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아사다 지로를 처음 만난 건 <철도원>이었다. 철도원으로 근무하는 아버지에게 십여 년 전에 죽었던 딸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내용이었는데 죽은 딸을 내내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아버지와 딸의 영혼의 만남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침 난 큰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책 속의 가슴 저린 사랑과 아픔, 용서...의 이야기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알고 있는 일본소설이나 일본작가도 없었지만 <철도원>은 내게 ‘아사다 지로’란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그 후 <지하철> <활동사진의 여자> <장미도둑>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등 그의 작품이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읽고 있다.




노란 은행잎이 가득한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청년과 노인이 그려진 <가스미초 이야기>. 이 책에서 아사다 지로는 또 어떤 얘길 건네줄까. 틀림없이 표지그림에 있던 사람의 이름일거라 여겼던 ‘가스미초’는 다름아닌 ‘안개마을’이란 마을의 이름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가스미초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주인공인 ‘나’ 이노의 서술로 진행된다. 이노의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이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추억들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흘러나온다. 어쩌다 발견한 한 장의 사진에서 옛 추억을 더듬듯이 이노는 자신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시간의 흐름에 오랫동안 사진사로 일해 명장의 위치에 오른 할아버지와 무척 아름다웠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제자였다가 데릴사위가 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노망이 들어 기억이 오락가락 하는 할아버지는 그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과 추억과 사진 속에 담는 이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사진관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인물사진보다 풍경사진에 매료되어 걸핏하면 유랑을 떠나고 사진관은 점점 옛날의 빛을 잃어간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할머니와 함께 봤던 가부키 극장에서 생전의 할머니가 사랑했던 노신사를 만난다. 노신사로부터 받은 평지꽃을 강물에 흘려보내던 할머니의 모습은 이노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그후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주검을 실은 운구차가 사진관 앞을 떠날 때 이노는 목이 터져라 외친다. “오나리코마~!!” 기부키 극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없이 많이 사진을 찍었지만 학도병으로 출전하는 삼촌의 사진은 차마 찍을 수 없었다는 할아버지. 그는 손자 이노와 친구들의 졸업사진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다. 한시도 손에서 떼놓지 않던 라이카를 들고서.




잊혀진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을 떠올리는 기분으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이노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결코 슬프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개마을 가스미초...지도에서도 사라진 그 마을은 아사다 지로의 이야기를 통해 내게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내년 봄 유채꽃이 만발한 풍경을 보면 이노와 할머니의 평지꽃(유채꽃)을 떠올리고 사진관 카페라 앞에선 명장 이노 무에이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사람들에게 건네던 말을 떠올리겠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오티스 레딩의 노래를 들으며 어설프게나마 흥얼거리지 않을까....이 모두가 언젠가 문득 떠올리게 될 나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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