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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를 봤다. 아이를 가지고 싶은 여자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남편이 고민이라고 출연했다. 

세 쌍둥이를 키우느라 애쓰는 여자가 남편의 무심함이 고민이라고 출연했다. 

안녕하세요,를 보고 본 콘택트, 속 언어학자는 아이의 삶과 죽음을 모두 아는 채로도 그 삶을 따라 걸어간다. 

사자소학,을 따라 쓸 때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너무 멀리 가지 마라'라는 글귀를 보며 쿵 가라앉았던 내가 생각났다. 

돈도 많이 들고, 키우기도 힘들고 차라리 강아지를 키우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안녕하세요,의 남편을 보고 있자니, 내일의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되묻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내가 내일 과연 살아있을지를 나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상태로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는 거라고. 아이의 전부를 내가 책임지지 못한다고. 

세 쌍둥이를 아내가 키우는 동안, 자신의 어머니가 양육비에 보태라고 준 돈으로 자신의 장난감을 사들이는 남편에게는 시간이 지나가고 당신은 알 수 없는 깊은 사랑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어려움 없이 취하는 행복 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새로운 기쁨에는 새로운 댓가가 필요하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콘택트 속 언어학자의 삶을 아프게 쫓으면서는 왜 여성일 수밖에 없는가 생각했다. 여성일 수밖에 없다.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선택은 무모하기 때문에,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 어리석다,는 것이 이런 거라면 여성은 어리석은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것보다 위대한 어리석음,이라고도 생각한다. 

사자소학,의 글귀는 나의 두려움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고마웠다. 세계를 여행하는 젊은이들의 말이 넘치는 순간에, 당장 내 눈 앞에서 멀어지는 아이 때문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부모의 나약한 마음을, 아, 그래 알고들 있어, 싶었다. 알고 있고, 그 마음을 아이에게 가르쳐주다니 고맙구나, 이런 마음이 되었다. 

부모가 되는 것은 새롭고 놀라운 어쩌면 모험,이다. 길고 느리고, 시시각각 변화하고, 원한다고 해서, 늘 가능하지도 않은 두려운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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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카고를 단체관람하러 가는 버스에서 노래가 좋아,를 봤다. 

'노래가 좋아'에 나온 가족은 아이 넷의 가족, 열한살부터 두살 터울의 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는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마흔 넘어 시작한 발레로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지금은 학원을 운영하고 팀 이름은 '엄마의 인생 2막'이다. 가족들이 다 함께 부른 노래는 맘마미아의 도나가 부르는 '머니 머니 머니'다. 나는, 엄마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하며 아이들이 참 이쁘네,하며 보다가, 노래를 들으면서 뜨악해했다. 뮤지컬 넘버는 그 자체가 완결되지 않아서, 젊은 날의 어리석음을 묘사하는 노래였을 것이다. 뮤지컬의 마지막순간까지 그런 정서는 아닐 것이다. 아, 나는 맘마미아를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노래를 아이들에게 한 순간이라도 부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시 모르겠다. 왜 그 노래를 부르는지, 그림이나 상황은 알겠다. 훈련되지 않은 가족 모두가 한 번이라도 입을 뗄 수 있는 신나는 노래라서 골랐을 거다. 그런데 내용은 '부자가 최고'라는 '돈 많은 남자를 만나야지'라고 부르는 그런 노래. 

의미는 없어, 인기상을 받으려고 고른 노래야,라고 생각하지만, 계속 생각이 나는 건 시카고가 또 그런 이야기라서 일 거다. 꽉 차는 밴드의 음악도 좋고, 무희들의 춤들도 파워풀하고 좋은데, 나는 그 이야기가. 이야기가. 싶은 거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서, 꿈을 쫓는 순진한 처녀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지만, 살인자가 된다면 스타가 될 수 있어요,라는 기이한 이야기를 보고는 그 의문들이 강화되는 거다. 

아니야, 그런 세상이 미친 거라고 빈정거리는 거라고. 

어리석음을 묘사한 노래라니까, 끝까지 본다면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사실 이건 맘마미아,를 안 봐서 아예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 역시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하다고. 그런 이야기들은 부도덕하다고. 


고리타분하고 뭘 모르는 사람이 되어, 그림이 멋지고, 노래가 멋지고, 너무 좋아서 계속 흥얼거리면서도, 그림 속의, 노래 속의 메시지가 괜찮은 건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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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는 형님에서 헬로비너스의 나라가 나왔다. 

'나를 맞춰 봐'에서 나라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무서운 일들, 을 말했다. 

문제는 중학생 때 예뻐보일려고 심각하게 나쁜 눈에도 안경을 벗고 만난 바바리맨과 겪은 일이었고, 이어진 에피소드는 연습생 시절 늦은 밤 택시를 잡으려다가 만난 무서운 택시에 대한 이야기였다. 택시는 정말이지 듣는 나도 무서워서 깜짝 놀랐다. 미안한 마음에 부모님께 연락하지 못했던 어린 연습생이, 새벽 한적한 외딴 길에서 빈차 LED가 뚝뚝 끊어져서 빛나는 택시를 만나서 무서워하면서 승차를 거부한 이야기다. 욕을 실컷 듣고 떠난 택시의 뒷 번호판은 청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고 했다. 

큰일날 뻔 했다고, 참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김희철이 그래서 참 어려울 때가 있다고. 밤길에 내가 뒤에 걷게 될 때 앞서 걷는 여자가 뒤도 못 돌아보는 그 여자가 얼마나 무서울지 아니까, 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전화하는 척도 해 본다고. 나는, 김희철이 그 심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데 조금 감명을 받았다. 


젊은 여자가 있다. 

예쁘고 싶어 안경을 벗고, 바지를 내린 바바리맨을 보고도 '뭐야, 안 보여'라고 말해버린다. 하고 싶은 일을 가끔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쫓느라고, 새벽 한적한 길에 혼자 서서 택시를 잡으려고 한다. 그래도, 알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덕분에 다행히도 살아남았다. 꿈도 이뤄 저기 티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경험들을 듣는 나이 든 남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공감한다. 

상대를 보고 이야기를 하면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은 이런 나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모든 사람들이어야 하고, 가능한 수준의 지지를 끌어모아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의 범주를 크게 크게 넓혀야 한다. 아, 그건 좀 제 생각과 달라요,가 그 사람을 배제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혼자서 살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모아서도 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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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누가 만드는가. 

티비를 보기보다, 읽는 나는, 골목식당 기사(http://ize.co.kr/articleView.html?no=2018062523407257066)를 보았다. 이미 욕먹는 기사들을 보았던 터라-원테이블 식당 주인이, 장어집 주인이, 국수집 주인이 태도가 불량하고, 기본이 안 되어 있고, 자세가 안 되어 있다!!!!- 가끔은 인터넷 펀 게시판에 분노 캡쳐도 보았던 터라, 사람들의 흥분이 분노가 오락이라는 생각을 했다. 


욕을 하고 나면 우월감을 느낄 수 있지만,  내 앞에 닥쳤을 때 '하 뭘 못하겠어'라는 기분이 된다. 

그래서, 하고 싶어도 참는 거다. 

지금 인터넷에 욕을 신나게 쓰는 누구도, 자신이 가게를 열고 싶을 때가, 식당을 할 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 알 수가 없는 게 아닌가. 

 

욕을 하고는 잊지 못해서, 내가 그러지는 말자고 마음 먹으면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다. 다 늦게 아 그 때, 욕하지 말 걸 하는 기분이 되는 거다.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니, 신나게 욕할 수 있었던 어린 날들이 지나고, 이제 부모도 되었고, 직장생활도 이십년이 넘었고, 어떤 사회나 제도에 내 책임도 있구나, 싶은 날들인지라, 이렇게 흐리멍덩하고 애매모호한 태도가 되는 것인가, 싶다. 


어디서든 가혹한 심판자가 되어, 심판을 한다. 

그러고 나면, 자기 자신은 아무렇지 않은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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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책으로 읽은 뒤라, 드라마를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6학년인 딸아이가 완전 재밌다고, 관심을 보이길래 같이 보게 되었다. 책을 썼던 판사가 아예 대본을 쓴다는데, 나는, 아, 남자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완성형의 몃진 여자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런 여자가 아니라서 그 여자 판사에 이입이 안 되었다.

선배 여자 판사가 유산을 했다. 성공을 갈망하는 자신의 상사가 반기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도 못한 채였다. 유산한 그 선배 판사가 너무 안쓰러워서, 여주인공 여자 판사는 그 선배 판사의 상사를 처벌해야 한다는 서명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그 선배의 슬픔에 이입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유산의 책임을 그 상사에게 돌릴 수 있을까, 것도 역시 모르겠다. 


여성은 예민한 감각을 훈련한다.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거나, 양육하는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거나, 혹은 절대적인 힘의 열세 때문이던지, 상대의 기분을 알아채고, 말하지 않아도 물어볼 만큼-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분을 맞춰 조심할 수 있을 만큼이 된다.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하면서 그런 감각-눈치?-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우선순위를 자기 안에서 세워두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상한다. 

그 상사는 수시로 부하인 여자 판사에게 '여자들은 데리고 일하기 힘들어''이제 곧 출산할 거 아냐'라고 눈치를 줬겠지만, 상황만을 절단해 보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일을 시킨 것 뿐이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의 강경함이 자신을 지킨다는 생각만 커진다. 


타인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그저 말인데도 나를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칼이 되어 오는 말들에 자기 자신이 설득당하고 나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조직에 속하면서 엄마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성별분업이 여전하고, 조직은 한없이 빡빡해진다. 여성이 조직에 살아남는 것은, 조직의 문화가 바뀌는 것은 정말 요원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날들이 많다. 


예전에 세종청사 공무원 엄마가 과로사했을 때, 기고했는데 실리지 못한 글을 붙여놓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내 몫을 하려는 거였다. 3년 씩 휴직하는 후배들을 말리고 싶어서, 휴직,만을 제도로 보는 정치가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일하는 여성들을 둘러싼 수없이 많은 담론들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그 어리석었던 여성이었고, 그 단계 다음에 지금 세 아이의 엄마로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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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청사의 공무원 엄마가 과로사하고, 육아휴직3년을 법제화하겠다는 대선주자의 공약을 보았습니다. 그 엄마는 이미 3년의 육아휴직이 가능했고, 제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보건복지부 공무원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인 저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을까 생각했습니다. 세금을 받아먹고 하는 일이 없다고 어디서건 욕먹을 각오는 해야 하는 직업이니 언제나 사람이 부족했을 겁니다. 할 일은 많은데도, 사람은 없고, 그런 상황에 아이를 낳아 육아휴직까지 했으니 죄책감이 컸을 겁니다. 여전히 임신이나 출산에 퇴직원을 요구하는 회사들이 있고, 법정 육아휴직도 지켜지지 않는 문화에서 휴직하고 복직할 수 있는 자신의 직장이 고마웠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도 더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저는 육아휴직 기간을 늘리기 보다 육아기 단축근로를 더 많이 선택할 수 있도록, 지금의 제도가 정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아이를 낳고 3개월 출산휴가만 마치고 복직했던 저는 제 자신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멋진 직장인, 프로다운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담론 속에서 스스로도 그렇게 서른 두 해를 살다가, 아이가 생겼다고 그 사고방식이 금방 바뀌지 않습니다. 회식을 먼저 빠져나오면서도, 출장이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위축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위축되는 순간들에 일과 가정을 이어가면서, 아이를 키우려면 회사가 나라가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을 단련했습니다. 

육아휴직을 길게 사용하면 직장에서 엄마들이 사라집니다. 직장에서 사라졌던 엄마들은 휴직을 마치고, 예전과 똑같이 일할 수 있다는 용맹한 마음으로 일터에 돌아와 똑같이 일하려고 합니다. 직장의 문화는 바뀔 필요가 없고, 똑같이 일할 수 없는 엄마는 괴롭습니다. 
지금의 법은 8세 미만의 영유아를 양육하는 남녀 직장인에게 1년의 육아휴직 또는 육아기 단축근로를 보장합니다. 육아휴직 대신 육아기 단축근로를 선택해서 그 기간 동안 단축된 시간만큼 줄어든 급여를 수령했습니다. 휴직보다 출근하는 게 좋아서 단축근로를 했지만, 육아기 단축근로가 육아휴직과 같은 기간만 허용되는 걸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8시간 노동을 가정해서 1년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면, 2시간 단축한 나는 4년 단축근로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더 많이 육아기 단축근로를 택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했습니다. 8세 미만의 영유아를 양육하는 남녀 직장인에게 1년의 육아휴직 또는 18세 미만의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는 남녀 직장인에게 1년에 준하는 육아기 단축근로(2시간 단축시 4년, 4시간 단축시 2년)를 법제화하고, 더하여 0세 미만 자녀가 있는 경우 10일의 추가 양육 휴가를 제공한다면 엄마들이 가득한 직장에서 문화가 바뀌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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