 장기 거주에 불안을 느껴 비밀리에 서희에게 금, 은괴를 남겨주고 호열자로 죽는다.

■ 최치수 : 호는 석운. 최 참판가의 당주. 불륜에 대한 죄의식으로 냉엄한 어머니에 의해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며 방약무인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또한 부정적이고 인간혐오적인 선비 장암 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아 매사에 냉소적이다. '온갖 신경질과 우수가 감도는 모습', '당장에 눈을 부릅뜨고 고함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을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여자를 혐오하여 별당아씨를 냉정하게 대하며, 조준구와 어울려 자학적으로 여자들을 상대함으로써 남성을 잃는다. 또한 속박 당하지 않기 위해 집안의 재산관리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별당아씨가 구천과 도망한 후, 총을 구해 그들을 찾아나서지만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만다. 귀녀의 음모를 눈치채고 강 포수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김평산에게 살해되고 만다.

■ 김환 : 구천. 윤씨 부인이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들. 준수한 용모에 고귀한 풍모와 인품을 지녔으며, 우관은 '삭발 안 한 비구요 투구 없는 장수'로 비유한다. 연곡사에서 성장하다 동학혁명 당시 아버지인 김개주를 따라다닌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추척의 눈을 피해 방랑하다가 윤씨 부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최 참판가에 찾아간다.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갔을 때 성만을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무주구천동에서 왔다 하여 구천이로 불린다. 별당아씨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윤씨 부인의 도움을 얻어 산으로 도망한다.

■ 김개주 : 호는 해월(海月). 중인출신이며 우관 스님의 동생. 형인 우관 선사가 있는 연곡사에 휴양차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 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는다.

■ 간난 할매 : 바우 할아범의 처. 윤씨 부인의 몸종으로 최 참판가에 와서 일생을 보낸다. 자식이 없어 조카뻘이 되는 김이평의 둘째 영만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는다. 최치수 부친의 죽음과 삼수 할아버지(쇠돌)의 죽음, 최 참판가의 손이 귀하게 된 까닭 등의 내력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윤씨 부인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 김환의 정체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 김길상 : 고아로 구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라며, 금어(金魚)인 혜관에게서 그림을 배워 자신도 금어가 될 꿈을 키운다. 최 참판댁의 심부름꾼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 귀녀 : 최 참판댁의 계집종. 상전인 어린 서희의 모욕에 '원한과 저주가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눈길'을 쏟을 만큼 노비 신분에 대한 열등감과 양반에 대한 원한이 가득하다. 별당 아씨가 사라지자 최치수의 사랑을 얻어 아이를 낳음으로써 면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김평산, 칠성과 모의하여 보복의 의지를 불태운다. 임신을 위해 자수당에서 칠성과 '추악하고 비인간적인' 밀회를 거듭하던 중, 뒤따라 온 강 포수와 하룻밤을 보낸다. 귀녀의 임신사실과 음모를 눈치 챈 최치수가 강 포수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에 사무쳐, 서둘러 김평산으로 하여금 최치수를 교살하게 한다. 최치수가 성불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최치수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윤씨 부인에게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당당하게 사실을 실토한다. 강포수의 헌신적인 옥바라지에 감동하여 모든 죄를 뉘우치고 옥중에서 아들 강두메를 낳은 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는다.

■ 김평산 : '개다리'(무반) 출신의 몰락양반으로 학식도 경제력도 없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는 인물. 게으르며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중인출신의 아내 함안댁을 수시로 구타하고, 손버릇이 나쁜 큰아들 거복의 행동을 은근히 조장하는 등 악행을 일삼아 마을사람들로부터 천시당한다. 최치수에 대해 같은 양반 출신으로서의 이상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조준구의 암시를 받아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귀녀와 함께 최치수 살해모의를 하고 삼끈으로 교살하나, 윤씨 부인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잡힌 후에 자신의 죄를 끝까지 부인하며 떠넘기는 등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 조준구 : 몰락양반의 후예로 최치수의 재종형. 작가가 지적한, 『토지』의 가장 속악한 인물이다. 기질적으로 간교하고 음험하며 교만하다. 먼 친척인 최 참판가에 유하면서 김평산에게 최치수의 살해를 넘지시 암시하여 최치수 살해에 간접적으로 관여한다.

홍씨 : 조준구의 처. 사나운 눈꼬리에 희미한 눈빛, 번들거리는 입술과 어딘지 모르게 불결한 느낌을 주는 외모를 가졌다. 패악스럽고 욕심이 강하며 사치스럽다.

삼월 : 최 참판가의 계집종. 구천을 사모했으나 별당 아씨와 도망간 후 상실감에 젖는다. 조준구가 득세한 후, 그에게 몸을 버리고 홍씨에게 핍박받는다.

삼수 : 최 참판가의 하인. 할아버지 쇠돌이 권한 노루고기를 먹고 최치수의 부친이 죽은 사건 때문에 내내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조준구가 득세하자 그의 하수인으로 최 참판가에 복수하고 신분상승할 욕망을 가진다.

수동 :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우직하고 정이 깊으며 사려 깊다. 마음이 혼란한 구천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으나, 구천이 달아나자 그를 잡으러 최치수의 산행에 따라가는 운명에 처한다. 산행중에는 젊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기도 한다. 구천을 발견하자 놓아주고 강 포수의 오발사고로 성난 산돼지에게 다리를 다친다. 최치수와 윤씨 부인이 죽은 후 조준구로부터 서희를 지키려 한다.


강포수 : 지리산 일대에 이름난 명포수. 무성한 구레나룻에 완강한 골격, 힘줄이 솟은 큰 손등을 가졌다. 이 빠진 주막집 할머니가 주어다 길러 그 성을 따라 강씨이다. 노루사냥설화로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 최치수가 구천을 쫓으러 산에 갈 때 수동과 함께 동행하며, 오발사고로 수동을 다치게 한다. 이 일로 최 참판가에 머물면서 귀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귀녀가 옥에 갇힌 후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바치다가 옥중에서 출생한 아이를 거두어 사라진다.

박수동 :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우직하고 정이 깊으며 사려 깊다. 마음이 혼란한 구천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으나, 구천이 달아나자 그를 잡으러 최치수의 산행에 따라가는 운명에 처한다. 산행중에는 젊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기도 한다. 구천을 발견하자 놓아주고 강 포수의 오발사고로 성난 산돼지에게 다리를 다친다.

또출네 : 평사리의 미친 여자. 아들이 동학당으로 포살되자 실성하여 마을을 떠돈다. 최치수가 살해당하던 날 그곳에 불을 질러 함께 죽는다.


■ 이용 : 평사리의 상민. 부드럽고 자상하며 인색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 주는 성품. 월선을 사랑하나 신분차이로 헤어지고, 강청댁과 결혼하나 정을 못 붙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간다.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월선을 바라보고만 사낟. 하동에서 주막을 하던 월선이 강청댁의 질투로 떠나버리자 심한 갈등을 겪으며 일시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 공월선 : 무당 월선네의 딸로, 백부 공 노인이 사는 용정으로 서희 일행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용과 평생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인물로서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다. 이용과 서로 사랑하나 천민의 딸이라는 이유로 헤어지고, 이용은 강청댁과 결혼한다. 20살 연상의 봇짐장수에게 시집갔으나 살지 못하고 돌아와, 하동 읍네에서 주막집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웃집 사내아이인 천석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기도 한다. 가끔 용이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강청댁의 행패에 못 이겨 백부인 공 노인을 따라 용정에 가기도 한다.

※ 출처 : 『박경리대하소설 토지 인물사전』
이 인물 사전에는 더 많은 내용들이 실려 있지만, 2권에 나왔던 내용들로만 정리했다. 왜냐하면 이 인물 사전에는 엄청난 스포일러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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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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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그녀가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흔히 찍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 맛있는 음식을 담은 사진이 아닙니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에는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9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M이 떠난 후 잠에서 깨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햇살 속에서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이 복도 타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 나는 카메라를 가지러 갔다. 내가 했던 일을 M에게 말했을 때, 그 역시 이미 그런 욕구를 느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진 찍기를 계속했다. 섹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물질적인 표상을 보존해야만 했다. 어떤 것들은 관계 직후에 찍었고, 또 어떤 것들은 다음 날 아침에 찍기도 했다. 그 마지막 순간은 가장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몸에서 벗겨져 나간 것들은 그들이 쓰러져 장소에서 추락한 자세 그대로 밤을 보냈다. 그것은 이미 멀어진 축제의 허물이었고, 낮에 그것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시간을 체감하는 일이었다. 아니 에르노, 9~10쪽

   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 글을 써왔던 아니 에르노.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을 꺼내놓고, 그와 함께 글을 썼습니다. M과의 관계 후 남겨진 흔적들을 카메라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인위적으로 옷이나 신발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벗어놓은 그대로 찍습니다. 그렇게 찍은 40장의 사진 중 14장을 골라낸 뒤 각자의 글을 씁니다. 그 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 서로에게 공유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둘 사이에 규칙이 생겼다. 옷의 배치에 손대지 않을 것. 하이힐이나 티셔츠의 위치를 바꾼다는 것은 거짓을 조작하는 일이고 ─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기장 속 단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 우리 사랑 행위의 실재를 해치는 방식이었다. 아니 에르노, 10쪽

   사진 속 피사체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낡은 부츠, 하이힐, 청바지, 셔츠, 원피스, 속옷... 그러나 그것들의 무질서한 배열을 보고 있으면, 격렬했던 그들의 지난밤이 그려집니다. 침실도 아닌 현관 복도 앞에 흩어져 있는 옷들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신발끈을 풀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부츠 때문에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조급했을지.
   그들은 이렇게 내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일상적인 물건들만 사진 속에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더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상대방이 어떤 글을 썼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나는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가 또다시 분리되는 행위다. 가끔 두렵기도 하다. 글이라는 자신의 공간을 내놓은 일은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어떤 무의식적인 전략이 이미 실행되었을까. 단어와 문장을 견고하게, 꿈적이지 않는 문단을 만드는 것. 어린 시절 가끔 내 몸이 돌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방의 벽들이 끝없이 멀어졌던 것처럼 ─ 나중에 철학 수업 시간 이것이 조현병 증상이란 것을 배우게 됐는데, 놀라기는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에르노, 49쪽

   M을 만났을 때, 그녀는 유방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발을 쓰지 않은 머리도, 치료 때문에 기구를 끼고 있는 가슴도 M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녀는 "그가 암을 뛰어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70쪽)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 결핵이 그러했듯이 암도 로맨틱한 병이 되어야 한다고"(101쪽)도 말합니다. M과 함께했던 그 시절의 그녀는, 분명 로맨틱했습니다. 그녀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진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구현하는지는 알지만 용도는 알지 못한다. 마크 마리, 168쪽

   사진을 찍은 당사자도 모르겠다고 한 『사진의 용도』에 대한 의문점은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1940~)와 마크 마리(1962~)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이 이야기도 언젠가는 그녀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을까요? 사실 근황보다는 어떻게 만났는지가 더 궁금하긴 합니다만.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 조르주 바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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