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차차차, 재방을 보고 있었다. 남편도 아이도 있는 거실에서 나만 집중하는 드라마기는 하지만, 그 장면은 남편도 아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얼른 돌렸다. 그 건 거의 둘째 아이 산달이 다 된 보라 엄마가 남편에게 신발끈을 묶어달라고 하는데 거절당하고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남편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바로 다시 묶어주려고 하면서 '얼른 아기가 나와야지, 그래야 좀 편하지'라고 말한다. 임신기간 내내 이런저런 원망을 쌓았던 임산부는 '편해질 거'라는 말에 '아기가 나오면 밤에 잠도 못 자고 젖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되는데 그게 할 소리냐' 라면서 폭발한다. 언제나 다음은 더 낫겠지,라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남편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나는 그 임산부의 원망이 너무 길어져서 어, 어, 어, 라면서 못 보겠네, 라고 채널을 돌렸다. 남편도 아이도 듣게 해서는 안 되는 원망이다. 나는 거기서 보라엄마가 하는 말이 '내 복에 살지요'에 어리석은 아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덕에 너희들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느냐,라고 말하는 아비. 아첨을 바라는 아비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의 노고를 알아달라, 그러니까 내게 잘해라,라는 의도의 말들일 텐데, 과연 그렇게 전해질까. 그 말을 듣는 아이나 남편은 순순히 그렇게 들을까. 그렇게 듣는다고 해도 상대가 원하는 '잘하는 것'과 스스로가 하고 있는 '잘하는 것'사이에는 괴리가 너무 커서 정작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말이다. 나한테 좀 잘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도와 다르게, 그 말을 듣게 되는 아이는 나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짐이구나,라고 느끼지 않을까? 남편은 내가 공연히 나의 만족을 위해 아이를 원했던 건가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사랑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도와 다르게 전해질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아이를 원했다. 아이에 대해 내 아이,라는 강경함이 있어서, 아이를 막 낳고 시가에서 들은 '고맙다'는 말도 삐딱하게 듣고-이건 당시 또래의 엄마들에게 조사도 했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대답을 많이 들었다. 내 설문조사가 그렇게 설계되었을 수도 있다. 그 때 좋은 말은 '축하한다' 나 '반갑다'-, 남편이 아이를 야단칠 때는 화가 난다. 아이를 내 것으로 여기는 나의 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걸 또 알아서 경계하는 마음으로 주의하고 있다. 

살아갈수록 말하는 게 쉽지 않다. 원래도 재밌게 말 잘 하는 사람인 적은 없지만, 늘 재밌게 말하는 사람들을 선망해왔다. 재밌게 말하려면 듣는 사람들을 고려해 말의 결들을 바꿔야한다. 엄마들끼리 웃을 수 있게 과장도 섞고 좀 더 센 표현들을 선택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좋겠지.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서나 남편 앞에서 할 수 없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각각의 순간에 다른 방식으로 하는 말들도, 결국 꼭 한 사람의 청자, 바로 내가 듣고 있어서 쉽지가 않다. 내 마음의 작은 조각을 부풀려서 재미나게 들려준 것일지라도, 듣고 있는 내가 있어서, 이걸 아이 앞에서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듣고 있어서, 나는 어딘가 내 자신이 어그러진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결국 재미없게 들리는 민숭맨숭한 말들을 겨우 하는 재미없는 아줌마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구석1열에서 21세기로 새로 만든 영화 킹리어를 소개한 적이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1APc7OK_XBw 

보면서, 나는 세상의 아버지들이란 참, 이라고 비웃었다. 

딸들을 앉혀놓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아첨을 바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나도 안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전래동화다. 

세 자매를 앉혀 놓고 아버지는 '너희들이 누구 덕에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느냐?'라고 묻는다. 큰 딸이나 둘째 딸은 '아버지 덕'이라고 말하고, 셋째 딸은 '내 복'이라고 말한다. 내 복,이라고 대답하고 쫓겨난 딸이 가난한 숯장이와 결혼해서 숯가마의 금덩이를 발견해서 부자가 되어, 가난해진 부모를 다시 만나 봉양하는 이야기다. 


비극의 결이 다르고, 나는 자신만만한 어린 딸로 '내 복에 살지요'라고 대답하는 셋째 딸을 좋아했다. 지금 부모가 되어서도 역시 내 복에 산다는 그 자신만만한 셋째 딸을 좋아한다. 


아첨을 바라는 아버지의 의도와 다르게 실상은 어쩌면 각자 '내 복'에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아첨을 바라고 자신의 공을 딸에게 치하받기를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만,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각자의 삶이고, 각자의 삶은 모두 따로다. 부모의 공덕은 물론 있지만, 바랄수록 우스워지는 게 부모의 덕이고, 부모가 져야 하는 자식 삶의 무게는 이미 없다. 다 그저 내 복에 산다. 그걸로 충분하다. 

말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데, 도대체 아첨을 바라는 아버지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티비부인에,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나는 이걸 이선옥님의 안내메일을 받고 유튜브로 봤다.

http://leesunok.com/archives/2840

여기서 보고는 유튜브로도 가서 댓글들도 봤다. https://www.youtube.com/watch?v=3EtCmXpaMCk

장혜영의원의 입장문을 보고도 나는 페미니스트들과 의견이 달랐고,

https://blog.aladin.co.kr/hahayo/12343250

낙태와 관련해도 나는 달랐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2210402

이런 저런 과정에서 나는 더이상 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지 않는다.

 

협상의 테이블에 앉을 때, 상대와 나는 동의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국가 간 협상이라면 '전쟁은 안 돼!'라는 정도의 공감대, 국가 내 이익단체 간의 협상이라면 '국가는 필요하고, 국가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정도의 공감대는 있어야 협상이라는 걸 할 수가 있다.

국가가 망하던지 말던지, 뭔 상관이야, 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어떤 결정에 함께 할 수 있을까. '국가는 필요하고, 국가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에는 동의하지만 의제 안에서, '약자는 바로 나!!!!'고 인정하지 않는 너는 나쁜 거라고만 주장한다면 그게 국가라는 이 다양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말이기는 할까? 그 사람을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해야 할까? 뭐라도 그 사람에게 국가를 운영하게 해야 할까?

 

백분토론에 이선옥작가의 말들이 나의 어떤 답답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 같아서 좋았다. 책들로 여러 번 정리한 간결하고 분명한 말들을 여러 사람들이 들었으면 좋겠다.

토론자로써 우석훈 교수나 장혜영의원은 너무나도 준비도 안 되어 있고, 논리도 빈약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당( https://www.youtube.com/watch?v=LWBM33mmx0c )을 봤다. '경계선'과 '포제서'라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경계선'을 소개할 때만 봤다. 보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계속 생겼다. 인간이 아닌 트롤, 인간과 동물사이의 존재, 동물과 인간 사이의 존재인 트롤, 들로 계속되는 묘사가 거슬렸다. 

좋아해서 아무 말도 못 쓴 책 중에 하나인 산해경에서 사람의 범주들에 놀랐던 적이 있다. 인간,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 '이 곳 사람들을 보면 얼굴은 사람얼굴과 비슷하지만 새부리가 달려 있어 고기를 잡기에 좋다'-환두국 사람-, '이 곳 사람은 피부가 숯처럼 까맣고 장생불사한다'- 불사민국 사람-,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겨서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이나 달려있다.'-삼수국 사람-, '삼신국 사람은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셋 달려 있다', '일비국 사람은 팔이 하나뿐이고 눈도 하나에 콧구멍도 하나다.' '반체국 사람은 비록 팔은 하나지만 2명이 몸을 나란히 붙이면 비목어와 비익조처럼 함께 걸을 수 있다'.... 산해경을 읽고 있을 때, 이비에스 지식채널 e- 이상한 쇼 (https://www.youtube.com/watch?v=iG-r37qH4cI - 가슴과 엉덩이가 큰 아프리카 부족의 여인이 프랑스의 쇼에서 전시되다가 사창가를 거쳐 해부되어 126년 만에 고국에 돌아가는 슬픈 서사가 있다)를 봤기 때문에 그 대비가 더 극명했던 걸 수도 있다. 

아이가 '인간도 동물이냐?'고 물으면 나는 '동은 움직일 동'이거든, 인간도 움직이니까 당연히 동물이지,라고도 대답할 거다.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과학적 발달을 더디게 했다는 동양의 한자문화권 안에 사는 나는, 서구인이 언어가 가지는 한계 때문에 human과 animal을 구분해내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영화 클립 안에 트롤은 왜 인간이 아닌가? 왜 살아있는 벌레를 먹어서? 얼굴이 못 생겨서? 후각이 예민해서? 동물과 교감해서? 도대체 왜? 계속 묻는 거지. 산해경 속에서 머리가 셋이어도, 몸통이 셋이어도 팔 하나에 눈 하나에 콧구멍이 하나여도 사람이라고 되어있던데, 도대체, 서양사람들은 저런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생각하는 거다. 

human과 animal 사이에 ape가 있었다가-지식채널 e 이상한 쇼,에서 서구인들은 그 여인을 진화한 유인원이라고 보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찾기 위해 해부했다고 한다-, 이제 트롤이란 걸 개발했나보네,라고 생각했다. 경계에 대해 질문하는 좋은 영화라는 소개가 무색하게도 나는, 전형적인 서구인의 태도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5-14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구인들의 기본 인식체계가 일단 분류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거 같아요. 동양적 세계관과는 차이가 많이 나죠. 움직이는건 다 동물이니 사람도 동물이라고 아이와 얘기하는 모습에서 아 그렇구나싶기도 하네요. 글 읽으면서 동의할 부분이 많아 잠시 인사하고 갑니다. ^^
 

이제 현대인은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건가.

서울우유 광고를 놀라면서 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Zug213xufI

링크를 찾아 유튜브를 검색했더니 댓글은 사용중지되어 있다. 


젊은 부부를 아이가 깨운다. 명랑하게 깬 아이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는 부모를 깨운다. '일어나! 나 학교 가야지'라며 부모를 깨운 아이는 명랑하게 웃으며 우유를 내밀고, 셋은 함께 집을 나선다. 짧은 티비광고가 아니라, 30초짜리 풀버전에 부모는 모두 출근을 한다.

나는 출근을 해야 하는 부모가 아이가 깨울 때까지 자고, 아이가 건네는 우유를 마시는 데 놀란다. 아이가 건네는 우유를 마시면서 아이에게 고맙다고 가볍게 아이를 토닥이는 부모를 신기하게 본다. 그런데, 4초짜리 버전https://www.youtube.com/watch?v=wDp161f2h283 )에 달린 댓글에 또 한 번 놀란다. 아이가 '나 학교가야지'라고 짜증내면서 깨우는 목소리가 싫다면서 그렇게 깨우면서 달랑 우유를 내민다고 광고에 대해 말한다. 에????그럼 아이가 부모를 깨우고 한 상 차려 먹여야 하는 건가? 사람들은 도대체 아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저 내가 아니기만 하면, 되는 건가. 부모에게 돌봄을 받으며 자랐을 저 젊은 부부는 이제 아이를 낳아 아이의 돌봄을 받기를 기대하는 건가. 저 광고가 공감을 받는다는 건 무엇에 대한 것인가.


나는 어렸을 때 불교는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해서 싫다고 했었지만, 이제 삶이 고통의 바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몫의 짐들이 무거워져서, 아 그래서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구나, 하루 하루 깨닫고 있다. 그 와중에 내 젊은 날의 많은 말들이 어른의 짐을 오해한 말들, 불가능한 말들,이었던 것 같아 후회되기도 한다. 나의 취향을 드러내어 요구하는 것이, 더 많은 낭비를 불러온다는 자각도 들고(https://blog.aladin.co.kr/hahayo/11946079) 정말 그게 옳았던가, 생각도 많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에 책임이 따르고, 내가 그 책임을 어떻게든 감당해보겠다는 태도도 있다. 그런데, 저 광고 속의 부모들은 어떠한가. 뭔가 부모라면 늘 하는 상상이거나 바램, 헛되지만 혼자서 킬킬댈 수는 있는 그런 부끄러운 상상을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낼 만큼 자신이 받은 돌봄에 대해 '아이도 할 수 있는데 내가 하기는 싫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부모인 자신은 매일 매일 지쳐서 깨지 못할 만큼 힘들지만, 자신의 아이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자라면서 감당할 수 있는 괴로움의 크기가 또 커지는 거라면, 아이에게는 아이 몫의 괴로움이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아이를 그리는 걸까. 부모가 깨우고, 부모가 주는 밥을 먹고, 부모가 챙겨서 옷을 입고 학교에 가도, 아이는 아이 몫의 괴로움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건데, 광고 속의 아이가 너무 예쁘게 웃어서 어른이 보고 싶은 아이가 저런가 싶어 슬펐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추풍오장원 2021-04-28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