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마지막 키스 역사 속으로 떠나는 비엔나 여행 2
프레더릭 모턴 지음, 이은종 옮김 / 주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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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에 매료되지 않은 이가 있을까. 표정을 알 수 없는 남자와 남자의 키스에 지그시 눈을 감은 여인.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다. 거기에 서로를 안고 쓰다듬는 손의 매무새까지 사소한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다. 매혹적이다. 표지에 그려진 클림트의 <키스>와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란 제목, 30대의 황태자가 10대의 소녀와 동반자살 했다는 소개자료를 보고  순간 두 번의 이혼경험이 있는 심프슨 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왕위까지 버렸던 윈저 공작의 세기의 로맨스가 떠올랐다. 윈저 공작의 로맨스에 버금가는 로맨스가 역사 속에 또 존재한다니. 갑자기 귀가 솔깃해지는 기분이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의 저자인 프레더릭 모턴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는데 역사, 특히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역사를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을 출간했다고 한다. 그런 저자가 1889년 1월 30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이자 합스부르크가의 왕위계승자인 루돌프 요제프와 17세 소녀 메리 베체라가 동반자살 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어떻게 소설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지 궁금했다.




마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가는 황태자 루돌프를 묘사하는 것으로 책은 시작한다. 하인을 마차 뒤에 앉히고 루돌프가 직접 마차를 모는 장면을 담은 그림도 있었는데, 이 두 가지는 루돌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외국의 뉴스, 유럽의 정세에 주목하고 있던 루돌프는 당시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모두 빠르게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이에 루돌프는 뒷짐 지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기보다 오스트리아도 새로운 시대, 변화의 시대를 맞아 강력한 대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모든 걸 자신이 직접 앞서서 맞이하고픈 염원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루돌프가 잘 차려입은 허수아비처럼 황태자의 자리에 머물기를 바랬다. 그 이상의 것을 허락지 않았다. 황태자인 루돌프가 품고 있는 이상이나 생각, 이념은 무시되었다. 자신의 조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무기력하다는 걸 사실보다 황태자인 자신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은 그를 큰 좌절에 빠지게 한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유희와 쾌락뿐. 어디서고 위안을 받을 수 없었다. 새롭고 강렬한 뭔가를 원하던 루돌프는 한 극장 개관식에서 봤던 17세의 소녀 메리 베체라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에게 점점 깊이 빠져들게 되는데 자신을 내리누르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루돌프는 결국 메리를 죽음의 동반자로 선택한다.




본문에 수록된 사진 속의 루돌프는 30세의 젊은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짙은 우울과 좌절로 생기를 잃은 한 명의 불행한 인간이었다. ‘나는 가장 불안한 나라에 사는 가장 불안한 사람’이라던 루돌프. 그의 앞에 놓인 길은 정녕 죽음으로 향하는 길 뿐이었을까. 안타까움에 자꾸 덮었던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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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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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를 처음 만난 건 <철도원>이었다. 철도원으로 근무하는 아버지에게 십여 년 전에 죽었던 딸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내용이었는데 죽은 딸을 내내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아버지와 딸의 영혼의 만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침 난 큰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책 속의 가슴 저린 사랑과 아픔, 용서...의 이야기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알고 있는 일본소설이나 일본작가도 없었지만 <철도원>은 내게 ‘아사다 지로’란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그 후 <지하철> <활동사진의 여자> <장미도둑>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등 그의 작품이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읽고 있다.




노란 은행잎이 가득한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청년과 노인이 그려진 <가스미초 이야기>. 이 책에서 아사다 지로는 또 어떤 얘길 건네줄까. 틀림없이 표지그림에 있던 사람의 이름일거라 여겼던 ‘가스미초’는 다름아닌 ‘안개마을’이란 마을의 이름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가스미초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주인공인 ‘나’ 이노의 서술로 진행된다. 이노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이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추억들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흘러나온다. 어쩌다 발견한 한 장의 사진에서 옛 추억을 더듬듯이 이노는 자신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시간의 흐름에 오랫동안 사진사로 일해 명장의 위치에 오른 할아버지와 무척 아름다웠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제자였다가 데릴사위가 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노망이 들어 기억이 오락가락 하는 할아버지는 그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과 추억과 사진 속에 담는 이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사진관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인물사진보다 풍경사진에 매료되어 걸핏하면 유랑을 떠나고 사진관은 점점 옛날의 빛을 잃어간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할머니와 함께 봤던 가부키 극장에서 생전의 할머니가 사랑했던 노신사를 만난다. 노신사로부터 받은 평지꽃을 강물에 흘려보내던 할머니의 모습은 이노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그후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주검을 실은 운구차가 사진관 앞을 떠날 때 이노는 목이 터져라 외친다. “오나리코마~!!” 기부키 극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없이 많이 사진을 찍었지만 학도병으로 출전하는 삼촌의 사진은 차마 찍을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 그는 손자 이노와 친구들의 졸업사진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한시도 손에서 떼놓지 않던 라이카를 들고서.




잊혀진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을 떠올리는 기분으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이노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결코 슬프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개마을 가스미초...지도에서도 사라진 그 마을은 아사다 지로의 이야기를 통해 내게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내년 봄 유채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면 이노와 할머니의 평지꽃(유채꽃)을 떠올리고 사진관 카페라 앞에선 명장 이노 무에이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사람들에게 건네던 말을 떠올리겠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오티스 레딩의 노래를 들으며 어설프게나마 흥얼거리지 않을까....이 모두가 언젠가 문득 떠올리게 될 나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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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거대한 기차 - '칭짱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가려진 통일 제국을 향한 중국의 야망
아브라함 루스트가르텐 지음, 한정은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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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일. ‘하늘 길’이 열렸다. 가장 높은 지점이 5천 미터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벳의 고원에 칭짱 철도가 개통했다. 단지 이 사실만 놓고 보면 정말 굉장하다. 산소가 극히 희박한 지역이라 호흡하기도 어렵다는  그렇게 높은 곳에 철도를 놓는 일이 가능한가? 그걸 해냈으니 인간의 능력은 정말 무궁무진하구나 싶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자인 아브라항 루스트가르탠이 <중국의 거대한 기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칭짱 철도 건설’ 그 이면에 숨겨진 ‘무언가’였다.




‘금단의 땅’이라 불리던 티벳에 철도를 건설하기까지 중국은 50년간 치밀하게 조사하고 차근차근 준비과정을 밟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구동토층으로 이뤄진 땅. 지표 아래가 얼음으로 되어 있어서 온도가 올라가 얼음이 녹으면 거대한 탱크도 빠질 정도로 크고 깊은 모래지옥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곳에 어떻게 철도를 놓을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중국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고심한다. ‘열 사이펀’이라는 특별한 냉각장치를 만들지만 그것 역시 티벳의 지형적 특성이나 위험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칭짱 철도의 건설을 서두른다. 대체 이유가 뭘까.




저자는 우선 티벳의 넓은 땅이 중국으로선 탐이 났을 거라고 말한다. 중국에서 여덟 번째로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0년까지 동부와 철도로 연결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란 점은 중국으로 하여금 철도건설의 동기가 되었다. 인구나 경제성장 면에서 여러모로 중국과 경쟁대상인 인도와 네팔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경계하기 위해 국경이 인접한 티벳은 군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충지였다. 거기다 티벳에 매장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지하자원까지! 중국은 예로부터 티벳을 ‘시짱’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서쪽은 보물창고’라는 의미인 것처럼 이렇게 몇 가지만 훑어보더라도 티벳은 중국에게 그야말로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사탕단지를 아이 손에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올려두면 아이는 의자나 사다리를 동원해 그 단지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중국은 자국의 필요에 의해 여러모로 탐나는 땅 티벳을 손에 넣기 위해 가장 먼저 철도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 정부는 동부와 서부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 철도건설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칭짱 철도 건설이후 이득을 본 사람들은 한족이었고 티벳 사람들의 삶의 질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티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훼손되기 시작했고 전염병이 돌았으며 한족의 문화가 침투하면서 고유풍습과 문화가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티벳의 고유한 언어를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전 읽었던 티벳작가 아라이의 소설 <소년은 자란다>가 생각났다. 칭짱 철도 건설이 가져온 개발에 밀려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설 속 작은 마을 지촌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졌다. 작은 것에 감사하던 순박한 사람들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조금씩 파괴되어 가다가 언젠가 내쳐질 걸 생각하니 갈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모습은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던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




사실 책의 구성이나 편집은 완벽하지 않다. 본문의 성격도 기행문인지 사회과학 분야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어볼만 하다. 위기에 처한 티벳의 아픔과 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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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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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작품은 <핏빛 자오선>을 통해 처음 만났다. 인간의 잔인함과 광기가 불러온 끊임없는 살육으로 황무지가 피로 물들던 책을 읽고 마음이 극도로 불편했다. 스멀스멀 번지는 붉은 피에 나도 잠겨버릴 것 같아 한동안은 그의 책을 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또다시 코맥 매카시의 작품을 덥석 집을 줄이야....




<국경을 넘어>는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작년 여름 국내에 출간된 <모두 다 예쁜 말들>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작품을 읽지 않고 두 번째 작품을 읽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전작인 <모두 다 예쁜 말들>과 주인공이 다르다. 따라서 전작을 읽지 않고 바로 두 번째 이야기를 읽어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풍요롭고 거친 땅. 울타리도 없는 국경선을 지나 멕시코로 갈 수 있는 곳 히달고 카운티의 어느 겨울밤. 늑대 소리에 소년이 잠을 깨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마을의 목장에서 기르는 소가 늑대에게 연이어 당하자 빌리와 아버지는 늑대를 잡기 위해 덫을 놓는다. 늑대의 가죽을 팔아서 돈을 벌던 시기여서 미국의 늑대는 이미 멸종된 상태. 멕시코에서 넘어온 것이 분명한 그 늑대는 빌리와 아버지가 설치한 덫을 교묘히 파헤쳐놓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날 빌리는 덫에 걸린 늑대를 발견하지만 새끼를 밴 늑대가 다리까지 다친 걸 보자 살려줘야겠다고 마음먹고 멕시코로 돌려보내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 그러나 늑대를 풀어주기 위해 도착한 멕시코에서 늑대는 오히려 천막에 갇혀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투견장에 보내져서 개를 상대로 싸움을 하게 된다. 친구들이 있는 산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늑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년은 국경을 넘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걸 깨달은 소년은 늑대의 피투성이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늑대를 뱃속의 새끼들과 함께 돌무더기 땅에 묻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곧 끔찍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소년의 가족들이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부모님이 죽고 달아난 동생 보이드만 간신히 살았다는 거였다. 소년은 인디언들이 훔쳐간 말을 찾기 위해 동생 보이드와 함께 멕시코 국경을 향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이 자신을 잔인하고 냉혹한 절망속으로 몰아넣게 될 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역시나. 코맥 매카시의 글은 만만하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처럼 따옴표가 없는 글을 읽으며 이게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해야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스페인어도 책의 몰입하는 속도를 더디게 했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툼한 책을 여느 때보다 천천히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국경’이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거였다. 단순히 나라와 나라를 구분 짓는 경계가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그 이면에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초반 늑대에 매료되어 마음을 나누던 순수한 소년이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개에게 파이프를 휘두르며 꺼지라고 소리친다. 무엇이 소년을 그토록 변하게 만든 걸까. 소년이 앞으로 걸어갈 삶의 여정은 어떤 길일까.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리지만 그럼에도 그 다음이 궁금해지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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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포스 Olympos
댄 시먼스 지음, 김수연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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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이었다. 독서모임 때문에 찾은 대형서점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다.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툼한 책. 서가에 꽂힌 다른 책 중에서 후광이 비친 듯 월등함을 자랑하던 책. 그건 바로 <일리움>이었다. 그 날 이후로 <일리움>은 한동안 날 괴롭혔다. 내 머릿속에서 두 명의 내가 끝없이 싸웠다. “두 눈 딱 감고 질러버려!” “아니, 그럼 안돼. 어떤 책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잖아.” “질러버렷” “절대 안돼”...그러다 잊혀졌다. 아니, 포기해버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그러다 2009년 가을. 2년 만에 난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일리움>의 후속작이자 완결편인 <올림포스>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전편보다 더 두툼해진 위용을 자랑하는 책을 안고 얼마나 기뻤던지. 꿈에 그리던 연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일리움>을 읽지 않고 <올림포스>를 먼저 봐도 상관없을까? 두툼한 두께만큼 책에 실린 이야기도 장난아니게 복잡할텐데 그걸 몽땅 생략하고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일단 먹어야지....어디어디, 맛 좀 볼까?




책의 시작은 사뭇 도발적이다. 동트기 직전, 잠에서 깨어난 헬렌은 연인 호켄베리가 있었던 자리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폴로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은 남편 파리스. 그토록 아름답던 파리스가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헬렌은 장례식을 앞두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전부인이자 자신을 배신한 헬렌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미는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소동이 일어난다. 오이노네란 여인이 자신이야말로 파리스의 진정한 아내라고 주장하며 파리스를 죽인 것은 아폴로가 아니라 필록테테스가 쏜 치명적인 화살 때문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혼란에 휩싸여 술렁이는 사이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시신을 뒤덮은 화염 속으로 뛰어들고 마는데...




초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야기를 읽고 일순 혼란에 빠졌다. 파리스가 죽었다? 아니, 죽은 건 파리스가 아니라 헥토르가 아니었나? 거기다 헬렌의 연인이라는 호켄베리는 누구고 오이노네는 또 누구야? QT는? 이거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거 아니었나?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얘기야? 그리스로마 신화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그것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이야기 전개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책장을 덮고 표지부터 다시 찬찬하게 훑어보니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오래된 미래와 신화의 과거가 조우한 스페이스 판타지의 대단원’...그제서야 ‘아하!’ 무릎을 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호메로스의 ‘일리어드’는 10년간 이어진 그리스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대서사시다. 그걸 저자 댄 시먼즈를 교묘하게 틀어놓았다. 거기에 그리스로마의 수많은 신들의 이야기까지 덧붙여서. 가장 큰 결정타는 이 소설이 역사팩션이 아니라 ‘SF'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궁금증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스의 신들을 지구도 아닌 우주로 데려다놓고 그들의 손에 과학문명을 쥐어주었다. 그런 다음 전쟁을 벌였던 그리스와 트로이가 힘을 합해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맞서도록 치밀한 전략을 세워놓은 거였다. 무수히 많은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저자가 각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이자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었고 그 이야기에 탄력과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모라벡이라던가 고전인류가 등장하고 호켄베리가 그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로 나타난 것이었다.




솔직히 아흔다섯 개의 꼭지로 이뤄진 <올림포스>를 읽는 건 쉽지 않았다. 1087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무게로 인해 팔과 어깨가 묵직한 건 차치하고 난생 처음 듣는 인물과 용어로 본문 중간중간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되짚어 나오기 일쑤였다. 스타워즈 시리즈도 통달하지 못한 나였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나의 도전에 충분한 보상이 될 만큼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마지막 결말을 보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는 여타소설과 달리 이 책은 완결편을 보고 나니 전편인 <일리움>이 더 궁금해진다. 이제 남은 건 시기뿐. 대체 언제 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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