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생각을 벌써 쓴 적이 있지만https://blog.aladin.co.kr/hahayo/12689336 ), 한 번 더 말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

나는, 여성문화와 남성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끼리 함께 고양시키는 어떤 태도가 있다. 문화는 생물학적 성별에 귀속되는 방식이 아니지만, 생물학적 성별로 특징이 더 드러나는 식이다. 누군가를 천상 여자네,라는 식으로 말할 때, 여자,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이라기보다 어떤 성향이고, 동양의 모호한 문화 가운데서, 저 말은 생물학적인 남성에게도 쓰일 수 있다. 인간의 안에 존재하는 모순적인 태도들 가운데, 어떤 특질이 생물학적인 구분자를 은유로 쓰는 거다. 여성적이라고 표현되는 특질들이 있고, 남성적이라고 표현되는 특질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생물학적 성별그룹의 문화 가운데 우세한 어떤 특질들인 거다. 사람 하나하나는 묶지 못하지만, 무리지은 사람들로는 특질을 말하는 방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어떤 특질을 들을 때 나는 안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한다면, 비교 가운데 굳이 어떤 말을 고른다면 선택되는 방식의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그런 식의 말들에 억압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E만 가득한 세계에 속한 I 처럼 여자들의 문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남자들의 세계에 속한다고 해도 역시 또 다른 불편함이 있다. 성향 상 대세가 되는 어떤 태도에 조금씩 핀트가 어긋난다. 그건 나뿐 아니라, 모든 개인들이 조금씩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여성이란 말이, 동양인이란 말이, 한국인이란 말이, 딸이란 말이, 아내라는 말이, 엄마라는 말이, 나의 정체성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정체성들로만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젊은 나에게 주효했던 억압은 순결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에 대한 공포(https://blog.aladin.co.kr/hahayo/13052482)였다. 순결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커진다는 면에서 나는 내 자신의 순결에 대한 억압을 해소하기를 원했고, 그런 말들을 페미니즘에서 찾으면서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페미니즘의 말들이 고양시키는 태도들이 나의 태도들과 충돌한다고 느낀다. 


1. 성적인 고양

인간과 인간의 관계-남녀는 당연하고, 같은 성별까지도-를 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고양시킨다. 이건 남성적인 서양문화의 특성일 수도 억압적인 기독교문화의 특성일 수도 있다. 서양의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볼 때, "도대체, 섹스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다니?"싶은 순간들 말이다. 애건 어른이건, 동성이건 이성이건, 단 둘이 있는 어떤 공간에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조성되는 긴장감, 더하여 삽입성교로의 귀결 말이다. 

다 큰 성인 여자가, 남성의 호의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멍청하다는 식이라거나, 여자 둘이 한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성인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당신은, 그 둘이 레즈인 걸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이 동성연인을 혹시나 차별하고 억압할까봐 보호해야 한다는 어떤 뉘앙스를 만나는 순간같은 거다. 

둘이 무얼 하건, 분명하게 모르는 채라면 모르는 채로 내 맘대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드러내지 않았다면 호의는 호의, 내가 줄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줄 수 있다고 인간의 관계가 다 오해지 뭐,라는 태도로 남성의 호의를 받고, 내가 줄 수 있는 호의를 또 주면서. 

여자 둘이 한 호텔방에 들어갔다고 해서, 둘이 레즈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지. 드러내지 않았다면, 갔구나, 하고 말 일이지. 그 안에서 무얼 할 지 생각하면서 보호할지 혐오할지 입장을 정해야 할 일이냐 말이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성의 호의가 우정일 수도 있고, 여자 둘이 덕질하느라 호텔 방에 갈 수도 있지. 성적인 긴장들이 싫어서 일찌감치? 결혼하고 속 편한 나는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들어앉았는지 모든 인간관계를 성적으로 고양시키는 지금의 어떤 페미니즘의 태도가 피곤하다. 


2. 위계의식의 고양

읽지도 않은 책들인데, 의문이 생긴다. 

어떤 일이 더 중한가?라는 질문에 서구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들과 같은 저울을 사용하고, 그게 진리인 양 말한다. 

아이를 먹이는 일과 경제학 저술을 남기는 일. 

지금 당장 필요를 해소하는 일과 미래에 이름을 남기는 일. 

전자를 하느라 후자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을 억울해한다. 

1세계 여성 페미니스트의 위계 피라미드는 1세계 남성을 향한다. 경중을 따져 세운 자신들의 위계가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는 3세계 페미니스트의 말은, 어린 마음을 고양시키며 달려나가는 어린 페미니스트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이런 태도로, 나의 말들은 서구 페미니스트 철학자의 말들로 반박된다. 공부를 더 하세요,라는 논쟁의 끝을 그렇게 만난다. 페미니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밀한 위계를 스스로 만든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위계는 당연히 공적인 일이 위로 올라가고, 정치가와 간호사가 있다면 정치가가, 판매원과 엔지니어라면 엔지니어가, 어떤 식으로든 위계와 서열을 만들고, 그 위계 안에서 발언권의 가치를 부여하려 든다. 역시 금과옥조는 이름있는 페미니스트 학자, 나와 같이 공부한 사람들의 말, 자신이 가지는 그 태도에  위계가 고양되었으니, 상대의 말이 서구 이름있는 학자의 말과 대등하다고 사고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을 자본시장에 내어줄 뿐인 논리들을 강화시킨다. 그러고는 다시,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위계는 직업들 사이에서도 강화시킨다. 애초에 위계가 문제고, 세상이 수직이 아니라 둥근 원과 같다는 좀 더 나은 태도는 고양되지 않는다. 


3. 피해자 서사의 고양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라는 말을 반박한다. 물론 '문명사회에서'라는 '기술로 해결가능한'이라는 전제가 붙는다고 한다. 이 문명이라는 것이 어떤 비문명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인지 못 본 체 하는 것 같다. 폭력을 억누르는 강한 문명의 힘이 어떤 이야기들로 이뤄진 건지 모르는 체 한다. 비문명의 바탕 위에서 겨우 서 있는 연약한 문명 안에 살면서, 비문명의 바닥을 부수려는 것처럼 군다. 

남자와 여자는 같으므로 같은 권력을 달라고, 여성은 피해자고 무언가 권력을 배분하는 존재라도 있는 양 말한다. 권력을 배분하는 존재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나라는 존재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다. 그래서, 많은 특성들이 드러난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들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넘보지 않으려고 해 왔다. 약하기 때문에 치밀하게 반격해야 하고, 실패할 수 없어 조심스럽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고양된 여성의 성정, 여성의 교활함, 여성의 치밀함이 있다. 여성만이 피해자,라고 할 수가 없다. 남성에게는 억압이 없는가? 남성은 피해가 없는가? 다른 방식의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피해일 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지만, 남자는 정신적으로 여자보다 약하다. 나는 남자들이 유리멘탈의 고릴라,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아마도 강철멘탈의 유리동물?이라고. 남자를 정신적으로 옥죄어 조종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https://blog.aladin.co.kr/hahayo/12544871 ) 안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남자랑 나란히 걸을 때도 무서운 상상을 부풀릴 수 있다.(https://blog.aladin.co.kr/hahayo/9957536 ) 그 남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여자는 그저 나란히 걸으면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반려동물은 아픈 티를 낼 수 없으니, 주의깊게 관찰하고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조언하는 짤을 봤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는 당연히 있다. 개나 고양이도 안다. 그걸, 억울이나 부당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건 문명 이전이기 때문에, 이걸 문명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최재천의 아마존에서는 ( https://www.youtube.com/watch?v=YGDjMALcs7o ) 왜 여성살인자가 더 큰 형량을 받는지에 대해 말한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 없기 때문에 치밀하게 계획하기 때문에 우발적 살인에 비해 더 큰 형량을 받고, 항소하지 않는다. 

남자는 어떨까. 사랑이 없으면 삶이 무가치하다는 이야기 가운데 리니지의 데포르쥬는 오웬의 기사가 되고, 결혼하면 월급을 아내에게 몽땅 맡기고,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주는 서사 가운데 자신을 내던진다. 

특정하여 어떤 성별을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는데, 할 수 있다고 여성이 피해자라고. 인정하라고 한다.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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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서 빈방에 혼자 있는데, 밤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 그의 앞에 던진다. 이내 뒤를 이어 다른 귀신 하나가 따라와서 앞의 귀신을 꾸짖되 "이 시체는 나의 것인데 어째서 네가 메고 왔느냐?"하니, 앞의 귀신이 답하기를 "이것은 나의 것이므로 내가 메고 왔다"하였다. 그러나 나중의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고 하여 마침내 두 귀신이 서로 시체의 팔을 하나씩 잡고 다투다가 먼저 귀신이 이렇게 제의를 했다. 

"여기 인간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에 따라 나중의 귀신이 물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죽음을 당할 것이요, 거짓을 말해도 죽음을 당할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당할 것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 하여 사실대로 "그 시체는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중의 귀신이 화를 내어 그 사람의 팔을 뽑아 땅에 던져 버리니, 먼저 귀신이 시체의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주어 멀쩡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팔, 두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모두 시체의 것과 바꿔놓은 뒤에 두 귀신은 뽑아 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 때 그 사람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을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나의 이 몸은 몽땅 저 시체의 것이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모두 귀신에게 먹히었고, 몸이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더니,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렀는데 불탑과 스님들이 있었다. 그는 찾아가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다. 비구들이 도리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하니, 그는 "나도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소"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비구들은 그 사람이 무아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사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생각을 내었을 뿐이니, 그대 본래의 몸이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제도해 주니,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것이 때로는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너와 나를 구분하여 나가 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리이다. 


- 龍樹 造, 鸠摩羅什 譯 《大智度論》, 제12권, 《大正藏》

 용수 조, 구마나집 역 《대지도론》, 제12권, 《대정장》

p146~147, 동서양의 인간이해, 한자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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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간 이해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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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평평해졌다고들 말한다. 국경이 의미가 없고, 모두 하나로 통한다고도 말한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있고, 미국 팝문화에 열광하던 세계와 지금 한류에 열광하는 세계는 이미 하나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기이한 의문들 가운데서 이런 책들을 읽는다. 활자화된 책의 바닥에 흐르는 다른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소설은 못 읽겠어, 라고 사회과학 책을 읽던 선배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과학,이라고 이름붙인 어떤 것과 소설 사이의 간극,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간극은 스위칭이 필요하다. 생각의 지도(https://blog.aladin.co.kr/hahayo/2508428)라는 책을 읽을 때, 연구자는 실험 전에 피험자의 동양적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를 하고 질문을 한다. 사람에게는 동양적 사고도 서양적 사고도 논리적 사고도 감성적 사고도 존재한다. 그 안에서 스위칭하고 입장과 태도를 선택하는 중인 것도 같다. 동양과 서양은 어떤 사고적 특성이 좀 더 고양되는 방식으로 특정한 태도가 비대해진 두 세계 같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커다란 틈, 그 틈에 대한 이야기다. 의식의 바닥에 깔려있는 대전제, 지금 마구 섞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희랍, 기독교, 불교, 유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교과서적인 책이다. 시작하고 한참은 과학책인 것도 같다고 생각했고, 덮으면서 역시 과학이 현대의 종교라고도 생각한다. 


나중에 정리할 때 적어야지, 하고 붙인 포스트잇이 너무 많다. 그래도 정리하기로 했으니 정리한다. 


제1장 인간 존재의 근원


이렇게 해서 플라톤에 있어 우주 영원설은 부정된다. 우주는 영원히 있어온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을 가지는 것, 즉 없다가 있게 된 것이다. ~ 이는 희랍인들이 존재와 무를 서로 뒤바꿀 수 없는 절대 모순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이고 무는 무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에, 있는 것이 없게 될 수 없고, 없는 것이 있게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기본 명제이다. 그것이 존재의 원리이며, 신도 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 p41~42,(희랍)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인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인간과 신의 질적 차이의 강조, 따라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에게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접근해 갈 수 없다는 인간 유한성과 무의 강조가 기독교적 인간 본질 규정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굳이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 정통 기독교에 따르면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며 따라서 그 둘 간의 직접적 교통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둘 간의 교통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3의 매개자가 요구되며, 그가 곧 예수이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에 있어 예수의 역할은 절대적이 된다. ~이처럼 신비주의는 정통 기독교와 달리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질적 차이 그리고 피조된 것들 간의 질적 계층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둘을 매개하는 구세주 예수의 역할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예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성을 실현시킨 완전한 인간의 한 전형일 뿐이며, 인간은 누구나 다 본질적으로 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급진적 사상으로 인해 신비주의는 정통 기독교에 의해 이단시된 것이다. 

정통 기독교가 존재 전체를 계층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중세 스콜라철학의 장을 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한편으로는 희랍적 사유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희랍적 사유의 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55-57(기독교)


여기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사유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시간상으로 과거를 물어나가다가 무한소급을 끊음으로써 최초를 상정한다. 그러므로 신만이 존재했고 그 신이 우주를 만드는 '태초'가 논의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그것이다. 공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간을 확대하다가도 무한소급을 끊어 우주의 끝을 인정하고, 최소로 분석해 가다가도 무한소급을 끊어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최초의 입자적 존재를 인정하는 실체론적 사유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무한소급을 인정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최초와 최후의 경계는 그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모든 것은 무한한 순환관계 속에 있다. 무시 이래로 무명이 있고, 무시 이래로 유정이 있다. 이처럼 무한소급을 허용하므로 최초나 최후의 경계가 그어지지 않고, 경계가 그어지지 않으므로 일체의 존재는 경계지어지지 않은 것, 그 자신의 존재를 무로부터 구분지을 수 없는 것, 따라서 무라고도 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 한마디로 공이 된다.-p70-71(불교)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희랍이나 기독교와는 달리 사유될 수 없고 감각될 수 없으나 그 자체로 실재하는 순수 물질 또는 순수 질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서양의 유물론적 태도에 대비되는 동양의 유심론적 태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순수 물질 또는 순수 질료의 전제 위에 주장되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은 신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간 유정의 차원에서도 부정되는 것이다. 일체는 정신력 또는 의지적 활동성인 업력의 결과로서 생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업력이 지탱되는 유정의 식 또는 심 바깥에 그 자체 실재하는 객관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유심론적 통찰이 초기 원시근본 불교에서부터 후기 여래장 사상에까지 이어지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된다. 결국 이러한 유심론적 관점에서 불교는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마음과 세계의 이원론을 넘어서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 세간의 물질적 존재인 지수화풍을 일으키는 근본 힘을 유정의 정신적 업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중에 중생의 업력이 작용함으로써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다. -p78-79(불교)


물질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유정의 식에 대해 그 식의 경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인식한 대로의 이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아닌 다른 존재 예를 들어 개나 곤충 또는 천사에게도 바로 우리에게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p83(불교)


인간은 누구나 바르고 통하는 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 이치를 자각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앎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기를 알며 그 기의 근원이 되는 리 또는 태극을 앎을 의미한다. 즉 우주 전체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런 앎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서는 선악의 도덕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보여야 할 도덕성은 곧 인과 의이다. 전체 존재 중에 나 아닌 것이 없다고 알고 느끼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 그에 따른 공정함을 의라고 한다. -p100(유교)


제2장 인간의 본질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무제한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인간 상호간의 배려인 도덕성의 여지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이성적 만족을 좆는 욕망이 고급한 욕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지식욕을 중족시키는 것은 그대로 너의 지식욕도 채워준다. 그겅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개체성을 떠난 것이다. 즉 사적이지 않고 보편적, 공적인 것이기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원리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것만이 만인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성적 사회를 건립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26, (희랍)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자유는 신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것 등의 신체적 욕망에서 야기되는 자연필연성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곧 인간 영혼의 자유이다. 이는 곧 신체적 욕망을 벗어나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됨을 뜻한다. 그러나 영혼이 신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체를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한다.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철학이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서나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이성적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그 이성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적 욕망을 넘어서며 욕망의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한마디로 죽음의 연습이다. - p128~129(희랍)


내가 흙으로 빚어 인형을 만들었다면, 그 인형이 어찌 그 스스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신이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 역시 신에 대해서는 인형이 인간에 대해 그러하듯 한없이 미련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미련한 지혜를 내세우는 것은 더욱더 미련한 짓일 뿐이다. 창조자로서 신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으로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므로, 인간은 지혜로써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질적 차이와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적 척도와 기준, 인간적 이성과 사변 등을 모두 내버리고 전폭적으로 무릎 꿇을 때, 신이 손을 내밂으로써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p133, (기독교)


불교의 출발점은 우리의 인생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싫은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이 괴로우며, 구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 이러한 인생의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불교는 인생의 고통은 바로 집착에서 비롯되며, 모든 집착의 근저에는 곧 자아에 대한 집착, 즉 아집이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집은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즉 무명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설한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해탈이다. 고통과 번뇌의 근거인 아집으로부터의 벗어남이 그것이다. 심정적 정서적으로 번뇌를 벗어나는 해탈을 심해탈이라고 하고, 지성적 이지적으로 무명을 벗어나는 해탈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결국 해탈에 이르는 길은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깨닫는 것이다.-p141, (불교)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아의 정체성이 팔이나 다리 또는 몸통에 놓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남의 것으로 대치해도 나는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나의 머리, 즉 두뇌만은 나의 본질이기에 남의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머리를 뒤바꿨는데도 동일한 자기 의식이 유지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두 귀신을 옛 나를 먹어치우고 새로운 나를 가져다주는 과거와 미래의 두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두 귀신 사이에서 당황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이게 된다. 10년 전의 나가  더 이상 없듯이 1년 전의 나, 어제의 나, 1시간 전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런 만큼 현재의 는 어제도, 한시간 전에도 없었던 나이다. -p147-148,(불교)


마음이 현상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깨치어 아는 자, 따라서 현상에 따라 이끌리지 않고 언제나 그 마음 자리를 지키어 떠나지 않는 자가 곧 부처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차별적인 현상 세간에 매여 거기 머물지 않는 마음이 바로 해탈한 마음인 것이다. -p156, (불교)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태어난 만물은 각각 천지의 생물지심을 부여받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따라서 사람은 모두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주희朱熹, 《맹자집주孟子集註》) 

이렇게 해서 인간은 다시 자연의 일부로 이해된다. 맹자의 심이 인간을 자연적 동식물이나 자연 사물로부터 구분짓는 인간의 자연초월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주희는 그 초월적 마음을 다시 자연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주 자연 안에 그 자리를 갖지 못하는 그러한 초월적 본성은 보존하기 힘들다고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그 도덕적 마음을 우주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우주 안에 그 자리를 확립하여 우주론적으로 도덕성을 근거짓는 것이다.- p170 (유교)


제3장 인간 삶의 끝


생도 미처 모르는데, 어찌 사를 말하겠는가? 《논어》<선진>

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괴상하고 기이한 것, 귀신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건전한 삶의 자세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p179


과학은 삶의 궁극 주체인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다. 과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영혼이 남긴 흔적,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 간의 관계일 뿐이다. 즉 과학은 우리 의식 활동이 우리의 신체, 특히 우리의 두뇌 중 어느 부분의 어느 신경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한 것처럼 영혼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인식 가능하고 관찰 가능한 대상들만을 다루지만,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인식되고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인식하고 관찰하는 주체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으로 철학의 문제를 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하나인가 아닌가의 물음은 오히려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철학적 논의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p190~191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라면, 죽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되살아나는 부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활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 전체의 죽음이다. 희랍적 사유와 달리 히브리적 사유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육과 영이 분리된 두 실체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육은 죽고 영은 육을 벗어나 계속 존속한다는 영혼불멸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곧 육과 영이 하나로 되어 있는 인간 그 자체의 죽음이다. 죽음이 단지 육체의 죽음만을 뜻하고 영혼은 그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그렇게 큰 사건으로 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나방이 고치를 벗듯이, 우리 영혼이 육신을 벗는 일종의 탈바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불멸을 확신했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대해 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 죽음이란 하나의 큰 사건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라고 선포될 만큼 큰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신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의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이고, 생명의 부정이며 생명의 끝이다. 죽음을 통과하여 살아남을 영혼이 없기에, 빛도 생명도 없는 철저한 부정이며 어두움이고 절망인 것이다. -p209


한마디로 말해 불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 실체의 엄밀한 자기 동일성에 의해 성립하는 윤회가 아니라, 업에 따라 형성되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오온의 연속성에 의해 성립하는 윤회인 것이다. 오온이 불변하는 항상된 것이 아니기에 엄밀한 의미의 자기 동일성은 없지만, 인과 과 또는 업과 보의 관계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있기에 오온이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온의 윤회는 등불의 이어짐으로 비유된다. -p215


오온으로서의 자아 안에는 자기 동일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생과 내생의 연결에서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연결에 있어서도 오온에 있어 자기 동일적 실체는 없다. 두 촛불의 동일성 여부가 문제되기에 앞서 하나의 촛불에 있어서도 한 순간의 불꽃과 그 다음 순간의 불꽃은 동일한 불꽃이 아니다. 오온을 형성하는 일체는 매 순간 찰라생명하는 것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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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1화는 소금군, 후추양, 간장변호사


1화에 살짝 불편한 감정은 11화에서 훨씬 짙어졌다. 

1화에서 할머니가 때려서 할머니를 상해치상으로 형사재판에 서게 했던 할아버지는 재판 말미에 죽는다. 의처증이 있던 할아버지와 그래도 평생을 해로한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정말로 때리지 않은 것으로 드라마는 그린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에서 보이는 것처럼 의사가 그 자체를 번복할 만큼 외상이 없었다면, 재판까지 갈 수 있었을까 의심하고, 우영우가 할머니가 '죽일 의사가 없었다'를 단정하는 것에 무엇이 먼저일까 의심한다. 할머니가 경제적으로 완전히 의존하고 있으므로 상해치상으로 유죄를 받으면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 상속받지 못한다,라는 법적인 제약에 대한 인식이 먼저일까, 할머니의 죽기를 바라면서 커튼을 치는 복잡한 마음을 인식하는 게 먼저일까. 우영우처럼 법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세상에 법처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 의도를 의심하는 거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가 결국 그 할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재판에 나서는 변호사가 스스로 검투사 같은 마음으로 이기겠다고 나서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결투를 회피하는 인간인 나는, 정황을 설명하고 재판정이 없는 편이 낫다고 드라마는 아니지만 그게 더 친절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많은 걸 가렸고, 우영우는 재판에 이겼지만, 나는 공연히 작가의 의도로 죽어 나간 허염선생님(죄송합니다. 아직 환혼의 마지막화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중이라서, 환혼 속에서 그 분 배역입니다)에 마음이 쓰인 거지. ㅋ


11화에서 로또에 당첨된 남편은 조강지처를 배신하고 새롭고 사치스러운 삶은 새로운 여자와 시작하려고 한다. 로또 재판에 증인이 되었던 소이(죄송합니다. 아직 환혼...)와 조강지처의 분식집을 빠져나와 팔짱을 끼고 걷는 남자는 로또당첨금은 기여분이 없기 때문에 재산분할 대상이 아니라는 법적 자문을 받고 부인에게 이혼을 강요하는 중이다. 분식집을 뒤엎고 새로 산 비싼 차를 끌고 나서는 그 남자는 대책없이 트럭에 완전히 깔려서 죽는다. 우영우,가 의뢰인의 비밀을 발설할 수 없는 채로, 부인에게 감정이입해서는 간장 변호사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데 -나는 사실, 5화의 우당탕당 vs 권모술수,에서도 누가 권모술수,를 부렸는가에 확실히 우영우,라고 생각하고, 우영우가 법을 사랑한다면서 무언가 융통성을 발휘하려는 게 아주 보기 싫었다-, 이 모든 갈등상황을 그런 식으로 종결한다는 게 싫었다. 

작가는 아마도 보는 사람들이 이걸 통쾌해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다. 이혼하지 않은 부인이 결국 로또 당첨금을 상속받는 것이 인과응보라고 바람직하고 원하는 결말일 거라고. 그런데, 나는 결과가 그렇게 가깝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작가가 너무 편리하게 처리해버렸어,라고 그걸 원한다고 시청자를 단정했어,라고 생각했다. 

삶은 길고, 쉽고 편리한 해결은 드라마밖에 없으니, 그걸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을지 모르나, 시청자를 너무 무시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회차에 3년은 걸리는 한 사건을 끝내는 드라마의 형식 자체가 판타지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작가가 지나치게 드러나서 쉽게 종결지으려는 것에 불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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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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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기,를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https://blog.aladin.co.kr/hahayo/741410 )이라는 책으로 읽었었다. 다시 읽고 싶어서 샀다. 

고래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쓴 중국의 고담에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산월기, 이능, 제자, 명인전)에 영허, 우인, 요분록, 문자화, 호빙이 더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풍경이라는 다른 소설들(범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1923년의 한 스케치, 풀장 옆에서)가 더 있다. 역시 좋았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의 네 이야기는 좀 더 교훈이 명확한 느낌이라면, 더해진 이야기는 흔들리고 어지러운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로도 글을 쓰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도 읽힌다. 다시 읽으면서 아들에게 명인전,을 읽어보라고 '뻥이 세다'고 추천했는데,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좀 슬프다. 

문자화나 호빙은 중국의 고담으로 묶였으나, 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였다. 도자기편에 쐐기문자를 쓰는 문화를 상상해서 쓴 이야기이고, 아예 문자가 없는 초원의 사람들 가운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문자화,나 호빙이 그랬다. 문자화는 테드 창의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나 켄 리우의 '파자점술사'가 떠올랐다. 

예전에 읽을 때는 산월기의 대목이 절절했는데, 다시 읽으면서는 제자의 어떤 대목이, 이릉의 어떤 대목이 더 와 닿았다. 

식민지 조선의 풍경,으로 묶인 이야기는, 중국의 고담처럼 어디까지가 작가의 경험인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라는 건 꽤나 까다로운 정체성이라, 작가가 11살부터 16살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은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p16-17, 산월기


자로는 이러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천 근의 솥은 드는 힘센 용사를 본 적이 있다. 지혜가 천 리 밖을 본다는 지자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는 것은 결코 그런 괴물같은 비상함이 아니다. 단지 가장 상식적인 것이 완성된 모습이다. 지정의의 각각에서 육체적인 모든 능력에 이르기까지 실로 평범하게, 그러나 실로 곧게 발달한 훌륭함이다. 하나하나의 우수한 능력이 전혀 돋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함과 부족함도 없이 균형 잡힌 풍부함을, 자로는 실로 처음 보았다. 활달하고 자유로워 조금도 도학자 냄새가 없는 것에 자로는 놀랐다. 곧 자로는 이 사람이 도인이라고 느꼈다. - p82-83, 제자


그러다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하나의 문자를 오랫동안 노려보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그 문자가 해체되어 의미가 없는 하나하나의 선의 교차로만 보이게 되었다. 단순한 선의 집합이 왜 그러한 소리와 그런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노학자 에리바는 난생처음으로 이런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지금까지 70년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간과했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도 않고 필연도 아니었다. 그의 눈을 덮은 하나의 막이 비로소 벗겨졌다는 생각이었다. 단순하게 흩어진 개별의 선에 일정한 소리와 일정한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때, 노박사는 주저 없이 문자의 정령이라는 존재를 인정했다. 사람의 혼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손, 다리, 머리, 손톱, 배 등이 사람이 아니듯, 하나의 정령이 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단순한 선의 집합이 소리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 "문자의 정령이 인간의 눈을 먹어버리는 것은 마치 구더기가 호두의 딱딱한 껍질을 뚤고 들어가 속의 열매를 먹어치우는 것과 같다"라고 에리바는 새 점토의 비망록에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쓸 수 박에 없었다. "문자의 해악은, 인간의 두뇌를 망가뜨리고 정신을 마비시키는 데 이르므로 매우 곤란하다."- p172~173, 문자화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조 군은 사실(자신이 반도인이라는 것보다도) 친구들이 그것을 항상 의식하며 동정적으로 자기와 놀아주고 있다는 점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때로는 그가 그러한 의식을 하지 않게 하려는 교사와 우리의 배려까지 그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즉, 그는 스스로 그것에 구애받고 있었기에 역으로 밖으로 드러난 태도에서는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 자신의 이름을 밝히거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p198, 범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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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7 0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22-08-27 07:17   좋아요 0 | URL
맘에 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