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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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인근에 있지만 내가 그 곳을 찾을 때는 서점이나 공연관람이 유일하다. 그 외에는 백화점을 찾을 이유가 없다. 물론 이런 나도 한때 백화점을 자주 들락거린 때가 있었다. 막 결혼한 신혼이었을 때 친구들과 시내에서 약속해서 시간을 보낸 후 남편의 회사 근처의 백화점에서 만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간혹 세일기간이라 짐이 무거워도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당시 백화점에는 셔틀버스가 있어서 백화점과 집을 편리하게 왕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셔틀버스 운행이 금지되면서 백화점에 발길도 자연히 뜸하게 됐다.


그런 내게 조경란의 <백화점>은 새로운 시선,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왔다. 소설인 줄 알았던 책은 그러나 소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본문의 내용이 신변잡기나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백화점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 백화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책의 구성이 독특하다. 모두 11개의 주제(?)로 나뉘어진 책은 지하 1층에서 지상 10층 건물의 백화점을 연상시킨다. 제일 먼저 1층에 들어선 저자는 시계와 향수, 명품매장에 관한 생각과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시계 취향, 시계를 고를 때 무엇에 중점을 두는지부터 시작해서 강렬하고 짙은 ‘머스크’ 향에 매료되었던 경험을 얘기하면서 슬쩍 향수의 기원을 건드리기도 한다. 또 명품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연찮게 명품매장에 들렀을 때 머쓱했던 경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물건이 우리를 말해준다’는 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2층에 오르면서는 백화점의 동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장과 매장 사이의 간격과 크기, 이어짐이 모두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에스컬레이터라고 한다. 위와 아래를 오고가는 엘리베이터와는 달리 이동속도는 느리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아주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한때 아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동매장과 키즈카페에 들르곤 했는데 백화점에 아동매장이 생기게 된 과정이나 마케팅과 관련된 내용을 접하니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 ‘책’에 관한 것이었다. 평생동안 다 읽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만큼 책을 모으는 난 수첩이나 노트를 너무나 좋아한다. 문구점이나 대형마트의 문구코너에서 한참 서성이다 작은 하나라도 건져야 직성이 풀리곤 하는데 그런 내게 저자의 ‘수집’에 관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다.


백화점에는 창과 시계가 없다고 했다. 백화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오로지 소비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최근엔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1층에서 10층까지, 그리고 지하1층으로 향하면서 내게 낯설기만 한 백화점을 저자와 함께 쉬엄쉬엄 돌아다닌 기분이 든다. 구경꾼이자 만보객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그러고보니 얼마전 공연 관람을 마치고 우연히 찾아든 옥상에서 초록의 작은 정원이 펼쳐져있는 걸 보고 얼마나 감탄했던지. 백화점 영업이 이미 마친 시간의 옥상정원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행복감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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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아이들 2 - 가짜 이름을 가진 아이들 봄나무 문학선
마거릿 피터슨 해딕스 지음, 이혜선 옮김 / 봄나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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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 내 이름은 루크야.”




자신의 존재조차 어두운 그늘에 숨긴 채 살아야했던 소년. 그에게 어느 날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웃의 셋째아이였던 젠의 아버지가 죽었지만 신분이 살아있는 ‘리 그랜트’로 살아갈 것을 제의해왔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버려야한다는 것.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그리고 소년을 사랑하는 가족은 망설이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식량부족으로 셋째 아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소년과 가족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날이 밝으면 다른 이름을 받아서 살아가게 될 아이에게 엄마는 정성껏 아침을 차려냈다.




사랑하는 가족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리 그랜트’라는 이름으로 들어간 학교에서 소년은 당황한 일을 겪는다. 어느 누구도 전학생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학교의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며 숨가쁜 하루를 보낸 후 소년은 깊은밤 잠자리에서 숨죽이듯 내 뱉는다. “루크, 내 이름은 루크야.”




루크가 다니게 된 핸드릭스 학교는 여러모로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걸핏하면 벌점을 남발하는 선생님에, 학교 내부는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 화장실이나 복도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살피는 감시원이 복도마다 있었고 무엇보다 학교의 어디에도 창문이 없다는 점이었다. 셋째 아이여서 바깥출입이 극도로 제한되긴 했지만 집 주변의 숲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지냈던 루크에게 사방이 꽉 틀어 막힌 학교에서의 생활은 고역이었다. 무엇보다 매일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 때문에 루크는 더욱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루크는 우연히 복도에서 하나의 문을 발견한다. 그것은 학교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풀밭과 나무, 하늘이 보이자 루크는 자석에 이끌린 듯 문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후 루크는 틈만 나면 숨겨진 문을 통해 학교 건물 밖의 숲에서 향하고 숲에 자신만의 작은 텃밭을 가꾸기에 이른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텃밭이 누군가의 발길에 짓밟혀 엉망이 되어버린 걸 발견한다. 도대체 누구일까? 그 비밀의 문을 통해 숲으로 온 사람은?




인구경찰에게 발각될 경우 생명이 위태로운 셋째아이 루크. 그는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인 친구들을 만난다. 그들과 자신의 친구 ‘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학교생활에 조금씩 적응해나가는데, 그러던 중에 일이 벌어진다. 자신의 무리 중에 인구경찰의 스파이가 있었던 것.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루크는 어떻게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적인 식량난 때문에 셋째 아이가 금지된 사회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격을 안겨준다. 후반부에 이르러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던 이 학교의 설립에 얽힌 내막이 밝혀지고 루크에게는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 새로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가. 그러나, 루크는 남기로 결정한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셋째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루크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3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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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 175년 동안 바다를 품고 살았던 갈라파고스 거북 이야기 보름달문고 45
한윤섭 지음, 서영아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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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해운대에선 유독 해무가 잦았습니다. 안개도 아닌 그것은 바다에서 육지로육지로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해변가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리는 그 모습이 마치 대형 쓰나미를 보는 듯했는데요. 발아래로 해무가 스쳐지나갈 때의 차갑고 서늘한 그 감촉이란, 뭐라 표현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순간 소름끼치면서도 이내 환상의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거든요.




<해리엇>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동이 트기 전, 새벽 어스름이 내려앉은 길을 몇 마리의 동물이 줄 지어 가는 모습에서 왠지 서늘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밀려왔습니다. 이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 이유는 뭘까, 궁금해졌습니다.




“삼 일이면 해리엇의 몸속에서 생명이 모두 빠져나갈 거야.”

동물원에 깊은 밤이 찾아들어 고요한 시각, 원숭이 찰리와 너구리 올드는 거북 해리엇을 찾아갑니다. 너구리 올드가 동물들의 생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거든요. ‘해리엇의 생명이 삼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찰리와 올드는 절박함과 슬픔에 휩싸이게 됩니다. 마치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숙연한 분위기에 궁금증은 더욱 부풀어 오릅니다. 서로 다른 동물인 찰리와 올드, 해리엇에게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찰리는 처음부터 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기 자바 원숭이였는데요. 아주 어릴 때 사람들에게 잡혀 동물원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동물원 주인의 아들이 찰리를 집으로 데려가면서 ‘찰리’란 이름이 붙여졌지요. 그렇게 찰리는 숲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의 습성을 깨우치기 전에 사람에 의해 길러지면서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데 길이 들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오래 지속되진 못했습니다. 아이가 학교 문제 때문에 집을 떠나게 되자 찰리는 다시 동물원으로 보내집니다.




원숭이지만 원숭이의 습성을 잃어버린 찰리는 스미스를 비롯한 개코 원숭이 무리에게 혹독한 괴롭힘을 당합니다. 동물을 배신하고 사람과 살았다는 거지요. 다행히 백 칠십 살이 넘은 거북이 해리엇이 그런 찰리를 개코 원숭이 무리로부터 지켜줍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떠는 찰리에게 넌 이제 혼자가 아니라며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요. 결국 해리엇의 도움으로 찰리는 개코 원숭이의 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지게 되는데요. 새로운 집에서 찰리는 해리엇을 비롯해 너구리 올드, 오소리, 여우, 코알라와 만나 모처럼 편안한 기분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찰리에게 슬픔의 순간이 닥칩니다. 175년이란 세월을 살았던 해리엇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해리엇은 찰리에게 부탁합니다. 동물원의 친구들과 가까이에서 인사하고 싶다고. 자신의 우리 앞으로 모여든 동물들에게 해리엇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신이 지상낙원인 갈라파고스를 떠나 동물원으로 오게 된 사연을, 갈라파고스로 돌아가길 얼마나 염원했는지를... 그런 해리엇에게 찰리는 묻습니다. 바다가 해리엇을 갈라파고스로 데려다주는지를. 해리엇은 과연 동물원을 떠나 무사히 바다로, 갈라파고스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해리엇,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갈라파고스로 돌아가고 싶어요?”

찰리가 물었다.

“그래, 내가 살았던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쩌면 그 전에 생명이 다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바다로 가고 싶어. 아니, 난 바다로 갈 수 있을 거야.” ㅡ 137쪽




<봉주르, 뚜르> 이후로 만난 저자의 작품 <해리엇>을 통해 또 한 번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175년 동안 바다를 품고 살았던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 이야기’는 오래도록 제 가슴에 울림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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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 제21호 - Summer, 2011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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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인 것 같아요. 온라인 서점에서 신간을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책을 봤습니다. <아시아>라는 잡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예지인데요. 제가 알고 있던 기존의 문예지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국내의 문예지가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한데 비해서 이 <아시아>는 작가의 범위를 아시아로 확대했더군요. 제가 본 책만 해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일본 작가의 글, 시와 소설이 소개되어 있었는데요. 제가 즐겨보는 일본의 문학상에 대한 글이 있어서 관심이 갔습니다. 다만 하나의 글을 한글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번역된 점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지나쳤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참, 멍청한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엔 놓치지 않았어요. 출간 소식이 들림과 손에 잡았습니다. 대체 어떤 책일까. <아시아>를 읽어본 이들의 글을 보면 온라인 서점의 미리보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분명히 있는 게 틀림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지요. <아시아 21호>.




이번 <아시아 21호>는 ‘아랍 작가의 눈으로 보는 재스민 혁명의 안과 밖’이란 특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중동, 아랍하면 종교 갈등, 내전, 분쟁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떠올랐는데요. <세계는 왜 싸우는가?>란 책을 통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쟁이 왜,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서로 대립된 생각과 이념의 폭을 줄이고 갈등을 완화할 길은 없는지 깊게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궁금한 것부터 찾아봤어요. ‘재스민 혁명’에 대해서. 그랬더니 ‘재스민 혁명’이란 ‘2010년에서 2011년까지 튀니지에서 일어난 혁명을 튀니지의 국화에 빗대어 재스민 혁명, 혹은 튀니지 혁명’이라 하는데요. 이후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여러 혁명도 재스민 혁명이라고 부른다는군요. 재스민 혁명이 주제인데다 아랍작가가 그들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쓴 글이기에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무겁고 안타깝고 때론 잔혹합니다. 가장 먼저 수록된 A. J. 토머스의 [붉은 무궁화 혁명]에서는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리비아 사태가 어떤 상황인지 보여줍니다. 장기집권에 가혹한 독재를 일삼았던 카다피 정권과 그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시인 안도현과 아랍의 잡지 편집자의 ‘중동의 민주화’에 대한 대담도 있는데요. 중동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작가들의 작품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나기브 마푸즈, 아랍의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의 작품(제7 하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 작가인 이명랑의 [어디서 왔어요?]도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준 작품이었습니다.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눠진 우리의 현실, 상황이 어떻게, 무엇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그로 인한 갈등과 아픔을 잘 녹여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백톤의 단순한 표지를 한 <아시아>는 외형부터 분위기까지 참 독특합니다. 현란하거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수록된 작품의 저자들 역시 낯설기만 합니다. 영어로 번역된 글은 또 어떻구요. 하지만 그래서 제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분명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일입니다. 얕은 지식에 섣부른 판단 때문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면 이제 두 손을 내려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후에 만나게 될 [아시아],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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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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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하다. 사랑에 빠지다.

불혹을 넘기고서 지난 시절을 돌아봤을 때 가장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이겁니다. 누군가에게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얼마나 로맨틱합니까. 주변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고 깜찍한 하트들도 뿅뿅 날아다닐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전 암만해도 안 되더군요. 천성이 게으른데다 말주변도, 사교성도 없는지라 누군가를 만나면 일단 경계부터 하고 봅니다. 그러다 만남이 반복되고 신뢰가 쌓이면 그제야 마음의 문이 열리고 정이 들기 시작하는데요. 지금의 남편도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기 저와 정반대의, 아니 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해볼 사랑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호시노 가즈히코. 그에게는 다섯 명의 연인이 있습니다. 단 둘, 양다리도 아니고 다섯 명? 네, 그렇습니다. 다섯 명. 그렇다고 이성에게 페로몬을 마구 발산하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서른 전후의 나이에 지극히 평범한 남자입니다. 카사노바 같은 희대의 바람둥이냐구요? 글쎄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함께하고 싶고 사귀게 게 된 여자가 다섯 명이 되었지만 그는 다섯 명의 연인을 모두 사랑하거든요. 진심으로.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다른 것도 아닌 ‘돈 문제’가 생겨서 ‘버스’에 올라타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무엇을 위한 버스인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호시노는 말합니다. 어릴적 엄마가 장보러 갔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로 아무런 소식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던 그는 자신의 다섯 명의 연인과 이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달라고. 그의 진심이 통한 걸까요? 그에게 연인과 제대로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단, 거구의 여인 마유미가 감시역으로 따라붙게 되지만 말입니다.




이후 책은 호시노가 마유미를 대동하고서 다섯 명의 연인과 만나 이별을 고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요. 여섯 부분으로 나눠지는 소설은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이별통고 이전에 호시노가 연인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의 특별한 만남이 짧게 수록되어 있습니다. 연인에게 바람맞고 양복차림으로 무작정 찾아간 딸기밭에서 만난 히로세 아카리를 비롯해서 도로에서 차를 세워선 뜬금없이 “[프렌치 커넥션]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물어오던 시모쓰키 리사코, 깊은 밤 로프를 둘러메고 건물에 침입하려던 기사라기 유미, 이비인후과에서 링거를 맞다가 만난 간다 나미코, 스포츠 음료 광고를 촬영하던 여배우 아리스 무쓰코. 이들은 헤어지자는 호시노에게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어떨까요? 호시노는 정말 다섯 명의 연인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요? 호시노의 이별여정은 무사히 끝나게 될까요?




이사카 고타로. 이 사람 책을 읽어봤던가? 한참 생각했어요. 그러다 언뜻 떠오른 책이 있었으니 <모던 타임스>였습니다. 몇 개의 단어를 검색하는 것만으로 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만화 같은 일러스트와 함께 곁들여진 책이었는데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를 바탕으로 고도로 정보화된 현대의 물질문명으로 인해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코믹하고도 잔혹하게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그동안 지인을 통해 이사카 고타로는 감각있고 유머있는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들어왔는데 처음 만난 작품에서는 그걸 느낄 수 없어 아쉬웠지요.




그런데 두 번째 만남에서 드디어 안타가 터졌습니다. <바이바이 블랙버드>. 큰 스릴은 없지만 그래도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요. 그것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바램이 있다면 호시노와 마유미의 이후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하다는 거. 그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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