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양장본)
데이비드 덴비 지음, 김번.문병훈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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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의 독서모임을 7년째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한가지 계획을 세웠다.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권이라도 좋으니 고전을 읽고 함께 얘기해보자는 것. 그런데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멤버 전원이 모이기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책을 읽은 사람이 없어서다. 왜냐고? 어려우니까. 고전 한 권 읽으려고 한 달을 고전하다가 결국 포기해버리는 거였다. 이러길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의문이 생긴다. 이 어려운 고전을 왜 다들 읽어야 한다고 하는 거지? 대체 이유가 뭐야?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서점에서 이 책을 볼 때마다 얼마나 눈독을 들였는지 모른다. 세상 모든 고전의 원조. 불멸의 고전. 위대한 책들을 단순히 소개하는 게 아니라 ‘만남’을 갖게 해준다니! 솔깃했다. 이 책만 있으면 지금까지 고전으로 고전해왔던 나의 고생이 끝이 날 것 같았다.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덴비는 영화평론가이자 저술가로서 오랫동안 활동해왔다. 그런 그가 어느날 청강생이 되어 자신이 30년 전에 졸업했던 대학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것도 마흔여덟의 나이에. 대체 이유가 뭘까. ‘이 사람, 제정신이야?’란 생각이 들 정도의 결단을 내린 이유는 바로 정보의 범람에 있었다. 인터넷과 텔레비전 같은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정보들. 그걸 채 소화시키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새로운 정보에 갈증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이 애써 쌓아올린 건물의 기초가 흔들리고 정체성마저 모호해지고 있다는 위기감. 고민 끝에 저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진지한 읽기’라 느끼고 모교를 찾는다. 컬럼비아 대학 학부생들의 교양필수 과목인 [현대문명]과 [인문학과 문학] 강좌를 1년 동안 청강하기로 한 것이다.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은 바로 저자가 두 번째로 맞은 대학생활 1년 동안을 기록한 책이다.




긴 머리말을 읽고 본문에 들어갈 때 가슴이 두근댔다. 어떤 책을 읽게 될까. 머릿속에선 유명한 고전의 제목들이 마구 떠올랐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당연히 책의 제목이 있을거라 예상했던 곳엔 저자들의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머, 사포, 소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로 위대한 책을 쓴 위대한 인물들 아닌가. 이거 왠지 엄청 고전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토론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 인물이 쓴 대표작을 정해두고 그걸 읽으면서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작품의 구조를 비롯해서 형태, 상황, 등장인물의 말과 행위에 숨은 의미, 작품의 배경이 미치는 영향, 저자가 숨겨둔 의미...이런 것들을 학생들이 찾아낼 수 있도록 교수는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어떤 내용이었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교수의 질문에 처음엔 당황하고 대답을 회피하던 학생들이  조금씩 자신의 의견을 내놓으면서 활발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단순히 한 권의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사고하여 자신의 본질은 무엇인지 돌아보고 재정립해나가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교육환경이 부러웠다. 결코 쉽지 않은 강좌를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는 그들의 의지가 존경스러웠다.




천 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을 저자처럼 청강생이 된 기분으로 읽어나갔다. 신이 난다고 할 정도로 책이 잘 읽혀질 때가 있는가하면 겨우 십여 페이지를 가지고 며칠에 걸쳐서 골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거의 모든 책들이 내가 읽지 않은 거여서 교수와 학생들의 토론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실제 수업에 참가하기라도 한 것처럼 교수의 질문 하나하나에 가슴이 뜨끔했다.




내게서 고전은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저 멀리 있는 게 무언지 궁금했지만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굳이 고전을 읽지 않아도 삶을 잘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만에 빠져있었다. 저자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저자 덕분에 줄곧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책을 읽어야겠다. 좀 더 많이, 깊이 고민해봐야겠다. 그런 다음 내 삶의 방향을 점검해보자. 이런 내게 누군가 조언을 한다. 절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위대한 문학 작품 속의 모든 것들은 때로 정반대를 뜻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라며 힘주어 말한다.




여러분은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자아를 물려받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겁니다. 자아를 창조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과거로부터 창조하는 겁니다. -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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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토정비결 1
이재운 지음 / 해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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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연말연초가 되면 떠오르는 추억 하나. 평소 책을 좋아하지 않는 언니가 12월이나 1월이면 빼놓지 않고 꼭 잡지를 구입했다. 이유는 별책부록 때문이었다. 12월엔 가계부, 1월엔 토정비결 책자를 주곤 했는데 해마다 온가족이 자신의 한 해 운이 어떤지 재미삼아 꼽아보곤 했다. 좋은 풀이가 나올 땐 기분이 좋지만 썩 좋지 않은 풀이가 나오면 가족들은 ‘이건 그냥 미신이야’ ‘조심하라는 의미지 뭐’하며 위로하곤 했다.




그후 토정비결이 뭔지, 어떤 과정으로 나온 책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3권으로 된 소설 <토정비결>이 있어서 얼른 구입했다. 직장 다니는 틈틈이 1권을 읽고 다음권을 읽으려고 하는데 책장에 꽂아둔 책이 없었다. 온 집안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집에 놀러온 이웃집 아주머니가 빌려갔는데(이문열<변경>1,2권도 같이) 돌려주지 않은채 이사를 갔다는 거였다. 연락도 안되는 상황에서 시간만 보내다 포기해버렸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으면 되겠지..하고.




그러다 십년이 훨씬 지나서 다시 만났다. 처음 봤을 땐 3권이었던 책이 4권이길래 개정하면서 내용이 보완수정됐나...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래 3권이었던 책을 2권으로 하면서 <토정비결>의 2부에 해당하는 저자의 <당취>란 소설을 함께 묶어 4권으로 출간한 거였다. 예전보다 내용이 확대된 <토정비결> 왠지 의미있는 두 번째 만남이 될듯한 예감이 들었다.




토정의 죽음을 예감한 정휴가 토정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고자 길을 떠난 것에서 시작한 책은 정휴가 토정과의 인연을 맺는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이지함은 어릴때부터 명석하고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어머니의 묘소를 바다에서 이십 리도 더 떨어진 곳에 모셨는데도 방죽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해일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일화를 들은 정휴는 이지함을 찾아가보기로 마음먹고 이지함과 안명세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과거와 현재, 미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란 걸 지함은 일찍이 깨달았다. 또 논밭 관리나 농사를 짓는 법을 알려주는 등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도 지극했다. 그런 지함이 친구 안명세가 역모사건에 연루되면서 친구와 사랑하는 정혼자를 잃으면서 방황하게 된다.




그러다가 스승인 서경덕과의 만남이 전환점이 되어 오로지 공부에 몰두한 지함은 삶이란 무엇이며 우주와 자연의 흐름과 이치는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토정비결>을 쓰기에 이른다. 앞날을 읽는 이였던 지함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이 고통을 받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왕에게 알리고 미래가 어떠할지 알려지만 왕은 지함을 믿지 않았다. 조선을 환난으로부터 막기는 역부족이었던걸까.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불교는 기반과 전통을 상실하고 탄압받았고 승려는 멸시 받았음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들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지함이 생전에 남긴 비기가 당취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우유부단한 임금이나 당파 싸움으로 논쟁을 벌이기에 급급한 조정관료들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역사속의 인물들이 곳곳에 등장해선지 소설은 비교적 쉽게 읽혀진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그렇듯 이것 역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 작가의 상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20대 날렵한 아가씨에서 시작해 불혹의 아줌마가 되어 다시 <토정비결>을 만나니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답답하다. 생전에 지함이 말했듯 엉키고 맺힌 것은 풀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를 복잡하고 어지럽게 하는 이 현실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어디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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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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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조용히 풀어내는 저자의 문장이 매력적이었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얘기가 완전히 전해지진 않았지만 가슴에 아련하게 남는 뭔가가 있었다. 이어서 봤던 영화 <더 리더>도 정말 좋았다. 원작보다 좀 더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과의 첫만남 이후 바로 두 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더 리더>의 분위기와 색채가 느껴지는 책, <다른 남자>를 만났다. 그것도 단편집.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세계를 더 많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커다란 사탕을 입안에 넣고 조금씩 녹여먹듯 이야기 하나 하나에 집중했다. 이건 무슨 맛일까? 속 알맹이엔 뭐가 들었을래나?




책에는 표제작인 <다른 남자>를 포함해 모두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서재에 걸려있던 그림 속의 소녀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키워가던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녀와 도마뱀>, 아내를 지키기 위해 비밀경찰에게 친구와 아내의 비밀을 넘기는 <외도>, 어느날 날아든 편지를 통해 죽은 아내에게 숨겨진 남자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다른 남자>, 아내 외에 두 명의 여인과 사랑을 하다가 결국 자기 덫에 빠지고 마는 <청완두>, 일을 중요하게 여기던 남자가 이혼 후 아들과의 만남을 소홀히 했던 것을 최후의 순간 후회하게 되는 <아들>, 아내와의 식어버린 열정, 저물어가는 인생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것을 갈망하던 주인공이 등장하는 <주유소의 여인>. 저자는 우리에게 사랑을 여섯 가지의 감정과 색채,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건 <소녀와 도마뱀> <다른 남자>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되는 숨겨진 비밀, 2차대전 중 아버지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죄를 범했는지 주인공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림이 어떤 경위로 아버지의 서재에 걸리게 됐는지 알게 되는 <소녀와 도마뱀>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에서 그 아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말한다. <다른 남자>에서 남편은 질투심에 아내의 숨겨진 남자를 찾아가 복수하려 했지만 오히려 아내의 다른 남자에게서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된다. <주유소의 여인>은 정말 너무나 안타까웠다. 젊은 날의 열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게된 남자가 낯선 곳에 머무는 걸 택하는 대목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래야하지? 얼마남지 않은 생을 아내와 함께 하면 왜 안되는데? 꼭 또다른 열정을 찾아나서야 하나? 꼭 그래야해? 하는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당신이 정의하는 사랑엔 정녕 해피엔딩은 없는 거야? 묻고 싶었다.




‘사랑의 여섯가지 빛과 그림자’ 띠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은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때론 시일을 두고 두 세번을 읽어야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던 단편도 있었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한가지로 정의할 수 없어서일까. 저자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 그 속에 잠재해있는 자신만의 사랑을 들여다보라고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의문을 남기는 독서였지만 어쩌면 그 속에 해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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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밝혀졌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엮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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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깊숙하게 울림이 남거나 깔깔 배꼽 잡도록 웃기거나 오싹오싹 소름이 돋을만큼 스릴 있거나 혹은 무딘 머리에서 오호라~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큼 지적수준을 높여주는 책. 이것이 내가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을 갖춘 작품이라면 일단 도전한다. 읽어봐야 뭐가 독특한지 알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바로 ‘독특함’이란 요소에 끌린 책이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전작인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란 소설이 전개방식이나 내용 모두 정말 독.특.하.다.는 평을 듣고 구입했지만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저자의 데뷔작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구나 소설에 저자와 같은 이름의 사람이 등장하다니. 그가 바로 저자 자신인걸까...그렇담 실제 경험담, 논픽션이란 얘기??




7월의 어느날 저자와 같은 이름의 조너선 샤프란 포어란 미국인 청년이 우크라이나에 도착한다. 2차 대전 중 자신의 할아버지를 나치에게서 구해준 여인을 찾기 위해서. 그는 통역겸 가이드 알렉산더 페르초프(알렉스)와 운전을 맡은 알렉스의 할아버지, 지독한 방귀를 뀌어대는 암캐와 함께 길을 떠난다. 트라킴 브로드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조너선은 누렇게 바랜 사진을 한 장을 꺼내보인다. 사진 속의 소녀를 가리키며 그녀가 바로 자신이 찾는 여인, 오거스틴인데 유일한 생존자라고.




그런데 그들의 목적지인 트라킴 브로드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오래전에  잊혀진 마을이라 새 지도엔 나타나 있지도 않을뿐더러 길가다 간혹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개운치 않은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트라킴 브로드.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기억은 물론 지도에서조차 지워졌을까. 어느 누구도 입 밖에 낼 수 없도록 깊숙한 곳에 숨겨둔 비밀은 대체 무엇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만 커져가던 어느날 그들은 드디어 트라킴 브로드를 기억하는 이를 만나게 되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는데 2차 대전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 못지않게 유태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배반하는가하면 가장 친한 친구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유태인 학살에 앞장섰다. 그리고나서 자신들이 저지른 추악한 죄를 아예 기억 속에서 몰아낸 것이었다.




역시 독특했다. 책을 손에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꿰뚫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트라킴 브로드를 향해가는 것처럼 여러 가지 것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도 아리송해서 다시 뒷걸음쳐 되짚어 나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제서야 조금씩 소설의 구성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부분적으로 다른 글자체와 형식을 달리한 글들, 줄줄이 이어진 대화, 편집과정에서 잘못된 것처럼 아래로 축 처진 소제목 등 모두 저자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얼마전에 봤던 <더 리더>란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한나를 이해하기 위해 아우슈비츠를 찾아간 미하엘의 눈앞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주인 잃은 신발들. 그 느낌을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없지만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흘렀다.




이 책도 그랬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 그가 말하고자 한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짙은 안개 속을 헤매다 간신히 뭔가를 잡았다. 그것이 나를 목적지로 이끌어줄지 더 깊은 안개 속으로 몰아넣을지 모르겠다.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다시 되짚어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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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장으로 - 제139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시공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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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나이, 결혼 10년차. 천사 같은 두 아이를 얻었지만 잃어버린 게 있다. 아니 잊고 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듯싶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아릿한 가슴 저림을.




2008년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채굴장으로>를 선택하게 된 건 띠지의 문구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그 가슴 저림을 잊지 못하는 당신의 이야기’. 거기에 옅은 색으로 적힌 표지의 문장. ‘그에게 끌린다. 남편을 사랑하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의 사랑이라...왠지 막장드라마에서 자주 써먹는 불륜의 냄새가 나는 듯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절하면서도 간절한 사랑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남쪽의 작은 외딴 섬. 그곳에 한 여인 세이가 있다. 초등학교 양호교사인 그녀는 화가인 남편 요스케과 함께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거센 파도가 잠든 바다처럼 조용하고 잔잔한 일상 속에 조금씩 침잠해가던 세이. 그녀 앞에 어느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신학기를 맞아 도쿄에서 부임해온 이사와. 그의 등장으로 세이의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섬사람들과 여러 면에서 다르고 낯선 이사와에게 세이는 조금씩 매료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이사와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그의 눈길을 쫓는다. 그의 말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사투리가 아닌 표준어로 말을 건넨다. 남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도 자꾸만 이사와에게 끌리고 마음이 머무는 것에 세이는 당황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애써 감춘다.




내성적이다못해 답답하게 여겨지는 세이와 달리 쓰키에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과감한 노출의상을 즐기고 도쿄의 유부남(본토씨)과의 만남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드러내놓는데 이를 세이와 남편을 비롯한 섬사람들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세이와 남편의 조용하고 담담한 사랑과 쓰키에와 본토씨의 도발적이고 끈끈한 사랑이 유지하고 있던 긴장은 이사와의 등장으로 잠깐 갈등을 빚는다. 그 과정에서 세이의 남편은 아내의 미묘한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지만 묵묵히 기다려주고 세이는 끝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이사와는 섬을 떠난다.




채굴장이란 터널을 파나갈 때 제일 끝에 있는 지점이라고 한다. 터널이 뚫리지 않는한, 계속 파나가는 동안 언제나 그 끝에 존재하는 채굴장. 그 의미는 무엇일까. 헤어지기 전 세이가 이사와를 채굴장에 데려간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혹 세이에게 있어 이사와는 ‘미시루시’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환상 같은 것...




책을 읽는 동안 줄곧 바다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쏴~아, 쏴~아...조용조용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지그시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해본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터널의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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