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월기,를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https://blog.aladin.co.kr/hahayo/741410 )이라는 책으로 읽었었다. 다시 읽고 싶어서 샀다. 

고래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쓴 중국의 고담에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산월기, 이능, 제자, 명인전)에 영허, 우인, 요분록, 문자화, 호빙이 더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풍경이라는 다른 소설들(범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1923년의 한 스케치, 풀장 옆에서)가 더 있다. 역시 좋았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의 네 이야기는 좀 더 교훈이 명확한 느낌이라면, 더해진 이야기는 흔들리고 어지러운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로도 글을 쓰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도 읽힌다. 다시 읽으면서 아들에게 명인전,을 읽어보라고 '뻥이 세다'고 추천했는데,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좀 슬프다. 

문자화나 호빙은 중국의 고담으로 묶였으나, 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였다. 도자기편에 쐐기문자를 쓰는 문화를 상상해서 쓴 이야기이고, 아예 문자가 없는 초원의 사람들 가운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문자화,나 호빙이 그랬다. 문자화는 테드 창의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나 켄 리우의 '파자점술사'가 떠올랐다. 

예전에 읽을 때는 산월기의 대목이 절절했는데, 다시 읽으면서는 제자의 어떤 대목이, 이릉의 어떤 대목이 더 와 닿았다. 

식민지 조선의 풍경,으로 묶인 이야기는, 중국의 고담처럼 어디까지가 작가의 경험인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라는 건 꽤나 까다로운 정체성이라, 작가가 11살부터 16살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은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p16-17, 산월기


자로는 이러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천 근의 솥은 드는 힘센 용사를 본 적이 있다. 지혜가 천 리 밖을 본다는 지자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는 것은 결코 그런 괴물같은 비상함이 아니다. 단지 가장 상식적인 것이 완성된 모습이다. 지정의의 각각에서 육체적인 모든 능력에 이르기까지 실로 평범하게, 그러나 실로 곧게 발달한 훌륭함이다. 하나하나의 우수한 능력이 전혀 돋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함과 부족함도 없이 균형 잡힌 풍부함을, 자로는 실로 처음 보았다. 활달하고 자유로워 조금도 도학자 냄새가 없는 것에 자로는 놀랐다. 곧 자로는 이 사람이 도인이라고 느꼈다. - p82-83, 제자


그러다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하나의 문자를 오랫동안 노려보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그 문자가 해체되어 의미가 없는 하나하나의 선의 교차로만 보이게 되었다. 단순한 선의 집합이 왜 그러한 소리와 그런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노학자 에리바는 난생처음으로 이런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지금까지 70년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간과했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도 않고 필연도 아니었다. 그의 눈을 덮은 하나의 막이 비로소 벗겨졌다는 생각이었다. 단순하게 흩어진 개별의 선에 일정한 소리와 일정한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때, 노박사는 주저 없이 문자의 정령이라는 존재를 인정했다. 사람의 혼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손, 다리, 머리, 손톱, 배 등이 사람이 아니듯, 하나의 정령이 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단순한 선의 집합이 소리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 "문자의 정령이 인간의 눈을 먹어버리는 것은 마치 구더기가 호두의 딱딱한 껍질을 뚤고 들어가 속의 열매를 먹어치우는 것과 같다"라고 에리바는 새 점토의 비망록에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쓸 수 박에 없었다. "문자의 해악은, 인간의 두뇌를 망가뜨리고 정신을 마비시키는 데 이르므로 매우 곤란하다."- p172~173, 문자화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조 군은 사실(자신이 반도인이라는 것보다도) 친구들이 그것을 항상 의식하며 동정적으로 자기와 놀아주고 있다는 점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때로는 그가 그러한 의식을 하지 않게 하려는 교사와 우리의 배려까지 그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즉, 그는 스스로 그것에 구애받고 있었기에 역으로 밖으로 드러난 태도에서는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 자신의 이름을 밝히거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p198, 범 사냥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8-27 0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22-08-27 07:17   좋아요 0 | URL
맘에 드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