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의 연애론 - 새롭게 쓰는
스탕달 지음, 권지현 옮김 / 삼성출판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한 달 전 정혜윤 PD의 독서기가 담긴 『침대와 책』에서 읽은 구절 하나가 있다. 그녀는 여러 감정들이 사무쳐 올 때 수천 가지 연애 감정을 적어놓은 스탕달의 『연애론』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는다고 했다. '책 속의 책'을 꼬리물기식으로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연애 감정이라는 것에는 상당히 무덤덤한 사람인지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렇게 무덤덤한데, 나이가 더 들면 얼마나 더 무감각해질까. 한 살을 더 먹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얼른 집어 들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연애 이론서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 두 사람이 있다.

─ "스탕달의 『연애론』을 지금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 " 이 책 읽으면 도움이 됩니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데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왜냐하면 충분히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놀라움과 감탄이 터지는 강렬한 기억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사랑인데, 우리의 풍습은 어떠한가. 젊은 여자를 시장에 내놓듯 맞선 시장에 선보여 미래의 남편을 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합법적인 매춘 행위는 도덕심을 크게 해하는 일이다. (p. 111)

 

어떤가? 모르고 읽는다면 요즘 시대의 이야기라고 어느 누가 믿지 않겠는가. 물론 이 구절뿐만이 아니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스탕달이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822년이었고, 분명 그 시대상이 녹아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오래 전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연애'라는 것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의 사랑을 보더라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뜨거운 사랑을 보더라도 지금과 별반 다른 것이 없지 않은가. 물론 보편적인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인 배경은 달라질 수 있다.

 

두번째 질문의 답은 잘 모르겠다. 스탕달의 연애 이론을 읽으면서 '아, 그래서 그땐 그랬구나.'하며 그 상황을 이해는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이론을 적용시켜 볼 구체적인 상대가 없으니 이렇게 하면 통하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책을 읽는 내내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연애'라는 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는 자체가 잘못이 아닌가 싶다. 스탕달 자신조차 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하물며 그것을 정리하려 들다니.

그래서 내 결론은 지금도 적용은 할 수 있지만 도움이 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는 거다.

 

이 책은 그냥 스탕달의 『연애론』이 아니라 앞에 '새롭게 쓰는'이 붙었다. 번역자가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 윤문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경계를 분명히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의 즐거움은 사랑하는 것이다. 정열은 다른 사람에게 불어넣어줄 때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더 행복한 것이다." - 라 로슈푸코 (p. 263)

 

2007/12/28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 18세기 조선경제학자들의 부국론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경제학자는 서양에만 있었다?

'18세기 조선 경제학자들의 부국론', 언뜻 생각해 보면 상당히 낯선 조합이다. 조선시대에도 부국론을 주장했던 경제학자가 있었나? 나름 학창 시절에 국사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낯설게 다가온다.

그렇다. 서양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던 경제학, 분명 조선에서도 존재했었다. 단지 '식민의 역사' 탓으로 잊혀졌을 뿐이고, 서양이나 일본 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보다 훨씬 낮게 평가받고 있을 뿐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서양의 경제학과 궤적을 함께하고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상과 이론이 분명 존재했다.

 

조선의 경제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중농주의 사상은 나라의 모든 근본은 토지에 있으며 백성의 대부분이 농민이기 때문에 토지 개혁만 잘 한다면 부국안민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경제 발전 모델이다. 이 사상은 유형원 이익 → 정약용을 거쳐 '아래로부터의 농민(토지) 개혁'을 주장했던 갑오농민군에게 계승된다.

다음으로 중상주의 사상은 잘 살려면 농업 생산이 아닌 상품 유통과 해외 무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제 발전 모델이다. 이 사상은 이지함 → 유수원 → 박지원 → 박제가 → 박규수를 거쳐 '위로부터의 정치 혁명'인 개화 독립당(개화당)에게 계승된다.

그러나 이 두 사상의 개혁은 결국 실패했다. 갑오개혁이든 갑신정변이든 어느 하나라도 성공을 했더라면 조선이 그렇게 쉽게 외세에 의해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조선 최대의 과제는 (지금처럼) 피폐해진 국가 경제를 살리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토지 개혁이 필요했다. 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였던 김육은 조세의 폐단을 막기 위해 대동법을 주장했다. 지방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대신 베와 쌀로만 조세를 수취하도록 한 대동법은 상공업과 시장 경제 발달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화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상평통보가 만들어졌고 본격적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최고 관료의 신분으로 자신의 개혁 사상을 현실 정책으로 입안하고 실천한 그의 사상은 공업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을 역설한 북학파에 의해 계승되었다.

 

조선의 최고 개혁 군주를 꼽으라고 한다면 전기는 세종대왕, 후기는 정조 대왕이라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을 꼽으라고 하면 세종 시대는 황희 정승을 쉽게 떠올리지만 정종 시대는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 시대에도 황희 정승 못지않은 명정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제공이다. 그는 정조 대왕이 실현한 개혁의 총사령관으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철폐시킨 '신해통공'을 단행해 일부 상인에 의한 시장 독점을 막았다. 또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계획도시라고 할 수 있는 화성 건설의 총지휘를 맡기도 했다. 당초 공사 기간을 10년으로 계획했지만, 그의 뛰어난 지휘로 2년 6개월로 단축했다. 당시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백성들의 강제 동원 대신 빈농들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급가모군'의 방법으로 노동력을 동원했다. 그 덕분으로 노동력 비용 절감과 공사 기간 단축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을 구한 경제학자에는 남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는 여성들에게는 '암흑의 시대'였지만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저술해 조선 유일의 여성 경제학자가 된 여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빙허각 이씨이다. 그녀는 전주 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달성 서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당시 달성 서씨 가문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그녀의 남편인 실학자 서유본이 그녀의 학문 및 저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뿐만 아니라 시동생 서유구는 그녀의 영향을 받아 보다 넓은 의미의 일반 경제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남겼다.

 

사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국사보다는 지리 교과서에서 더 깊게 다룬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지형적인 요소만을 다루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토지의 비옥도와 경작 조건은 물론, 목면의 산지와 재배 조건, 특용작품 재배로 부를 축적하는 방식 등을 밝혀 농업 생산성의 향상과 상업적 농업 경영을 주장했던 경제학자이다.

 

중상주의 학파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유수원은 '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영국의 고전주의 경제학자인 맬서스의 인구론을 뒤집는 주장을 했다. (그는 맬서스보다 60년 앞서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당연히 그의 이론을 알 리가 없다.) 『왜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는가?』에서 장 지글러는 기근이 인구 증가를 억제한다는 맬서스의 주장은 말도 안되는 소리며 기근은 시스템의 문제라고 했다. 유수원 또한 백성이 점차 가난하고 궁핍해지는 이유는 인구 증가가 문제가 아니라 비효율적인 경제 제도와 시스템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 외에도 18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종합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성호사설》의 이익,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조선 최초로 중상주의를 통해 부국을 지향한 토정 이지함, 중상주의 팍파의 브레인 박제가, 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오랑캐라도 섬기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박지원, 통상 개화를 통한 자주적 부국의 길을 밝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등도 등장한다. 사실 이들의 사상과 이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국사 교과서를 통해 접해왔다.

 

예나 지금이나 '분배'가 가장 큰 문제인 듯 하다. 이 책이 지금 나온 것은 아마도 시대의 반영과 요구 때문일 것이다. 특히 13인의 경제학자들을 모시고 구성한 가상 좌담은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듯 해서 흥미로웠다.

 

2007/12/27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실의 검은 표범
아모스 오즈 지음, 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강대국이 개입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분쟁을 보면서 사실 난 팔레스타인의 편이었다.

2,000년 전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유대인이 안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은 각국에서 유대인의 명성을 떨치며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큰 부자가 되어 있었다. 굳이 그들은 그 땅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민족이었고, 오히려 잃어버린 땅 때문에 더 똘똘 뭉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가난했다. 그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오랫동안 그곳이 자신들의 터전이라 믿으며 편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금의 중국 대륙이 예전에 우리 고구려 용사들이 누비고 다녔던 곳이라고 해서 그곳을 다시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간혹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며 우리도 돌려달라고 미친 척 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편을 드는 결정적인 이유는 강대국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운 유대인들의 능력은 높이 사고 싶지만 거기서 끝이다. 그 강대국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돕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박해를 받고 나치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기지 않는다.

 

『지하실의 검은 표범』은 1948년 유대인에 의한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1년 전인 1947년의 이스라엘 이야기이다.

'열 두살하고도 삼 개월'의 소년 프로피는 '영국군이 철수한 후 이스라엘이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태어나기 일 년 전',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여름 방학을 보내고 있다.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이른바 FOD(Freedom or Death)라는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한다. 그리고 지하조직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지하실의 검은 표범》의 제목을 따 자신의 별명으로 삼는다.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영국은 유대인에게 어떤 압제를 가했기에 어린 소년마저도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는 것일까. 사실 책에는 구체적인 압제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소년이기 때문이다. 비록 소년이 비밀지하조직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상상만 할 뿐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일은 없다. 게다가 소년의 부모가 소년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도록 단속하고 있기 때문에, 소년이 당한 제재라고는 통행금지 시간을 어겨 경감과 집에 함께 간 후 부모님께 외출 금지를 당한 정도라고나 할까.

소년은 경감과 사제지간이다. 경감이 소년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면 소년은 경감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쳐 준다. 경감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면 진정한 배신자가 될 것 같아 절대 그에게 이름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함께하는 FOD 조직원들은 그를 배신자로 단정하고 재판에 회부하기도 한다.

사실 어린 소년의 눈과 입을 통해 그려지는 이야기인지라 그리 잔혹하다거나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소년의 눈과 입을 빌려 그 분위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림자는 빼고요, 아빠. 조금 전에 세상의 모든 일은 적어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빠 말이 거의 옳아요. 하지만 예를 들어서 그림자는 한 면만 있다는 사실을 잊으셨어요. 못 믿으시겠거든 가서 확인해보세요. 실험도 한두 번 해볼 수 있겠죠. 법칙을 증명하는 것은 예외라고, 일반화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신 건 아빠 아니었어요? 직접 저한테 가르쳐 주시곤 아빠는 잊으셨군요." (P. 19)

 

실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당시 여덟 살이었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원래 이름은 아모스 클라우스너였다. 이야기 속 프로피처럼 과격함을 쫓던 오즈는 열네 살 때 '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오즈'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옮은 것과 옳은 것이 부딪칠 때는 그 '옮음'보다 더 높은 가치가 이겨야 한다. 그 가치는 바로 생명 그 자체다"라는 주제를 일관되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가장 높은 가치가 바로 생명이라면,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그들의 입장을 전해줄 수 있는 작가를 찾아볼 수 없다. 아모스 오즈 같은 작가가 필요하다.

 


정말로 일어난 일의 반대는 무엇일까?

"일어난 일의 반대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_ 어머니

"일어난 일의 반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_ 아버지

"일어난 일의 반대는 거짓말과 두려움이 아니었다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야."_ 야르데나

(P. 226)

 

2007/12/22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스무 살을 사랑하라 - 20대 여자들을 위한 자기격려서
김현진 지음 / 해냄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기계발서를 읽지 말라는 자기계발서? 아니죠~

자기계발서, 정말 싫어하는 분야다. 나도 한땐 이 분야의 책들을 탐독한 적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문학책만 읽고 있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책들을 읽는지 보았더니 온통 자기계발서였다. 주로 자기계발서는 행간까지 읽어내야 하는 문학책들보다 읽기가 쉬웠고, 빨리 읽혔다.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자기계발서들을 읽어 봤지만, 그 얘기가 그 얘기였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 단 두 글자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줄줄 늘어 쓴 이야기, 읽어도 읽어도 절대 내 생활에 적용이 되지 않는 것들, 그날 이후로 내 책장 가득 꽂혀있는 자기계발서는 완전 천덕꾸러기 신세다.

 

자기계발서를 읽지 말라는 자기계발서? 코웃음이 먼저 나왔다. 그러면서 작가도 자기계발서를 쓰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스무 살을 사랑하라'라는 제목과 '20대 여자들을 위한 자기격려서'라는 부제로부터 온 오해였다. 읽다보니 자기계발서라는 범주에 넣어서는 안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살을 거쳐온 한 여자가 살아온 이야기라고나 할까? 그럼 이 책은 '에세이'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자기계발서를 덮으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자기계발"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한다. 단지 계발서를 읽으면서 나도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할 뿐인데 말이다. 나중에 누군가 또 나에게 혀를 차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는 꼭 그녀의 말을 빌려 쏘아줄테다.

 

사실 나 이렇게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잘난 집에서 태어나 잘나게 살다가 밑으로 추락하여 지옥을 경험하고 다시 달콤한 인생을 맛보게 된 사람의 회고담이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낮이고 밤이고 자신의 몸을 굴려 꼭대기까지 오른 사람의 성공기는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그네들의 이야기는 보는 사람들의 눈물을 짜내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매체를 통해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감동보다는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다.

 

김현진, 사실 그녀도 그리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교를 자퇴하고 단편영화를 찍었고,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이 내뿜는 사람 냄새가 났다. 그렇게 발버둥치며 살아도 경제적으로는 나아지지 않는 일상, 수술비 300만원을 구할 길이 없어 고민하는 그녀, 그나마 실업급여라도 받고 있어서 다행인 그녀. 그런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라서 거부감보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래 나도 저랬어, 남들은 그깟 실업급여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상당한 목돈이었고 낮밤도 휴일도 없이 일을 해도 겨우 88만원 세대일 뿐인.

힘들어도 웃어야 하고, 언젠가는 나아질거라며 긍정적인 사고로 '화이팅'해야 한다고 말하는 여느 사람들과도 다르다. 그녀는 힘들면 울어도 되고, '화이팅'하지 않아도 된다고 토닥여 준다.

 

내가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슬퍼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 슬퍼할 권리는 내가 유일하게 행사 할 수 있는 권리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온전한 권리입니다. (p. 41)

 

세상에는 잘난 사람이 많고 많은데 특별한 재능도 재주도 없이, 나 아니고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자리에 꽂혀 있는 똑같이 생긴 달걀판 속의 달걀이 된 기분은 누구라도 달갑지 않은 노릇입니다. (p. 261)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전에 읽었던 이청준님의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지인 중의 한분이 이청준님께 해주신 말이라고 한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귀항지없는 항로」, p280)

 

그랬다. 그녀의 이야기도 나같은 독행자들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었다. 혹시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사라졌다. 그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녀를 토닥여 주고 싶다.

 

책 보면서 버티면 훨씬 나아요. 자기계발서나 성공을 위한 처세학, 연애 비결이나 돈 모으는 비결 같은 실질적인 거 말고 뜬끔없는 책을 읽어보는 거예요. (...)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단 하나 있으니 그게 품위입니다. 품위를 살 수 있는 것은 단지 노력입니다. 인생에 대해 더 알려고 하는 의지, 세상이 원래 슬프고 불공평하다는 것을 아는 사색, 그 슬픔에 공명하는 연민과 사려, 돈 주고도 못 사는 것, 그런 게 있고 그게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내 팔자에 대한 한탄은 대폭 감소했어요. 그리고 관용과 사색은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p. 271)

 

2007/12/22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현재 우리 집은 달랑 세 식구가 거주하고 있다. 게다가 한꺼번에 무언가를 많이 먹는 사람들도 아니다. 덕분에 냉장고 가득 들어있는 음식물 중에 1/3 이상은 음식물 수거함으로 직행하게 된다. 그나마도 올 봄에 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살게 되었으니 이 정도지, 이전에는 정말 심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싸게 많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물 쓰레기만 많이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냥 버려지는 음식물을 볼 때마다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아까운 줄은 알았다. 그러나 이 음식마저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떠올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 버려지는 음식이라도 먹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당신은 알고 있었는가?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아가 심한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늘날 세계 인구는 2006년 기준으로 65억 정도, 1984년 기준으로 농업생산력은 12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굶주리는가? 당연히 분배의 문제에 있다. 굶주리고 있는 나라의 대부분은 사막화로 인해 경작지가 부족하거나 그곳을 경작할 농업 기술이 부족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식량자급을 할 수 없는 나라에 당연히 식량이 넘쳐나다 못해 썩고 있는 강대국에서 원조를 해줘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강대국은 이권이 없는 곳은 애써 나서서 도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엔 등의 기구에서 나서지만 자금이 문제다. 창고 안에서 그냥 썩고 있는 식량도 넘쳐나는데 자금이 문제라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지금의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시장 원리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시장가가 결정되는 곳에서, 엄청난 식량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부러 생산량을 줄이거나 버리면서 가격을 상승시킨다. 또 자국의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에서 앞장서서 그런 행위를 하기도 한다. 가격은 상승하고 구호 자금은 얼마되지 않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식량 기구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식량 기구라는 것도 어차피 시장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니.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기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조금만 노력해도 충분히 자급자족할 수 있지만, 그 나라가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더이상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배고픔이 해결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 자기네들을 그렇게 만들었던 강대국들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나설 것이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굶주리고 있는 나라가 내부 개혁을 통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면 발벗고 나서서 막는 것이다.

물론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은 외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부에서도 군사적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먹는 것을 가지고 국민들과 협상 혹은 협박을 하기도 한다.

굶주림으로 인해 생기는 병은 기아 뿐만이 아니다. 각종 비타민이 결핍되어 제대로 세상을 보기도 전에 실명을 하기도 하고, 세상을 밟아보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하루 혹은 일주일 정도 끼니를 거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연도태설'이라는 것이 있다. 한마디로 적자생존을 강조한 것인데, 이 이론을 기근에 적용한 '토머스 맬서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렇게 인구 증가로 지구가 곤란을 겪을 때 기근이 적당히 인구밀도를 조절해 주니 고마운 일이 아니냐며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연이 고안해낸 지혜'라니, 정말 자신이 그들의 처지에 놓였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강대국의 소들은 배불리 먹고 살지만 제3세계의 어린이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세계, 자신들이 행한 식민지 정책의 결과로 생긴 현상을 불편해 하며 보지 않으려는 강대국들, 정말 참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다.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사진 한장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너무 굶주려서 피골이 상접한 아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 나의 모습 또한 이 사진 작가와 별반 다른게 없지 않나,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007/12/22 by 뒷북소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