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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고산자(古山子).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 말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와 같은 독자들을 위해서일까. 저자는 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한평생 외로운 길을 걸어간 고산자(孤山子), 누구보다 뜻이 높았던 고산자(高山子), 고요하고 자애로운 옛산에 기대어 살고 싶어했던 고산자(古山子). 그는 바로 김정호라고.
어릴 때부터 땅의 형상과 물의 흐름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호. 틈만 나면 산을 오르고 물길을 따라가지만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져있는 그것들을 보고 그는 소원한다. 땅과 산, 물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에 가보고 싶다고. 그곳에 가면 부용꽃 같았다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보다 정확하고 정밀한 지도를 그리고 제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홍경래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기 위해 길을 떠난 지원대가 돌아오지 않자 수색대가 찾아 나서고 깊은 산 속 비탈 아래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비롯한 지원대 전원의 시신이 발견된다. 한겨울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추위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잃은 게 분명했다. 아버지의 품에 있던 군현도 필사본을 보고 김정호는 생각한다. 지도가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다짐한다. 백성을 위한 지도,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어야겠다고. 더 이상 엉터리 지도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는 사람이 없어야한다고.
그 후 김정호는 길을 떠난다.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이 땅의 형상과 물의 흐름, 높고 낮은 산의 굴곡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긴다. 산과 들과 물길이 끝없이 이어져있듯 세상살이도, 삶도 그러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한평생 이곳저곳 떠돌며 일일이 그려 넣은 ‘대동여지도’였지만 그것을 탐내는 이가 나타나면서 김정호는 위기를 맞는다. 나라를 배신한 첩자라며 서서히 그의 목을 조여오는데....
고산자 김정호. 조선시대 가장 정확한 실측지도로 알려진 ‘대동여지도’를 목판본으로 제작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업적을 이룬 그였지만 우리의 역사는 그를 외면했다. 그의 나고 죽음, 삶에 대해 어디에도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오직 침묵으로 일관할 뿐.
그것이 안타까웠던 걸까. 소설가 박범신은 흩어지고 끊어진 그림을 이어가듯 김정호의 삶을 하나하나 복원해냈다. 고요하고 정갈하면서도 묵직함이 묻어나는 글에서 만난 김정호는 단순히 ‘대동여지도’ 제작자에 그치지 않았다. 외롭지만 높은 뜻을 지녔고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했던 고산자(古山子)였다.
물같이 바람같이 떠나는 고산자를 바라보며 깃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자는 무얼 전하고 싶었던 걸까. 무엇을 일깨워주고 싶었을까.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생각, ‘이어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과 물이 여기서 저기로 구비져 흐르듯 시간도, 역사도, 우리의 일상도 이어져있다.
며칠 후, 휴가지로 떠나는 길에서 펼친 지도를 보고 난 아마 떠올리게 될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를. 그에게서 우리에게로 이어져오는 기나긴 삶의 여정과 높은 이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