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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ㅣ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다리 옆쪽으로 길게 트임이 있는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라고 하나요? 붉은 장미 무늬의 치파오를 입고 서 있는 여인, 그것도 치마폭 부분만 강조된 표지의 <차가운 밤>. 뜨거운 열정을 나타내는 꽃 붉은 장미와 ‘차가운 밤’이라는 제목이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궁금해지더군요. 이 책이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거기다 저자인 바진이 <아큐정전>의 루쉰이나 라오서와 함께 중국의 3대 문호로 꼽힌다니 작품성도 뛰어날 게 분명했습니다. 지금까지 중국문학을 그다지 많이 접하지 못했기에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작품만은 놓치고 싶지 않더군요.
‘긴급 경계경보가 울린 지 반 시간이 지났다’는 첫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은 중국이 일본과 한창 태평양 전쟁을 치루고 있던 1940년대가 배경입니다. 방공호에서 나와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가면서 왕원쉬안은 고민에 빠집니다. 지난밤 아내와 짧은 다툼이 있었는데, 화가 나서 뛰쳐나간 아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도대체 어딜 가야 아내를 찾을 수 있지?
책장을 불과 한 장 넘겼을 뿐인데,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주인공인 왕원쉬안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그의 아내는 물론 그가 모시고 있는 어머니도 아마 이러이러한 인물일거라고 대략 짐작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 짐작은 대부분 맞아떨어졌습니다. 소설의 초반에 이미 등장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된 거지요. 이쯤되면 작품에 대한 흥미나 재미가 반감되어 책장을 덮어버리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 책은 다음 내용이 더 궁금해지는 거예요.
왕소심 더블A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소심하고 나약한 인물 왕원쉬안,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보는 일을 하는 그에게는 당시로서는 최고교육인 대학을 졸업해 은행원으로 일하는 매력적인 아내가 있었습니다. 소심한 남편과 화려한 아내,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14년을 함께 지내면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게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가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또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원쉬안의 어머니이자 아내 수성에게 있어 시어머니인 사람, 가부장제의 전통에 사로잡혀 며느리인 수성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어머니로 인해 왕원쉬안과 수성, 수성과 어머니, 어머니와 왕원쉬안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사실 고부간의 갈등은 어느 한 나라에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것이 더욱 크게 부각되는 이유. 그건 바로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한창 전쟁을 치루던 때라 하루가 멀다하고 경계경보가 울리고 언제 어느때 전기가 끊겨 정전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일상에 필요한 소소한 것들이 턱없이 부족한 때였기에 한 집안의 가장인 왕원쉬안은 큰 부담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를 둘러싼 두 여인, 아내와 어머니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의 사람이었으니 왕원쉬안의 고뇌는 더욱 깊어지고 급기야 병을 얻게 되고 맙니다.
제가 한 사람의 아내이자 며느리여서일까요? 책 속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며느리를 ‘정부’라 칭하며 험담을 늘어놓기에 급급한 어머니와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보다 무도회를 다니는 것으로 탈출하려는 수성, 그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왕원쉬안.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 극단으로 치닫는 모습이 답답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으로 중국이 폐허가 되버리듯 그들 역시 그들만의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마지막, 차가운 밤거리를 거닐며 고뇌에 빠진 수성, 그녀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