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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일단 젊은 음악인과 노시인의 소통이 부러웠다. 노시인과 그의 아들보다도 어린 젊은 청년이 나누었던 진솔한 대화들은 읽고 있는 내내 행복했고 즐거웠다. 두 사람의 편지는 조용히 흐르는 맑은 시냇물같은 느낌.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고, 기분 좋아서 잠시 그 언저리에서 마음도 몸도 쉬어가고픈 그런 느낌이었다.
마종기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루시드폴(조윤석)은 스위스에서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공학박사이다. 그러면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다. 그는 유럽에서 6년동안 공부를 하는 틈틈이 음악을 만들고, 한국에서 공연을 하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공학도이면서 음악을 하는 청년의 고뇌와 어떤 길로 가야할지, 둘 다 끌고 가야할지, 고민하는 청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날씨와 여행,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와 사회에 대해, 한국에 대해 느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마종기 시인은 1966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의사로 살아오면서 꾸준히 시인으로써의 삶도 병행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외로움, 힘들때마다 시가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던 시인의 모습에서, 치열하게 사는 중간중간, 외롭고 지칠때마다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근간은 문학이었다는 시인의 말은 진실한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윤석군이 공학도의 삶을 포기하고 음악을 선택하려고 했을 때 아쉬워했고 안타까워했던 모습은 강요된 충고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조심스러운 배려이었기에 더 와닿았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시인과 30대의 젊은 청년은 때로는 시인과 독자로, 때로는 친구같은 우정을 나누는 모습으로,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때로는 인생의 대선배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을 이끌어 주는 모습으로 관계를 형성해간다.
미국과 유럽, 지리적으로는 다른 공간이지만 고국과 타향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의사이면서 시인과 공학도이면서 음악인은 다른 듯 보이지만 비슷하다. 두 사람은 성격이 다른 두 분야를 놓치 못한다는 부분에서 비슷하다. 세대간의 격차가 크지만,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권역이 많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느끼기에 충분했으며, 그 둘이 가까워지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화를 조용하고 낮게 그렇지만 진실되게 소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 서로의 마음이 와닿는데, 대화가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데,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2년여의 편지 끝에 서울에서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사적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나는, 이제 어디에서 내 마음이 가 닿는 친구를 만날 것인가? 선뜻 편지쓰기가 쉽지 않은 시절에 살고 있기에 두 사람의 소통이 부럽고, 지켜보는 내내 따뜻했다. 추운 겨울이 이제 막 지나고 창을 통해 비치는 기분좋은 햇살같은 느낌. 이 느낌이 참 좋다.
[책에서]
...겨우 나 자신을 위로하고 나 자신의 깊이 침잠할 수 있는 영혼의 작고 따뜻한 방을 마련하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볼품없는 시를 하나 마치고 혼자서 목소르를 죽여 가며 울었던 날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를 만드는 시인, 언어의 연금술사보다 골목길 장돌뱅이의 목소리를 더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내 시는 그래서 실체가 미처 보이지 않는 내 상실감을 채워주었고, 내게 깊고 아늑한 위로를 주었으며, 한 세월이 그렇게 지난 후에 주위를 둘러보니 내 시에서 나같이 작은 위로를 받고 있는 분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가 비웃을지라도 계속 그런 진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가며, 그런 목소리에 화답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합니다. <p.297...마종기>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 네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지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이것을 저를 밀어가는 힘이자 목표라고 여겼어요. <p.220...조윤석>
유럽의 생활에서 비판적으로 그러나 깊게 깨달은 것은 '지금'의 중요성입니다. 왜, 영어로도 현재를 'present'라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어진 선물. 이 순간순간으 기쁨, 행복, 즐거움을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놓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가. 앞만 보고 인내하고 달려가라는 프로그래밍만 되어 있지, 왜 지금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사람들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경쟁과 천박한 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는다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민족의 DNA가 그렇게 인코딩되어 있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요......하지만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요. 제 위치에서 '재미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이 아침에 문득 해봅니다. <p.223...조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