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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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소세키의 미학론 내지는 예술관을 엿볼 수 있었다. 소설의 모티브는 “화구 상자와 접이식 삼각의자를 메고 봄의 산길을 어슬렁어슬렁 걷는”, “비인정(非人情, 의리나 인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일)의 천지를 소요”하면서 작가 내면에 이는 상념을 따라 간 것. 소설 보다는 호흡이 긴 에세이 형식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쪽수는 185쪽으로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읽어내기에는 제법 벅찼다. 당시 유행했던 서양과 일본의 문학과 미술에 대한 인용이 많아 일천한 내 지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설을 일백 여 년 전에 앞서 썼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만큼 소세키의 사고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는《풀베개》를 1906년 9월 문예잡지《신쇼세쓰(新小說)》에 발표했다. 이 때 그의 나이 불혹 마흔이었다. 책 말미에 덧붙여진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의 해설에 의하면, 《풀베개》는 “평생 소세키가 문제로 삼았던 동서 비교문명론 및 근대적 삶과 예술의 문제에 대한 사고가 집약된 일종의 예술가 소설”이다.

소설 이름이 ‘풀베개’이다. 왜 풀베개일까? 소설에서 그 힌트를 찾아 보자면, 풀을 베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유유자적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세키가 꿈꾸는 비인정의 본류(本流)가 아닐까.

“나는 풀을 요 삼아 태평한 엉덩이를 살짝 내려놓았다. 이런 곳이라면 대엿새 움직이지 않고 이대로 있어도 아무도 불평할 것 같지 않다. 자연의 고마움은 여기에 있다. 정작 때가 오면 사정도 미련도 두지 않지만, 그 대신 사람에 따라 달리 취급하는 경박한 태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134쪽)

그렇다면 소세키가 바라는 '비인정'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소설 속 화자가 간카이지 스님과 나누는 대화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저 소나무 그림자를 보시오.”
“아름답네요.”
“그냥 아름다운 거요?”
“예.”
“아름다운 데다 바람이 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오.”(156~157쪽)

소세키에게 있어 ‘비인정’은 자연미와 초연함이 공존하는 세상이이다.
그는《도련님》에서 “세상은 온통 사기꾼들뿐”이라고 일갈하고 있는데,《풀베개》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요하고 독살스럽고 좀스럽고 게다가 뻔뻔하고 지겨운 놈들로 가득 차 있”(147쪽)는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세키는 “이름 모를 산골마을로 찾아와 저물어가는 봄 경치 속에 야윈 몸을 묻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내 몸에 지”(159쪽)니고 싶어 했다.

사실 이는 어떻게 보면 평생 신경쇠약과 이로 인한 위궤양으로 고생한 그가 안식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즐거움이 문학과 그림에 대한 매진이 아닐까. 그의 유별난(?) 자존심이 이런 작품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는 인간 세상과 예술에 대한 소세키 식의 깐깐하고 섬세한 묘사가 주류를 이룬다. 옮긴이 송태욱 선생도 언급했듯이 욕탕에 나체로 들어오는 나미에 대한 묘사는 마치 붓으로 그린 듯 생생한 한 폭의 미인도를 앞둔 듯하다.

이 작품을 쓸 당시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막 승리를 거둔 시점이었다. 당시 서양 문물에 압도되었던 일본-소세키도 영국 유학을 통해서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은, 러시아를 격파함으로써 서양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소세키 역시 이런 일본의 거국적 자신감에 대해 은연 중 과시한다.

가령 다이테쓰 스님 방에 깔린 중국제 융단을 보면서 “중국의 기구는 다 어설프다. 아무래도 바보 같고 굼뜬 인종이 발명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109쪽)고 서술하고 있는 대목을 보면, 당시 일본은 이미 동양의 제일인자로 자부해서 동양 제국-중국 조차-은 그 상대가 아니라는 자만심이 드러난다.
오늘날 소세키가 무덤에서 일어나 G2로 부상한 중국을 보게 된다면 무어라고 할지 자못 궁금하다. ^^


▲현재 구마모토 자택에 걸려 있는 나쓰메 소세키 사진


▲구마모토에 있는 소세키가 살던 집. 구마모토에서의 생활은 《풀베개》를 낳았다.


▲《풀베개》에 등장하는 산마루에 있는 찻집


▲현재 구마모토에 있는 《풀베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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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에서 올해 펴낸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4권. 그간〈소세키의 고양이〉서평단으로 활동하면서 4권을 모두 받았다. 비록 100여년 전 펴낸 소설이지만, 오늘날 우리 상황에 맞는 일침(一針)도 많아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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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함께 가라 - 정체된 삶에 문을 열어줄 최초의 희망심리보고서
셰인 J. 로페즈 지음, 고상숙 옮김 / 알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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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셰인 J. 로페즈의 직함을 보면 뜻밖에도 캔자스 대학교 경영학 교수이다. 이외에도 갤럽 상임연구위원, 클리프턴 강점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나는 언뜻 책 제목만 보고 저자가 심리학 전문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로페즈는 미국 심리학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원래 저자의 주요 연구 주제는 '지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권총자살을 앞둔 한 농부를 만난 이후 그는 자신의 연구 인생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게 된다. 책은 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 로페즈는 어느 날 퇴역군인 출신의 64세 뚱뚱한 남자 존을 의뢰받는다. 존은 고혈압 증상과 피로감을 호소하며 내원했었는데 검사 결과 신장이 안 좋아 투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상당량의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었기에 일주일에 세 번 신장 투석을 받게 되면 농장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존은 이를 알고 자신에게 미래가 없다고 낙담한다.

 

저자는 상의 끝에 존이 옥수수 수확을 끝내고 나서 투석을 받을 수 있도록 치료 일정을 연기했다. 옥수수 수확이 마무리되자 존은 약속한 대로 주치의와 날을 잡고 투석 받을 준비를 했다. 존의 검사 결과를 보고 나서 로페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신장 사구체 여과율이 조금이지만 개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신장 기능이 1개월 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마침내 존은 점점 나아져 '간 기능 개선으로 투석 연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저자는 존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람이 미래를 생각하는 방식, 즉 어떤 희망을 갖느냐에 따라 오늘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몸담고 있던 주제 '지능'에 대한 연구가 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알고, ‘희망’에 대한 연구로 방향을 전환한다.

로페즈는 전 세계에서 희망에 가득 찬 사람을 수천 명 만나보고, 이 중 일부를 몇 년간 계속 추적 관찰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연구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그는 희망이 전염병처럼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만들기 위해 이 책을 완성했다고 토로한다. 그는 우리의 차동엽 신부처럼 미국판 희망전도사가 아닐까 싶다!

즉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안주하기 보다 스스로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자기의 재능과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어려운 일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때마다 어려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거야."

 

 


이 책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희망이라고 하는 독특한 에너지를 창출해내는 생각과 느낌을 탐구해 본다. 2장에서는 험난한 실제 상황에서 희망을 시험해보고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희망의 사례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 희망을 구축하는 데 쓸 수 있는 유용한 도구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굵직한 문제들을 다룬다.

결론적으로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는 아래 네 가지를 깨닫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아, 과연 나는 얼마나 걸릴 것인가!

희망은 소중하다.

희망은 선택이다.
희망은 학습될 수 있다.
희망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

저자가 밝혀낸 사실 중에 재미로운 것은 희망이 건강한 행동 방식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 대한 희망이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생활 습관과 분명한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앞서 언급한 존의 경우 희망을 회복하고 도전적인 목표(옥수수 수확과 건초 거두기)를 설정해 자신의 건강 뿐 아니라 농장까지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 마음속 스위트 스폿(테니스 라켓 등에서 공이 가장 잘 맞는 부분)에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우리는 미래를 현재보다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힘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나의 생각 과정에 모두 다 접근할 수 없고, 나의 느낌을 항상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안에 감지되는 신호나 습관 및 사고 과정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살아갈 에너지가 더욱더 충만해진다. 쉽게 말해서 로페즈는 이것저것 재느라 머뭇거리지 말고 일단 도전해 보라고 조언한다. 단, 마치 자신이 세상을 다 알 수 있는 것처럼 과대평가하거나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5년 후 당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저자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5년 후 나의 모습을 머릿속에 상상해 보라고 권한다.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장애물 걱정하지 말고 그때그때 극복해 나가면 된다. 먼저 미래에 대한 비전을 명확하게 설정하면 그 미래를 향해 강력하게 밀고 나갈 추진력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심리학 교수 바버라 프레드릭슨이 명명한 '긍정적 감정의 상향적 소용돌이' 개념에서도 많은 팁을 얻을 수 있었다. 프레드릭슨 교수에 의하면 긍정적 감정으로 마음이 열리면 새로운 인간관계를 포함해 어떤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수단과 자산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우울한 표정을 짓는 사람보다 활력 넘치는 미소를 짓는 사람에게 정감이 가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희망은 마음을 열린 상태로 유지하게 해 주고, 생명력 넘치는 에너지로 충만하게 해 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창의력이 나올 수 없다. 두려움에 떠는 동안은 가능성을 볼 수 없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작은 원 안을 끊임없이 달린다. 희망이 두려움을 몰아낼 때 미래로 가는 여러 가지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희망이 혁신을 낳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고, 이렇게 창조된 것을 깎고, 다듬고, 손질해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든다. 희망은 우리의 사고 범위를 넓혀주고 인내력에 불씨를 붙여준다.(175쪽)

Making Hope Happen 홈페이지 메인


"렌터카를 세차해 본 적 있습니까?"
저자는 아무도 렌터카를 세차하지 않듯이(저자에 의하면 그 이유는 자기 차가 아니라는 것과 더 중요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심을 끄는 매력적인 목표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저자가 미래에 대한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개설한 홈페이지(www.makinghopehappennow.com)를 찾으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오디세우스 계약'(세이렌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을 묶은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략)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예일대 경제학자들이 개발한 'StickK.com'도 유용하니 잘 활용해 보자.

저자는 희망을 전염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부하에게 미래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는 리더의 희망은 공공재라고 강조하고,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가르치라고 조언한다.


아울러 친구, 직장 동료, 학교, 지역사회 사람들을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전술을 활용하여 희망을 전염시키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라고 권한다.

1. 말과 행동으로 희망의 모범이 된다.

2. 유익한 자원, 적극적 지원으로 희망을 제공한다.
3. 엄청난 능력을 가진 희망 찬 사람이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희망'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미래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수립하여 열정과 도전적 자세로 실행해 나가보련다. 그리하면 5년 후 내가 바라는 희망에 성큼 다가서게 될 것으로 믿는다. 또한 우리 집, 우리 학교, 내 직장 또는 내가 사는 마을에 작은 희망이나마 서로 나누고 함께 하는 큰 물결을 만들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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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자기계발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미국 금융의 탄생》 | 토머스 K. 맥크로 저 | 휴먼앤북스

2012년 11월 타계한 퓰리처상 수상작가 토머스 K. 맥크로의 최후의 역작이 국내 출간되었다. 건국 초기의 미국, 두 이민자 출신 재정부장관이 어떻게 국가를 통합하고 재정 및 금융 정책을 수립하여 오늘날 최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잡았는지를 보여주는 방대한 역작이다.

 

 

 

2. 《심플러 Simpler》 | 카스 R. 선스타인 저 | 갈21세기북스

옆구리를 슬쩍 찔러주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넛지’의 효과는 어느덧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에서는 ‘넛지’를 적절하게 설계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3. 《당신의 전략을 파괴하라》 | 신시아 A. 몽고메리 등 저 | 레인메이커

현실은 극변한다. 모든 경쟁우위와 조건이 궁극적으로는 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기업으로 남아 있으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이 책은 세계적 석학들의 전략에 대한 다양한 관점, 다양한 솔루션을 제공한다.

 

 

 

4. 《원 퀘스천 One Question》 | 켄 콜먼 저 | 홍익출판사

무능하다는 이유로 방송국에서 잘린 한 진행자가 현대인이 안고 있는 고민들에 대해, 각 아이템마다 가장 잘 답변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가 '단 하나의 질문(One Question)'을 던져 간단하고 명쾌한 지름길을 안내받는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5. 《머리는 손자처럼 가슴은 공자처럼》 | 신동준 저 | 하늘정원

저자는 오늘을 제자백가 사상이 완성됐던 춘추전국시대에 버금가는 난세라고 말한다. 이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지혜뿐 아니라 지략까지 함께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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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머핀 2014-01-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인하였습니다. ^^
 
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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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리뷰에 앞서 우선 내가 의문을 가졌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는 다른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려니 싶어서다.

첫째,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중나선 형태의 DNA는 우리 세포 속에서 벌거벗은 상태로 있지 않다. 다양한 유기 분자들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분자들은 유전자와 화학결합을 하고 있다. 이런 화학적 부착물은 유전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럴까? 그것들은 자신이 결합한 유전자의 행동을 바꾸어, 유전자의 활성을 더 높이거나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부착물은 오랫동안 붙어 있을 수 있고, 심지어 평생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후성유전학은 이렇게 장기적으로 유전자를 조절하는 부착물들이 어떻게 붙고 떨어지는지를 연구한다. 후성유전적 변화는 우리의 환경,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노출된 오염물질, 심지어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반응으로서 벌어질 때가 많다. 후성유전적 과정은 환경과 유전자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돌연변이는 되돌릴 수 없지만, 후성유전적 변화는 희망적이게도 되돌릴 수 가능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다.

 


둘째 '후성유전학'에서 '후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후성유전적(epigenetic)'이라는 신조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40년대 콘래드 워딩턴에 의해서였다. 당시 그는 세포 환경이 유전자에게 반응하는 만큼 유전자도 세포 환경에 반응한다고 생각했었다.

'후성(後成)'과 대립되는 개념이 '전성(前成)'이다. '전성'이 '나'라는 독특한 형상은 이미 난자나 접합체에 온전히 들어 있다는 것이라면, '후성'은 '나'는 발생의 결과로 생겨나는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성유전학은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우선, 각종 질병의 발병 원인을 규명하는데 중요하다. 가령 암세포의 경우 많은 유전자가 정상적인 부착물(특히 메틸)을 잃어버린다(탈메틸화). 탈메틸화는 각가지 비정상적인 유전자 활동을 일으키는데, 그중 하나가 세포의 마구잡이 증식이다. 그렇다면 그 변화(탈메틸화)를 되돌릴 방안을 찾는다면 암 퇴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후성유전학의 의학적 목표는 주로 병리적인 후성유전적 사건들을 되돌릴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기법은 유전적으로 이상을 일으킨 여러 대사 질환과 선천성인 유전 질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태내 환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가령 쌍둥이는 자궁에서 거의 같은 환경을 공유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형제는 산모가 먹었던 음식과 임신 중에 겪었던 스트레스에 의해 다른 태내 환경을 경험했을 것이다. 따라서 형제간에 비만, 당뇨, 심장질환, 동맥경화증, 우울증, 불안증, 정신분열증에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 후성 유전적 변화를 잘 연구하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끝으로 세포발생학적으로 수정란이 어떻게 분화해서 각기 다른 성체로 성장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가령 모든 인간은 줄기세포에서 분화되었다. 이 세포는 유전적으로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구별이 불가능할 만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부세포, 혈액세포, 뉴런, 근육세포, 뼈세포 등 다양한 세포들로 분화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세포들은 한 성인에게 나온 것일 경우 유전적으로 DNA 구조가 모두 똑같다. 후성유전학은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쥐고 있다.
이상으로 간략히 몇 개 질문에 대한 답을 마쳤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후성유전학'은 아직 낯선 개념이다. 저자 리처드 프랜시스는 재미로운 연구 사례를 예로 들면서 후성유전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질병퇴치와 건강수명 연장에 응용할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풀어간다.

이 책은 내게 '과학적 글쓰기'란 이런 것이고, '과학적 글읽기'란 이런 맛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간 후성유전학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어려운 내용 쯤으로 어림짐작했었는데, 읽어 보니 참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오로지 저자의 역량 탓일게다.

저자는 1장에서 환경이 유전자를 바꾸는 사례를 제2차 세계대전의 잔학 행위에서 들고 있다. 당시 1944년 9월 독일군은 점령지 네덜란드에서 철도 파업과 빨치산 활동을 보복하는 의미에서 식량 봉쇄 조치를 내렸다. 이는 1945년 5월에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해방시키기까지 약 9개월 남짓 지속되었다. 이 때 산모 자궁 속에서 기근을 겪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네덜란드 기근 출생 코호트'가 연구되었다고 한다. 이는 네덜란드 기근이 시작된 날짜와 끝난 날짜 그리고 건강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결과 기근에 노출된 태아가 겪은 악영향의 성격은 노출 시기에 크게 좌우되었다. 예를 들어, 임신 초기에 일찌감치 노출된 사람들은 심장동맥질환 및 비만과 관련이 있었다. 초기에 노출된 여자들은 유방암 발병률도 높았다. 한편 중기에 노출된 사람들은 페질환과 신장질환이 더 문제였다.
 
그리고 후기에 노출된 사람들은 포도당못견딤증(불내성)이 가장 뚜렷한 증상이었다. 현재 태내 환경이 태아와 아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지식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코호트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그런 차이가 초래되었을까? 기근에 노출된 사람들과 노출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유전자들의 메틸화 정도가 서로 달랐다. 특히 인슐린 유사 성장인자2 (IGF2) 라는 호르몬을 암호화한 유전자가 후성유전적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발견을 학계에 꽤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비유전자적 유전 방식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기근을 겪은 산모의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건강 문제를 더 야기했다는 사실은 DNA를 통해서가 아닌 태내 환경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고, 이는 후성유전적 변화가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이가 자랄 때 받은 모성적 보살핌의 차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령 부실한 모성적 보살핌은 악순환을 구축함으로써 오래 지속되고, 훌륭한 보살핌은 거꾸로 여러 세대에 걸쳐 선순환을 구축한다. 저자는 이를 '사회적 유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후성유전적 변화는 태내 환경 뿐만 사회 환경에 의해서도 생겨날 수 있다.

 


한편 저자는 월리엄 캐슬·슈얼 라이트와 토머스 모건의 유전학 연구에 대한 비교도 상세히 다룬다(7장). 모건이 기존 유전학의 전통적인 연구 방식을 취했던데 반해, 캐슬과 라이트(캐슬의 수제자)는 생물학적 과정의 다양한 변이 등 무작위성을 목격하면서 이를 토대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여 오늘날 후성유전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주류와 비주류의 경쟁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학설이 살아남고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끈기와 열정을 가지고 탐색하는 과학자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싶다.

나는 특히 X염색체의 비활성화를 둘러싼 다양한 이상, 가령 적녹(赤綠) 색맹, 터너 증후군등의 발생 기전에 대해 재미있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후성유전학은 두 개의 얼굴, 즉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밖을 향한 얼굴, 원인이 되는 측면도 있지만, 안으로 향한 얼굴, 반응하는 측면도 있다. 저자에 의하면 지금까지 환경 등에 의해 생겨난 후성유전적 변화로 인한 변이에 대해 주로 탐색했다면 앞으로 후성유전적 변화로 인한 기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암과 난치병 등의 발생 기전을 규명해서 완치의 길을 더욱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총론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유전학에 대해서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쓸 수 있구나하고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케빈 데이비스가 쓴 《천 달러 게놈》를 읽은 이래 제대로 된 유전학에 관한 책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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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2-2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전이 모든 걸 결정한다고 믿던 시대에서 점점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들이 나오는 시대로 가고고 있군요. 잘 정리된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