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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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스님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 여행기에 꼽히는 빼어난 기행 문학이다. 또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함께, 우리 겨레가, 우리 겨레의 눈으로 보다 드넓은 세계를 보고 남긴 소중한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라고  책소개가 되어 있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들어봤는데, 우리나라의 선비가 썼다는 '표해록'이라는 책 제목도 '최부'도 생소하다.  세계 3대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었는데, 어째서 나는 처음 들어본 제목처럼 느껴지는지 이상했다. 그렇게 중요하다면 어째서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없는지.... 

 

표해록은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맞아 표류했던 성종 때(15세기)의 선비 최부가 바다 위에서  당했던 최부와 일행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적은 기록이다.  제주도에 파견 근무를 나선 최부는 아버지의 임종소식에 급히 배를 띄웠다가 풍랑을 맞아 천신만고 끝에 중국에 도착하나, 그곳에서도 왜군으로 오해받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게 되지만 조선 선비로서의 기개와 높은 학식을 드러내어 오해를 풀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최부의 표해록이 가치를 갖는 이유 중의 하나는 조선인 최초로 중국의 강남을 두루 보았다는 것이다. 조선은 중국과의 왕래에 육로를 이용했기에 조선의 북쪽을 지나 요동으로 향하거나 아니면 산동을 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국의 문화와 경제가 풍요로웠던 항주나 소주 등의 강남을 본 최초의 조선인이 최부였다는 사실은 놀랍다. 조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국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접했던 부분이 지극히 좁고 편협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중국으로 오가는 그 길과 도시만이 조선이 알고 있었던 중국의 전부였다니.

우리가 붙잡고 있었던 중국조차도 중국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접하니 허탈했다. 이제 조선은 최부라는 선비와 그 일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문물,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틀을 최부라는 선비가 멋지게 확장시켜주었다면...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에서 최부는 일견 고지식해보이기도 했지만, 바다 위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어 모두들 포기하고 있을 때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독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위기에서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릴 줄도 알았고, 중국의 관료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조선의 선비로서 기개와 높은 학식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조선의 선비는 조금 비관적인 형상 - 당쟁과 당파싸움, 제도와 법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지식하고  꽉 막힌 - 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책에서 당당한 모습의 최부를 만날 수 있었다.

지구는 평평하고 네모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바다에서 물도 식량도 떨어진 그 순간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던 최부의 모습과 아버지의 장례에 상주로 참석하지 못해서 비통해 하던 모습을 보면서 희망이라는 단어와 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비록 내 기억에는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었던 최부의 [표해록]을 이제 어린이를 위한 고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해, 인물에 대해 기존의 시각과 틀에만 얽메이지 않고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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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세계 과학사
쑨자오룬 지음, 심지언 옮김 / 시그마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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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과학사인데도 철학자의 이야기, 역사나 의학 같은 분야도 꽤 등장한다. 내가 생각하는 과학은 물리학이나 천문학, 혹은 화학 같은 한정된 분야였다. 책을 통해서 과학엔 철학도 수학도 의학도 천문학도 수많은 도구와 무기들...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책의 처음에 등장한 인물들은 과학책에서 보단 철학이나 인문학쪽에서 더 자주 보았던 사람들이다. 수학자이며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하고, 과학자이자 사상가이기도 하며, 화가이며 의사이거나,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군인이거나 정치인이기도 해서 고대의 과학자는 specialist보다는 generalist에 가까운 듯 하다.  화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도를 그렸을 만큼 해부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철학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군인이고 정치가였다. 과학을 설명하는 책에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 생경스러움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부터 인문학과 과학의 분야가 이분법처럼 갈라졌는지...분야가 세분화되면서 깊게는 알겠지만 넓게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교에서 문과계열을 선택한 학생에게 과학은 그때부터 과학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책은 기원전 70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 과학과 발전사를 총망라한 과학 일대기라는 부제를 가지고,  오랜 시간 과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모르는 내용이 태반이고, 읽어도 어려운 게 너무나 많았지만 얼마 전 가족과 이집트 문명전 '파라오와 미라' 를 보러 가서 느꼈던  - 대충은 알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는 - 아쉬움을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는 해갈할 수 있었다. 

독수리 머리를 한 사람형상, 미라, 피라미드, 파피루스 등을 스치며 구경했는데, 책을 통해서 확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독수리 형상은 매였으며 태양신 '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라에 대해서도 그냥 막연하게 방부제를 뿌리고 붕대를 칭칭 감았구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미라의 제작과정은 정교하고, 고도의 기술이 요하는 작업이었다는 것도. 지금도 불가사의한 것 투성이인 피라미드를 통해 그들의 수학과 과학이 얼마나 수준 높은 것이었는지 놀라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랜 전부터 인간은 생존에만 집중했던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연구해 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의 욕구 중 가장 큰 부분은 알고자 하는 욕구가 아닐까?

 

지금의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을 했고,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나같은 기계치에게는 그 발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가기 벅차기도 하고, 너무 기계적이기 때문에 몰라도 되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도 알아야 되는 것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사람간의 소통을 점점 단절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어찌되었든 기원저 7천여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알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지금 이 늦은 시각에 리뷰를 쓰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고, 책을 읽고, 불을 켜고, 선풍기를 틀어놓고...하는 행위들의 거의 대부분에 과학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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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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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젊은 청춘에게 고하는 제언들에 하나라도 해당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를 헤아리게 된다.  이 땅의 모든 청춘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해당되리라.

 

젊은 그대여라고 말을 거는 이외수옹. 아무 것도 이룬 것 없고, 이룰 수 있을까에 수많은 의문부호를 찍을 수 밖에 없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심한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고, 나에게만 장딴지를 걸어 넘어뜨리는 세상이 싫어 세상을 등지고도 싶고, 남들은 쉽게도 다니는 직장, 학교가 나에게만 어렵고, 나만 왜 사랑이 어려운건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열등감 등으로 고민하는 우리처럼 그도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했노라고, 청춘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네. 그런 걸 고민하지도 않고, 자괴감에 빠져보지도 않고, 사랑때문에 아파하지도 않고 청춘을 통과한 사람은 없다네. 그러니, 이제 훌훌 털어버리고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여보게나. 자네는 아픈 사랑을 해보았기 때문에 사랑의 의미를 알았고, 자네는 충분히 사랑받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걸세.' 라고 말이다.

 

이외수옹께서 책을 통해 반복적으로 아름다운 청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젊음은 실패해도, 좌절해도, 자리에 주저앉아도 되는 시기이니 두 주먹 불끈쥐고 마음만 고쳐 먹는다면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도 살아볼 만 하다고, 자네의 그 고운 마음으로 한 번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보라고 한다. 세상을 나만 위해서 살지 말며, 세상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돌아보면 젊음은 얼마나 불안하고 불안정했던가. 뭐 하나 쉬운 것이 없기에 세상은 녹녹치 않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좌절했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그 시절만큼은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치열함, 열정으로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젊음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나고 보면 그 방황과 불면의 시간조차도  좌절조차도 소중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젊음은 불안정하고 미성숙하고 미완성인 시기이기에 불안하고, 불면의 나날을 보내지만, 그러기에 무엇이든 될 수도 있으며, 부모로부터 하나의 온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찬란한 시기일 것이다. 누군가의 배우자도 아닌, 누군가의 부모도 아닌,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그 때 뿐이라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나만을 위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 시간들이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외수옹님처럼 젊은 청춘들에게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그대여,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 <p.274> 라고.

 

=== 책에서 ===

나뿐인 놈이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쁜 놈이다. 누구든  '나뿐인 놈'으로서의 근성만 없앤다면 그 자체로 성인군자나 다름이 없다.... 그대가 욕망에 기인해서 실의를 느꼈을 때, 그대가 욕망에 기인해서 분노를 느꼈을 때, 그대가 욕망에 기인해서 환희를 느꼈을 때, 그대가 욕망에 기인해서 증오를 느꼈을 때, 그대 역시 '나뿐인' 존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욕망은 '나뿐인 인간'을 양산하기 위해 악마가 보낸 사육사이다. <p.110~111>

 

그대여.

희망에도 순리와 법칙이 있다. 그러나 욕망은 언제나 순리와 법칙을 위반한다. 숯덩어리가 불덩어리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희망이지만 숯덩어리가 금덩어리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욕망이다. <p.140>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슬퍼해야 할 때는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 되라. 기쁨이 있으면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이 있으면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이 되라. ...그대도 천수를 다할 때까지 천지만물을 눈물겹게 사랑하고 그대 자신을 눈물겹게 사랑하라.용기를 가져라. 분연히 일어나라. 그대는 젊다. <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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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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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젊은 음악인과 노시인의 소통이 부러웠다.  노시인과 그의 아들보다도 어린 젊은 청년이 나누었던 진솔한 대화들은 읽고 있는 내내 행복했고 즐거웠다. 두 사람의 편지는 조용히 흐르는 맑은 시냇물같은 느낌.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고, 기분 좋아서 잠시 그 언저리에서 마음도 몸도 쉬어가고픈 그런 느낌이었다.

 

마종기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루시드폴(조윤석)은 스위스에서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공학박사이다. 그러면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다. 그는 유럽에서 6년동안 공부를 하는 틈틈이 음악을 만들고, 한국에서 공연을 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공학도이면서 음악을 하는 청년의 고뇌와 어떤 길로 가야할지, 둘 다 끌고 가야할지, 고민하는 청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날씨와 여행,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해, 한국에 대해 느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마종기 시인은 1966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오면서 꾸준히 시인으로써의 삶도 병행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외로움, 힘들때마다 시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던 시인의 모습에서, 치열하게 사는 중간중간, 외롭고 지칠때마다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근간은 문학이었다는 시인의 말은 진실한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윤석군이 공학도의 삶을 포기하고 음악을 선택하려고 했을 때 아쉬워했고 안타까워했던 모습은 강요된 충고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조심스러운 배려이었기에 더 와닿았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시인과 30대의 젊은 청년은 때로는 시인과 독자로, 때로는 친구같은 우정을 나누는 모습으로,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인생의 대선배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을 이끌어 주는 모습으로 관계를 형성해간다. 

 

미국과 유럽, 지리적으로는 다른 공간이지만 고국과 타향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의사이면서 시인과 공학도이면서 음악인은 다른 듯 보이지만 비슷하다. 두 사람은 성격이 다른 두 분야를 놓치 못한다는 부분에서 비슷하다. 세대간의 격차가 크지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권역이 많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그 둘이 가까워지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화를 조용하고 낮게 그렇지만 진실되게 소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 서로의 마음이 와닿는데,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데,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2년여의 편지 끝에 서울에서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사적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내 마음이 가 닿는 친구를 만날 것인가? 선뜻 편지쓰기가 쉽지 않은 시절에 살고 있기에 두 사람의 소통이 부럽고, 지켜보는 내내 따뜻했다. 추운 겨울이 이제 막 지나고 창을 통해 비치는 기분좋은 햇살같은 느낌. 이 느낌이 참 좋다. 

 
[책에서] 


...겨우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 자신의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영혼의 작고 따뜻한 방을 마련하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볼품없는 시를 하나 마치고 혼자서 목소르를 죽여 가며 울었던 날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를 만드는 시인, 언어의 연금술사보다 골목길 장돌뱅이의 목소리를 더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내 시는 그래서 실체가 미처 보이지 않는 내 상실감을 채워주었고, 내게 깊고 아늑한 위로를 주었으며, 한 세월이 그렇게 지난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내 시에서 나같이 작은 위로를 받고 있는 분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가 비웃을지라도 계속 그런 진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그런 목소리에 화답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p.297...마종기>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 네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지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이것을 저를 밀어가는 힘이자 목표라고 여겼어요. <p.220...조윤석>

 

유럽의 생활에서 비판적으로 그러나 깊게 깨달은 것은 '지금'의 중요성입니다. 왜, 영어로도 현재를 'present'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어진 선물. 이 순간순간으 기쁨, 행복, 즐거움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놓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앞만 보고 인내하고 달려가라는 프로그래밍만 되어 있지, 왜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경쟁과 천박한 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민족의 DNA가 그렇게 인코딩되어 있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요......하지만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요. 제 위치에서 '재미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이 아침에 문득 해봅니다. <p.223...조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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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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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에 갇힌 두 젊은이의 탈출기를 그린 이 소설은 초반부는 지지부진해서 고전했다. 그쪽 세상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일상과 그들에게 익숙해지니 그네들도 우리와 똑같구나. 다만,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된  사람들이란 점이 다르구나 이해하게 된다.

 

대개 우리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갖춘 그네들이 혹여 가까이 접근이라도 할까봐 두려워 피하게 된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들은 순수하고 마음이 착해서 그들이 받은 상처를 세상에 분노하고 타인을 해하기 보다  세상에게서 도망쳐 자신 안에 또아리를 틀었는지도 모르다.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된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고등학생인 수명인 그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세상과 담을 쌓는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상에 나서는 걸 두려워한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너무도 커 그 파고를 극복하지 못한 수명은 이후 정신병원에 들락거리는 삶을 이어온다. 수명의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자 아버지는 그를 수리희망병원이라는 병원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수명은 자유로운 영혼인 승민을 만나게 된다. 세상이 두려워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는 수명과 달리,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승민.  그룹 회장님의 혼외자. 외롭고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을 지르던 소년은 미국의 광활한 자연과 하늘을 날게 되면서 비로소 나를 만나게 된다.

 

"날고 있는 동안 나는 온전히 나야. 어쩌다 태어난 누구누구의 혼외자도 아니고, 불의 충동에 시달리는 미치광이도 아닌, 그냥 나, 모든 족쇄로부터 풀려난 자유로운 존재, 바로 나." (p.286)

 

그렇게 하늘을 날면서 스스로 자신을 치유해 가던 승민은 아버지인 회장님이 돌아가시면서 유산상속의 희생양이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탈출시도를 반복해가며 미쳐가기 시작한다.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p.213 )"

 

수리희망병원은 희망이 없었고, 가졌던 희망도 갈취당했던 곳. 보호자가 세상으로부터 연약한 영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낸 그곳은 보호라기 보다 세상과 단절시키는, 격리시키는 곳에 더 가깝다.  그 공간에서 수명은 희망을 품었고, 자유를 갈망했다. 바로 승민을 만나면서 수명은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승민을 통해서 그의 탈출기에 엮이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그리고,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던,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맞딱뜨리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래서 자신 안에 숨어버렸던 과거의 나에서 벗어나게 된다. 승민이 수명에게 던진 질문은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근원적이면서 자문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본질을 꿰뚤어 보게 본다. 그래, 나는 누구일까? 그 질문에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 날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날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나게 된다.

 

"가끔 궁금했어. 진짜 네가 누군지. 숨는 놈 말고, 견디는 놈 말고, 네 인생을 상대하는 놈. 있기는 하냐? (p.240 )" 

 

세상에 맞닥뜨릴 용기가 아직은 많지 않지만, 수명은 그래도 용기를 내본다. 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란 것을, 너무 많이 너무 멀리 도망쳤지만 이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는 수명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정신병원의 시계에는 숫자판이 없다. 허구, 망상, 환각, 기억, 꿈, 혼돈, 공포 따우의 이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시간은 바다처럼 존재하고 사람들은 폐허의 바다를 표류하는 유령선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쯤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들은 알 길이 없다. 의미도 없다.  자신이 서 있는 지점과 시간의 흐름이 곧 삶이 되는 곳은 반대편 세상뿐이다. (p.164)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때문이다. 갈망으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글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p.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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