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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1
R. F. 쿠앙 지음, 이재경 옮김 / 문학사상 / 2025년 8월
평점 :
인간의 오만함이 극한으로 치달아 급기야 그들의 시선이 하늘에 이르렀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했다. 이에 분노한 신이 저주를 내렸다. 하나였던 인간들의 언어가 여러 개로 나누어졌고 탑을 건설하던 인간들은 혼돈에 빠졌다. 인간들은 불신과 오해 속에 서로 다른 언어들과 함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실려있는 바벨탑에 관한 극적인 일화다.
세계 3대 SF 문학상 중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수상한 R. F. 쿠앙의 대표작 <바벨>을 일간지 신간코너에서 알게 됐다. 19세기 은산업혁명으로 인해 세계 최강국이 된 영국이 세계 각지로 식민지 사업을 벌이는데 이걸 식민지 출신의 학생들이 모여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을 벌인다는 거였다. 역사와 판타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 호기심이 일었다.
리처드 러벌 교수가 광둥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 수첩에 적어둔 빛바랜 주소지에 도착했을 때, 그 집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그 소년이 유일했다. -17쪽.
19세기 초 중국의 광둥.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잃고 죽어가던 소년 앞에 러벌 교수가 나타난다. 그는 얇은 은막대를 소년의 가슴에 올려놓고 낮게 읊조린다. “트리아클” “트리클” 미묘하게 다른 두 언어로 은막대는 빛을 발하고 소년은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년의 호흡이 안정되자 교수는 소년을 데리고 나온다. 이미 마을 전체가 전염병으로 무덤이 되다시피한 상태였다.
교수는 소년을 영국 런던으로 데려와 ‘로빈 스위프트’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영어를 비롯한 라틴어, 그리스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를 혹독하게 교육시킨다. 소년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서. 결국 로빈은 옥스퍼드의 왕립번역원 바벨의 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로빈은 인도 켈커타 출신의 라미를 만나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거리를 가다 마주친 이들에게서 인종차별과 배척을 당하고 그 와중에 로빈은 정체불명의 낯선 인물을 만나 신비한 일을 겪게 되는데...
너도 런던이 팽창을 멈출 생각이 없는 거대 제국의 심장이라는 걸 알았을 거야. 이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바벨이야. 바벨은 은을 비축하는 것처럼 외국어와 외국 인재도 수집해서 이를 이용해 오직 영국에만 이익이 되는 번역 마법을 만들어내. (...) 그건 잘못이야. 그건 약탈이고, 근본적으로 부당한 일이야. - 170쪽
서로 다른 언어의 차이를 이용해 마법을 일으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은막대로 영국이 제국주의적 만행을 일삼고 식민지를 통제한다는 발상이 신선했다. ‘Babel’의 사전적 의미에는 '떠들썩한 말소리(장소, 광경), 말(言)의 혼란, 실행 불가능한(공상적인) 계획'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왕립번역원 바벨에서 로빈은 혼란스런 갈림길에 서게 된다. 영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경계인’. 로빈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