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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 필사, 나를 물들이는 텍스트와의 만남
장석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10월
평점 :
몇 년 전부터 줄곧 마음속에 계획만 할 뿐,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필사’가 그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두 시간은 꼭 책을 읽는데 책읽기가 백 미터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속도가 붙는다. 그럴 때 예전엔 골을 목전에 둔 것처럼 막판 스퍼트를 냈지만 요즘은 되도록 잠깐이라도 책을 덮으려고 노력한다. 책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행간에 담긴 의미를 놓치진 않았을까 고민하고 책 속에 담긴 문장을 몇 번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읽기도 한다. 제일 좋은 것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직접 손으로 써보는 거지만 그럴 상황이 아닐 때도 많아서 나중에라도 옮겨서 쓸 요량으로 포스트잇을 붙여두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바로 이 단계에서 그치고 만다. 짧은 문장이라도 노트에 베끼어 쓰는 것, 필사(筆寫), 난 왜 이렇게 시작하는 게 어려운지...
이것도 일종의 트랜드인가? 싶을 정도로 필사를 위한, 필사하기 좋은 책들이 자주 출간되고 있다. 누군가가 여러 분야의 글 중에 일부를 추려내어 놓은 책이 있는가 하면 글의 분위기를 켈리그라피로 한층 끌어올린 다음 그걸 옆 페이지에 그대로 따라 쓰면 되도록 편집된 책도 있다. 오, 이거 괜찮네, 싶어서 솔깃해지지만 매번 이내 시들해졌다. 내 마음을 울린 글이 아닌 다른 이가 추려놓은 글이라는 것도 연필이 아닌 이상 한 번 쓰면 돌이킬 수 없는 공간에, 거기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나 아닌 다른 이가 볼 수도 있는 책에 무언가를 적고 싶진 않았다. 필사를 한다면 그건 오직 내 마음의 움직임이 느껴질 때 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석주’란 이름 앞에 서고 보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인이자 수필가이고 독서광이자 출판인이기도 한 그를 난 좋아한다. ‘누가 지금/문 밖에서 울고 있는가./인적 뜸한 산 언덕 외로운 묘비처럼/누가 지금/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애인’)처럼 그의 시는 수시로 가슴을 울렸고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속의 위리안치였다. 나는 기꺼움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글을 보면서 나태함을 일깨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필사를 위한 책’을 출간했다. 장석주가 엮은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 결코 뿌리칠 수 없는 반가운 유혹이다.
필사는 느린 꿈꾸기이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이며, 행복한 몽상이다. - 서두에
책읽기가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우아한 현실도피였다는 그는 힘든 시절을 보낼 때 니체와 단테의 문장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읽은 글을 모두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명문장은 지혜와 인생의 정수를 함축된 구조 속에 담아’내기에 때론 거울처럼 우리 내면을 비춰준다는 것이다.
명문장을 베껴 쓰는 일은 그 작가에 대한 오마주다. 베껴 쓰기는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아울러 문장에 깃든 정신과 기품을 닮으려는 능동적인 마음의 발로를 보여준다. - 10쪽. 머리말 중에서
책은 장석주가 읽었던 무수히 많은 시와 소설, 수필 등의 글 중에서 마음에 되새길 만한 명문장을 다섯 개의 부분(감정을 다스려주는, 인생을 깨우쳐주는, 일상을 음미하게 해주는, 생각을 열어주는, 감각을 깨우는)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한 페이지에는 그가 추려놓은 글이, 그 옆의 나머지 한 페이지는 여백이 있어서 책을 보면서 소개된 글을 직접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서툴더라도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연필을 들고 써 보라고 옮겨 놓은 글에는 이태준의 [무서록], 함민복의 [미안한 마음], 신영복의 [처음처럼], 박형준의 [저녁의 무늬],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의 즐거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등이 있다. 때론 짧은 문장, 때론 긴 문장을 만나기도 하는데 명문장에 주눅이 드는 걸까? 기억해야 할 것들을 되도록 빨리 메모하는 것에 오래 길들여져서일까? 빈 공간에 나의 필체로 쓴다는 건 솔직히 아직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언젠가 머지않은 날에 내면을 비춰보고 마음을 돌아보듯 한 자 한 자 정성껏 꾹꾹 눌러쓰기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