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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탐정록 ㅣ 경성탐정록 1
한동진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셜록 홈즈! 그가 경성에 떴다! 단짝 와트슨과 함께. 이것만으로도 <경성탐정록>을 읽어볼 계기는 충분하다. 추리소설이 뭔지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내게 책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셜록 홈즈. 그를 다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두근댔다.
소설의 배경은 일제 식민지하의 암울함이 지배하던 1930년대 경성. 설홍주와 중국인 한의사 왕도손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자신의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을 요구하는 구미당기는 사건의뢰가 없다고 투덜대는 설홍주에게 의문의 사건이 날아든다.
책에는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 거부의 실종사건을 다룬 <운수 좋은 날>, 어마어마한 액수의 재산이 숨겨진 장소를 찾는 유일한 단서인 족보의 비밀을 파헤치는 <황금 사각형>, 살해된 여인의 신원을 알아볼 수 없도록 사체를 처참하게 훼손한 끔찍한 살인사건 <광화사>, 깊은 밤 고급 일식 여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추적과정 일어난 중 괴한의 기행을 다룬 <천변풍경>, 비오는 날 중화요리점을 찾은 한 청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숨은 비밀을 찾아내는 <소나기>. 사건은 모두 하나같이 복잡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지만 설홍주에겐 입맛에 맞는 도전과제나 다름없었다. 그는 사건에 관련된 거라면 아무리 작고 사소한 힌트나 증거, 상황들도 놓치지 않고 지그소 퍼즐을 맞추듯 해체, 조합하여 너끈히 사건을 해결해낸다. 때로 왕도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이 중에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건 <황금 사각형>과 <광화사>였다. <황금 사각형>에선 일본인의 눈을 피해 엄청난 전재산을 숨겨뒀던 아버지가 사망 직전에 수수께끼 같은 유언만을 남기고 눈을 감자 가족들은 설홍주에게 의뢰를 한다. 하지만 설홍주는 족보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건 알아내지만 그 이상 사건의 진척이 없어 난감해한다. 그러던 차에 왕도손이 던진 위로의 말에서 그는 실마리를 찾아내는데 족보 같은 문서에 숨은 트릭을 발견해내는 과정이 독특했다.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광화사>는 사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화가의 존재나 범인이 어떤 트릭을 썼는지 초반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홍주에 맞서는 악역으로 등장한 범인의 차갑고 냉혹한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추리소설에 흥미진진한 재미와 스릴을 더해주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익숙하게 알고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이 연상된다. 설홍주, 왕도손, 손다익 박사, 허도순이란 등장인물 이름만 해도 셜록 홈즈, 와트슨, 손다이크 박사, 허드슨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편의 제목인 <운수 좋은 날> <광화사> <천변풍경> <소나기>도 현진건과 김동인, 박태원, 황순원의 소설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는데 소설의 내용에 어울리는 제목을 찾은 건지, 제목을 정한다음 소설을 썼는지 궁금해진다. 이런 것들로 인해 셜록 홈즈가 정말 1930년대 경성에 존재한 듯하다. 추리소설의 고전이자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말투나 행동, 버릇을 비롯해 당시 경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사소한 단어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재현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1930년대. 이 무렵 이육사는 일제에 대해 저항을 넘어서 당당하게 대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윤동주는 암담한 시대상황을 고뇌하는 시를 노래했다. 신학문과 선진문물을 공부했지만 자신들이 배우고 터득한 지식을 채 펼쳐보이지 못한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를 설홍주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설홍주에게서 셜록 홈즈의 색채가 너무 짙다는 거다. 기회가 된다면 좀 더 한국적인 설홍주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표지그림이 너무 어둡다. 모자를 눌러쓰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한 손은 턱에 괴고,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들고서 깊은 생각에 빠진 설홍주의 모습(이것도 온라인 서점의 표지그림을 보고서야 알았다)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칙칙한 그림톤을 조금만 밝게 하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