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 이가서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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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봄볕이 좋았던 지난 주말, 바닷가를 찾았다. 작은아이와 한참 모래장난을 하다가 큰아이가 날리던 연을 억지로 넘겨받았다. “엄마도 한번 해보고 싶어.” 근데 어려웠다. 연이 잘 날리려면 바람의 흐름과 세기에 따라 얼레를 조절해야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얼레에 감겼던 실이 몽땅 풀어지면서 연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걸 보던 큰아이가 면박을 준다. “어, 어엄~마! 그게 머야. 나보다 못하네!!”

시를 읽은지 무척 오래됐다. 감수성 예민한 학창시절이나 20대 초반엔 시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면서 한 발짝씩 뒷걸음질 쳤나보다.  어느날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시와 엄청나게 멀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내 맘과는 달리 하늘 저 높은 곳까지 날려버린 연처럼.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없는 거리, 저 먼 곳으로 가버린 시를 어떻하지? 견우직녀처럼 까치와 까마귀를 풀어서 오작교라도 놓아야하나?

그럴때 만났다. 해맑은 웃음으로 반겨주는 표지의 소녀처럼 어색함에 주춤거리는 내 손을 살며시 끌어주는 시들을. 아름답고 다정하며 구수한 48명의 안내자들을.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이 책은 안도현 시인이 그동안 문학공부를 하면서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었던 시 중에서 특별히 아끼고 좋아하는 시들이 실려있다. 총 4부로 나누어 각 부마다 12편의 시를 선별해서 수록했는데 그 하나하나의 시마다 안도현 시인은 짤막한 글을 덧붙여놓았다. 시인을 소개하거나 그 시에서 느껴지는 정경이나 감상, 더 나아가 저자가 그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풀어놓아서 시를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또 이 책에는 김기찬 사진작가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는데 흑백이어선지 하나같이 어린 시절의 지나온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에서 여동생을 등에 업고 “똥 푸소~” 놀이를 하는 소녀와 친구들, 온갖 그릇과 병, 깡통,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까지 모아놓고 소꿉놀이를 하는 단발머리를 한 어린 기집애들, 지게 양쪽에 연탄 하나씩 지고 열심히 나르는 소년, “뻥이요~~!!”하고 큰 소리가 날 듯한 사진,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는 할머니, 우루루 담벼락에 올라앉아 만화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이런 사진들이 시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쩜 이리도 시의 분위기에 꼭 들어맞는지...이 시를 위해서 사진을 찍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촌스러움, 이런 구닥다리, 이런 케케묵음, 이런 한가로움, 이런 퇴행이 오히려 신선하게 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 50쪽.

 

물론 이 책에 수록된 48편의 시를 모두 이해할 순 없었다. 절반은 읽는 순간 가슴에 찌릿...하게 와닿았지만 나머지 절반 가까이는 안개 속을 헤매는 듯했다. 시 한 편에 자신의 인생을 고스란히 녹여낸 시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면 정말 좋으련만...십년 가까이 시를 읽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조급해하지 말자고, 차 한 잔을 마시듯 매일 시 한 두 편을 읽어보자...아이들에게 소리내어 읽어주고 시를 눈이 아니라 오감으로 느껴보자고 다짐해본다.

불혹이란 인생의 전환점에 만난 의미가 되어버린 이 책 한 권을 조금씩 야금야금 먹고서 가슴에 꼭 안았다. 그래, 이 느낌이야. 가슴 한 켠의 열기가 조금씩 퍼지는 것 같은...이걸 잊지 말자...이번엔 절대 놓치지 말자고 주문을 걸듯 몇 번이고 되뇌었다.

불혹의 첫 봄에 정말 사랑하고픈 풍경을 만났다. 이런 기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한동안 이 책은 나의 선물목록 1호가 될 듯하다.


 

 

<불혹不惑, 혹은 부록附錄  /   강윤후>  - 84쪽.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부록으로 들린다 어쩌면 나는

마흔 살 너머로 이어진 세월을

본책에 덧붙는 부록 정도로

여기는지 모른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는데

부록처럼 남은 세월이 있어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봄이 온다

권말부록이든 별책부록이든

부록에서 맞는 첫 봄이다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 좀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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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자 2008-04-1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불혹] 저 시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구요^^;;
부록으로 펼쳐질 제 2의 인생도 멋질 거라는 기대감...전 그런게 있어요.

세실 2008-05-11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불혹을 작년에 끝냈지만 아직도 제 마음이네요.
부록....살짝 서글픈 마음 들지만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요.
'목련꽃 근처에서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마음이 혹할 일좀 있어야 겠다'필이 팍 옵니다. ㅎㅎ

몽당연필 2008-05-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장 맘에 들었던 시인데 함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 책 이번 스승의 날에 선물하려고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